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종단

성균관, 심산 김창숙 선생 57주기 추모제전 봉행

헌관들이 입취위를 하고 있다. 초헌관이 삼상향을 하고 있다. 아헌관이 헌작을 하고 있다. 종헌관이 헌작을 하고 있다. 헌관 이하 재위자가 재배를 하고 있다. 성균관(관장 김영근)은 5월10일 오전 11시 서울시 강북구 수유리 소재 심산 선생 묘역에서 ‘심산 김창숙 선생 57주기 추모제전’을 봉행했다. 이날 행사는 성균관·성균관유도회총본부·(사)김창숙선생기념

오현주 기자 2019. 5. 11.

 

헌관들이 입취위를 하고 있다.

 


 

 

초헌관이 삼상향을 하고 있다.

 


 

 

아헌관이 헌작을 하고 있다.

 


 

 

종헌관이 헌작을 하고 있다.

 


 

 

헌관 이하 재위자가 재배를 하고 있다.

 


 

성균관(관장 김영근)은 5월10일 오전 11시 서울시 강북구 수유리 소재 심산 선생 묘역에서 ‘심산 김창숙 선생 57주기 추모제전’을 봉행했다.

 

이날 행사는 성균관·성균관유도회총본부·(사)김창숙선생기념사업회가 주최하고, 성균관이 주관했으며, 광복회·서울북부보훈지청·강북구청·성균관대학교·서초구청·의성김씨대종회가 후원했다.

 

추모제전에는 김영근 성균관장을 비롯해 손진우 수석부관장, 성균관 원로 및 고문, 예정수 성균관유도회총본부 회장, 박홍영 성균관유도회 부회장, 정재진 광복회 서울시 지부장, 윤종오 서울북부보훈지청장, 박겸수 강북구청장, 김웅대 의성김씨대종회 회장, 김명렬 의성김씨대종회 전 회장, 김위, 김창, 김주 심산 선생 유족, 관내 유림 등 150여 명이 참석했다.

 

추모제향의 초헌관은 이승창 성균관 부관장, 아헌관은 황태원 성균관 원임 부관장, 종헌관은 김희경 성균관 동부학당 학장, 집례는 서정택 성균관 전례위원회 위원장, 축관은 김광수 전례위원회 부위원장, 알자는 육철희 전례위원, 좌집사는 이천복 전례위원, 우집사는 맹강현 전례위원, 사회는 박광영 의례부장이 맡았다.

 

김영근 성균관장은 추모사에서 “선생이 서거한 지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 우리 사회는 물질은 풍요로워진 대신 정신은 점점 메말라 가고 있다. 이러한 시기일수록 우리 유림은 선생의 정신을 이어받아 수기에 힘써 덕성을 회복하여 도의천명에 힘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광복회 회장의 추모사를 정재진 서울지부장이 대독했으며, 윤종오 서울북부보훈처장과 예정수 성균관유도회총본부 회장, 마지막으로 박겸수 강북구청장이 추모사를 했다.

 

이날 추모제전에는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해 신동렬 성균관대 총장, 박겸수 강북구청장, 박유철 광복회 회장, 김형호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 회장, 김웅대 의성김씨대종회 회장, 김재실 도산안창호선생 기념사업회 회장, 황길수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회장, 이천석 동아수출공사 회장, 유경현 대한민국헌정회 회장, 김용학 의성김씨수도권종친회 회장, 윤용택 성균관대학교 총동창회 회장, 이부영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이사장 등이 화환을 보내 추모했다.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선생 연보

 

1879년(1세) 8월27일(음력 7월10일)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칠봉동 사월리에서 아버지 의성 김씨 김호림과 어머니 인동 장씨의 외아들로 출생.

 

1905년(27세) 스승 이승희 선생과 함께 을사오적 처단 상소를 올림.

 

1909년(31세) 반민족단체인 일진회의 한일합병론을 성토하는 글을 발표하고 검거되어 옥고를 치름.

 

1919년(41세) 유림 137명이 서명한 <독립청원서>를 파리평화회의에 보내기 위해 영어로 번역하여 김규식 박사에게 보내 회의에 제출케 함. 이 일로 국내의 유림 500여 명이 검거됨. (파리장서운동)

 

1920년(42세) 박은식, 신채호 선생 등과 함께 미국에 위임통치를 청원한 이승만 탄핵. 박은식 선생과 한중 혁명운동지 <사민일보> 발간. 신채호 선생과 독립운동 잡지 <천고(天鼓)> 발간.

