지난해 추기석전에서 문묘제례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성균관대 학생들이 일무를 추고 있다.
지난 9월3일 추기석전 당시 서정기 성균관장은 초헌관으로서 재계는 커녕 금기 사항을 어기고 당일 아침 문묘 신삼문 앞에서 성균관대 여학생 폭행 사건을 일으켰다. 조선시대라면 나라의 정해진 형벌을 받아야 할 사건이었고, 지금 봐서도 성균관장을 물러나야 할 사건이었다.
추기석전을 파행으로 끝낸 서 관장은 이에 대해 사과나 반성 하나 없이 다음날 성균관 총회 대의원들에게 서신을 보내 추기석전을 정부의 요청에 따라 거행해 8년만에 복원했다는 변명만 했고, 성균관 총무처는 한술 더 떠 폭행이 아니라 여학생이 미끄러진 것이라는 거짓 해명서를 보냈다.
정부의 요청에 따라 추기석전을 거행했다고 하는 서 관장의 변명도 거짓말로 드러났다. 문화재청은 2012년 추기석전부터 2013년 춘기석전까지 공개행사 지원을 중단했으나, 2013년도 추기석전에는 행사를 지원했고, 올해 추기석전과 관련해서는 30일 전 행사계획서가 제출됐을 당시에도 아무 얘기가 없었다.
서 관장이 전가의 보도처럼 주장하고 있는 문화재청 공문도 의문투성이다. 문화재청은 추기 석전을 하루 앞둔 지난 9월2일을 시행일자로 해 ‘중요무형문화재 제85호 석전대제 공개행사(추기석전) 지휘 감독 요청’을 제목으로 하는 공문을 성균관에 발송했고, 성균관은 이 공문을 지난 9월18일 접수했다. 이 공문에는 ‘최근 3년간(2011~2013) 모니터링 결과’가 첨부됐다.
문화재청 무형문화재과는 이 공문의 내용을 적극 참조해 2014년 추기석전 행사에 만전을 기해달라고 했지만, 추기석전 하루 전날 결재된 이 공문은 추기석전이 한참 지난 9월18일 성균관에 접수됐다. 서정기 관장과 성균관 총무처는 이 공문을 가지고 추기석전의 파행을 변명하고 있으나 시행일자와 접수일자로 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서 관장이 새삼 불러일으킨 석전 일무 원형 복원 논란의 쟁점은 두 가지다. 하나는 봉행 일자이고, 다른 하나는 일무의 춤사위다.
석전 봉행 시기 문제
조선시대 때 석전의 봉행 일시를 음력 2월과 8월 초정일에 정한 것은 공부자의 학덕을 비롯한 역대 성현의 뜻을 본받기 위함과 아울러 개학을 알리는 의미도 있었다.
이는 성균관이 교육과 문묘제사를 담당하는 국가기관이었기 때문이었으나, 고종 32년(1895) 성균관 관제 칙령 제136호 반포로 인해 문묘제사를 담당하는 기관으로 축소되었고, 이후 개학의 의미는 상실됐다.
더욱이 지금 시대에 국가 기관도 아닌 성균관의 석전 봉행 일자를 두고 정부의 요청을 핑계로 원형 복원 운운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조선시대에 새벽 1시 석전을 봉행했다고 해서 원형 복원 운운하면서 지금도 새벽 1시에 석전을 봉행하자고 할 수는 없다.
석전 봉행 시기는 유림의 총의를 모아 결정하면 되는 일이다. 광복 후 심산 김창숙 선생이 춘기석전을 폐지하고 공부자 탄강일인 음력 8월27일 한 번만 지내기로 결정한 것도 유림총회의 결의에 따른 것이었고, 이후 봉행 시기의 변동 역시 유림총회의 결의에 따랐다.
지난해까지 춘기석전은 공부자 忌辰日(돌아가신 날)을 양력으로 환산한 5월11일에 봉행하고 추기석전은 탄강일을 양력 환산한 9월28일에 봉행했다. 이 또한 2006년 4월 성균관 유림총회에서 결의한 것이었고, 당시에는 3년의 유예기간을 두기로 했다.
지난해 7월19일 개최된 성균관 임시총회 당시 대의원들은 석전 봉행일에 관해 전면적인 2.8 상정일 복귀, 현행 방침 유지, 전면 자율화 등 다양한 방안을 놓고 치열한 토론을 벌였다. 결론은 성균관과 향교들은 당분간 봉행일을 통일시키지 않고 지금의 실정에 맞추어 자율적으로 봉행하는 한편 점차적으로 통일시키기로 결의했다.
올해 석전도 마찬가지다. 서 관장이 석전 봉행일을 변경하고자 했다면 성균관 총회의 결의를 얻었어야 했지만, 서 관장은 독단으로 춘기석전을 봉행하지 않았던 것이고, 추기석전을 파행으로 이끌었다. 석전 봉행 일자 변경은 석전 일무 원형 복원 문제와 관련이 없는 일이었고, 서 관장 자신도 석전을 양력으로 봉행해 유림 3천명이 유복을 입고 참여하는 전 국민 축제의 장으로 만들겠다고 공약했던 일이다.
팔일무의 춤사위 변형 문제
석전의 일무는 민가가 아니라 국가에서 관리하던 춤으로서 모든 절차가 나라의 법으로 정해졌고 춤사위는 예법에 따라 만든 것이기 때문에 문헌기록으로 남겨져 있음은 물론, 개인이 임의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고대로부터 이어진 일무는 주나라 시대에 이르러 줄을 지어서 추는 춤의 형식체계를 갖추게 된 이래 송나라를 거쳐 고려 예종 11년(1116)에 우리나라로 전해졌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일무는 1116년에 송나라로부터 들여온 것에서 유래한다.