 

1926년(48세) 상해에서 김구 선생과 함께 의열단원 나석주를 국내에 밀파하여 동양척식회사와 식산은행을 폭파케 함.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모금운동을 대대적으로 일으킴. 이 일로 유림 600여 명이 검거됨. (독립군자금 모금운동) 임시정부 의정원 부원장(의장 이동녕)에 선출됨.

 

1927년(49세) 상해 공동조계병원에서 일경에 검거되어 대구로 압송됨. 장남 환기 국내에서 일경에 검거되어 고문 끝에 순국.

 

1928년(50세) 일제의 법 자체를 부인, 변호를 거절하고 14년 형을 받음. 2년간의 모진 고문으로 두 다리가 불구가 되고 신병도 악화됨.

 

1934년(56세) 병세 악화로 가출옥하고 한용운, 홍명희, 정인보 선생 등과 접촉함.

 

1940년(62세) 일제의 창씨개명을 단호히 거부함. 어머니 별세 후 21년만에 귀향하여 묘막에서 시묘살이를 함.

 

1943년(65세) 차남 찬기를 중경 임시정부에 밀파함.

 

1944년(66세) 고향에서 독립운동 추진하여 비밀결사체인 건국동맹 남한 책임자로 추대됨. (중앙책 여운형, 북부책 조만식)

 

1945년(67세) 건국동맹 일로 일경에 검거되었으나, 광복을 맞아 출감. 어느 정당에도 불참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환영대회 부회장에 추대됨.

 

1946년(68세) 신탁통치 반대투쟁 전개. 성균관장과 유도회총본부 위원장에 추대됨. 성균관대학을 설립하여 초대학장에 취임.

 

1948년(70세) 김구, 김규식, 홍명희, 조소앙, 조성환, 조완구 선생 등과 7거두 공동성명을 통해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함.

 

1950년(72세) 6.25 때 서울에서 북측의 사상 전향 요구를 거부함.

 

1951년(73세) 1.4후퇴로 부산 피란. 이승만 대통령 하야 경고문 발표로 부산형무소에 투옥됨.

 

1952년(74세) 이시영 부통령, 신익희, 서상일 선생 등과 국제구락부에서 반독재호헌구국 선언대회를 주도하고 옥고를 치름.

 

1953년(75세) 성균관대학이 종합대학교로 승격. 초대 총장으로 취임.

 

1956년(78세) 효창원 7열사 묘소 이장 반대투쟁위원장으로 투쟁함. 이승만 박사 3선 취임 반대 경고문 발표. 성균관대학교 총장직에서 사퇴.

 

1957년(79세) 자유당 정권의 압력과 술수로 성균관, 유도회 등 모든 공직에서 물러남.

 

1959년(81세) 반독재민권쟁취 구국운동을 거국적으로 전개. 이승만 대통령 사퇴 권고 서한을 발송함.

 

1960년(82세) 4.19혁명 이후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대표 추대. 백범 김구 선생 기념사업회 회장, 일성 이준 열사 기념사업회 회장 추대. 안중근 의사 기념사업회 회장 선출.

 

1961년(83세) 백범 김구 선생 시해진상규명투쟁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

 

1962년(84세) 3.1절에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을 받음. 5월10일 서울 중앙의료원에서 서거. 5월18일 사회장으로 수유동 산 127-4 묘지에 안장.

 


 

 

박광영 의례부장의 사회로 추모식이 진행되고 있다.

 


 

 

김영근 성균관장이 추모사를 하고 있다.

 


 

 

광복회 회장을 대신해 정재진 서울시 지부장이 추모사를 대독하고 있다.

 


 

 

윤종오 서울북부보훈지청장이 추모사를 하고 있다.

 


 

 

예정수 성균관유도회총본부 회장이 추모사를 하고 있다.

 


 

 

박겸수 강북구청장이 추모사를 하고 있다.

 


 

 

성균관유도회 70년사 봉정식을 하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신태익 씨에게 감사장을 수여하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추모식이 끝나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