고려와 조선 왕조를 거치는 동안에도 일무의 위치, 춤사위의 진퇴법 등에 관한 문제는 끊임없이 논란이 됐고, 이에 원형을 복원하고자 하는 논의가 지속적으로 이어져, 태종, 세종, 정조는 하·은·주 삼대의 古樂에 준해 일무의 원형을 복원해 그 전통의 맥을 지켜왔음이 <조선왕조실록>에서 확인된다.
우리나라의 일무 춤사위는 일제 강점 시기에 대부분 망실됐다. 일무를 담당하던 예악인들이 모두 흩어지게 됨에 따라 일무의 올바른 전승이 어려워지게 됐다. 1980년에 고(故) 성경린 선생이 문묘일무의 춤사위를 재현해 2006년 춘기 석전까지 성균관 석전에서 추었지만, 이 역시 원형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에 성균관에서는 한·중 문헌을 비교연구하는 고증을 거쳐 2006년 문묘 일무의 춤사위를 원형으로 복원해 석전에서 실행하게 됐다. 문묘일무의 원형복원은 성균관대 동아시아 특성화 사업단, 유교문화연구소의 지원과 (사)중요무형문화재 제85호 석전보존회, 석전교육원, 한국석전학회의 후원으로 2003년부터 2006년까지 5차에 걸친 “문묘일무 원형복원을 위한 학술시연”을 거쳐 2006년 9월에 <춘관통고>와 <악률전서>에 근거해 문무와 무무의 춤사위를 복원했다. 그리고 석전학 관계전문가로 구성된 심사위원회의 공식심의를 거쳐 2006년 다시 복원한 문묘 일무가 채택됐다.
이에 앞서 성균관과 성균관대학교는 2004년 2월13일 석전대제 발전을 지속적으로 이루어나가도록 한 협약서를 체결했다.
오늘날 중국과 대만에서는 공자의 문덕만을 섬겨 문무만으로 공자의 제사를 모시고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만이 유일하게 문무와 무무 두 춤의 원래 모습을 모두 갖추어 석전에서 실행하는 전통을 지켜가게 됐다.
서 관장과 성균관 총무처는 이 같은 과정들은 모두 무시하고, 석전이 1986년 중요무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됐으므로 이때 것이 원형이라는 막연한 주장만으로 올해 추기석전을 파행으로 몰았다.
1986년 문화재로 지정됐다 하더라도 원형 복원 연구를 통해 바로잡아야 할 것이 나왔다면 바로잡는 게 당연한 도리다.
2009년 경향신문에서는 석전 일무 갈등을 보도하면서 일무 춤사위의 경우 ‘3진3퇴’의 재현 문제가 핵심이라 하며, 성균관대 임학선 교수와 일무보존회 김영숙 회장의 주장을 싣고 있다.
임학선 교수는 “조선·중국의 각종 문헌을 보면 일무를 출 때 앞으로 세 번 나아가서 공경의 예를 표하고, 뒤로 세 번 물러가 사양·겸양의 미덕을 표현한다”고 했고, 김영숙 회장은 “3진3퇴를 하지 않고 제자리에서 우러러보고 굽어보며 구부렸다 폈다 한 내용이 세종실록 등 문헌에 나오는데, 이게 바로 우리의 독자성·고유성이다”라고 했다.
문제가 된 <세종실록>의 세종 12년 경술(1430) 2월19일(경인) 기사에서 박연은 “일무의 자리는 옛날 현인의 도설을 상고해 보니 묘정의 가운데 있고, 악현의 북쪽에는 있지 않았사온데 우리나라에서는 이것을 악현의 북쪽 섬돌의 남쪽에 설치하니, 이미 옛날 제도를 잃었고, 또 땅이 협잡하고 자리가 좁아서 앞으로 나아가고 뒤로 물러나면서 변화를 지을 도리가 없사오니 진실로 불편합니다”라고 했고, “일무를 추는 위치가 악현의 북쪽 언덕 사이에 있게 되면 나아가고 물러가는 절차를 할 수 없으니, 옛 제도에 의거하여 일무를 추는 것은 뜰 가운데 위치를 정하여 여섯 번 변하고, 아홉 번 변하는 절차를 다하게 하시기 바라옵니다”라고 했다.
세종 14년 임자(1432) 3월4일 예조에서는 박연의 말을 빌어 세종에게 아뢰었고 세종은 이를 허락했다.
서 관장과 성균관 총무처가 원형 복원이라고 주장하는 1986년 문화재 지정 당시 석전 일무는 김영숙 회장의 주장과 같이 3진3퇴가 없이 추는 일무의 형태였고, 김영숙 회장은 이의 근거로 <세종실록>의 기사를 들었다. 그러나 <세종실록>의 기사는 오히려 3진3퇴가 있다는 내용으로서 김영숙 회장의 주장 근거가 될 수 없음은 물론, 오히려 김영숙 회장의 주장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3진3퇴가 있었던 세종 대의 석전 일무와 3진3퇴가 없는 1986년 문화재 지정 당시 석전 일무 중 어느 것을 원형이라고 해야 할까?
서 관장은 원임 관장 당시의 일이라고 무조건 배척해 석전 일무의 원형 복원이 아니라 오히려 원형 파괴를 하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