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종단

‘붕괴 직전·화재 위험’ 숭보사 외면하는 문화재청

숭보사는 문묘 서리청(書吏廳, 사진 정면)의 오른쪽, 중국 음식점의 바로 뒤에 붙어 있다. 무너지기 직전인 숭보사 대문 지붕이 나무받침으로 겨우 유지되고 있다. 숭보사의 참혹한 현재 모습이다. 천막지붕이 있는 곳이 사당, 앞이 살림채이다. 1987년 음력 9월12일에 숭보사 사당에서 제향을 진행하는 모습이다. 지난 5월부터 사람이 거의 거주하지 않아 전기요

오흥녕 2022. 6. 16.

 

 

 

 

숭보사는 문묘 서리청(書吏廳, 사진 정면)의 오른쪽, 중국 음식점의 바로 뒤에 붙어 있다.

 

 

 

 

무너지기 직전인 숭보사 대문 지붕이 나무받침으로 겨우 유지되고 있다.

 


 

 

숭보사의 참혹한 현재 모습이다. 천막지붕이 있는 곳이 사당, 앞이 살림채이다.

 


 

 

1987년 음력 9월12일에 숭보사 사당에서 제향을 진행하는 모습이다.

 


 

 

지난 5월부터 사람이 거의 거주하지 않아 전기요금이 아주 소액이다.

 


 

 

대문이 굳게 잠긴 채 지금도 하루하루 무너지고 있다.

 


 

1. 문묘의 부속건물이지만 문화재청 소유는 아니다?

 

 

‘문묘의 한 부속건물로서 문묘의 사당을 포함한 집이라는 점과 특히 사당 안에 닫집과 위패가 그대로 남아있어 중요한 건물이라 할 수 있다’(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www.heritage.go.kr)

 

‘명륜동 숭보사는 서울 문묘 서리청 북쪽에 위치하여 서리청 배면부 담장을 공유하고 있다... 숭보사는 원래 문묘의 부속 건물이었으며... 신위가 모셔져 있는데 모두 12위이다. 이들의 신분은 최고위층으로서 성균관과는 밀접한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2009 서울 문묘 일원 종합정비계획, 89-90쪽)

 

서울시 종로구 성균관로7길 1에 위치하면서 1977년 3월17일에 서울시 민속문화재 제21호로 등록된 숭보사(崇報祠)에 대한 문화재청의 설명이다.

 

위의 글처럼 문화재청은 ‘숭보사를 문묘의 부속 건물로 인식’하고 있으나 다른 건물들처럼 사적 등으로는 지정하지 않았으며, 서울시의 문화재로 등록된 후 종로구청에서 관리하고 있다.

 

이번에 취재를 진행하며 성균관대 졸업생과 주변 주민들에게 “숭보사를 아시냐?”고 질문하니 대부분의 답변자들이 “그냥 오래된 한옥 아니냐?”는 반응이었고, 이곳이 무엇을 했던 곳인지 인지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2. 안향의 노비들이 제향하며 시작된 숭보사

 

가장 최근의 문묘 마스터플랜인 ‘서울 문묘 일원 종합정비계획’에서는 숭보사가 1780년경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 왜 생겼는지의 기원에 대한 내용은 전혀 밝히지 않고 있다. 이것은 숭보사에 대한 여러 가지 추정들이 있지만 정확한 사실을 확인하지 못했기에 기록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성균관을 출입하거나 문묘 인근에서 사는 주민들은 "고려에 성리학을 도입한 안향(安珦, 1243-1306) 선생이 미국의 링컨 대통령보다 560여 년전에 이미 노비해방의 생각이 있어 이를 실천하는 입장에서 자신의 노비들을 모두 평민으로 풀어주었고, 이를 고맙게 여긴 노비들이 선생이 가꾸는데 애쓴 개성 성균관 부근에 모여 살면서 안향 선생의 기일인 매년 음력 9월12일에 제사를 지내고, 성균관의 여러 일들을 스스로 도와주다가 조선 건국 후 성균관이 한양으로 옮겨가면서 이들도 자연스럽게 집단이주하여 서울 문묘 옆에서 살면서 개성에서 했던 것처럼 매년 기일에 제사를 지내고 성균관 일을 돕는 행위를 지속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또다른 이들은 "신분해방과 같은 의미에서 진행된 것이 아니라 고려말의 혼란기에 성균관이 여러 번 소실되고 제대로 관리되지 않으면서 국가의 지원도 미약하자 안향 선생이 자신이 가진 돈과 노비들을 내놓아 성균관 시설건립과 운영에 사용하도록 하는 과정에서 성균관 주변에 살던 노비들이 천인의 신분에서 벗어나고 후손들이 모여살면서 반촌(泮村), 즉 국립대학 성균관 주변의 대학가 주민을 형성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예조에서 성균관의 첩정(牒程)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본관(本館)의 노비는 바로 문성공(文成公) 안향이 바친 자기의 노비입니다. 그런데 지금 제처(諸處)의 차비(差備)로 많이 이역(移役)시켰으니 국가에서 인재를 양육하는 뜻에 어긋남이 있고, 또 선현(先賢)께서 선성(先聖)을 위하고 국가를 위하고 현재(賢才)를 위하여 입관(入官)시킨 뜻이 아닙니다. 청컨대 이제부터는 제처에 이역시키지 말고 오로지 양현(養賢)하는 일만을 맡기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 『예종실록』 권3, 예종 1년(1469) 2월 13일 -

 

대사성 이유(李瑜)가 아뢰기를, “우리나라 삼백 년 정치는 태학(太學)을 중시했습니다. 신은 벼슬하기 전에 일찍이 성균관에 출입한 적이 없었으나 고사(故事)를 대략 들었는데, 안 문성공(安文成公 안향(安珦))의 노복(奴僕)을 모두 수복(守僕)으로 삼았고 비석 모퉁이 안에서는 말을 탈 수도 없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 『승정원일기』 영조 11년(1735) 11월 5일

 

경기도 유생(儒生) 유학(幼學) 김사익(金思翼) 등이 상소하기를, “... 중수기(重修記)의 서문을 지어서 말하기를, ‘이 일은 안 문성공(安文成公 안향(安珦))이 반궁(泮宮)에 재물을 바치고 종을 바친 고사(故事)와 부합되니, 도가 행해지지 않을까 걱정하는 뜻과 성인을 사모하는 마음은 어진 이나 어리석은 이나 차이가 없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 『승정원일기』 고종 26년(1889) 5월 24일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등의 관찬기록에서 안향이 바친 노비들이 성균관에 속했고 이들은 사문진작을 위한 존재들이므로 함부로 다른 곳으로 옮기거나 대체하는 것이 불가능함이 다수 확인되고 있다.

 

안문성공(安文成公)은 본명은 구슬옥〔玉〕 변의 ‘향(向)’ 자인데 어명(御名)을 피하여 이름을 바꾸었다. 고려 시대에 찬성사(贊成事)를 지내면서 학교가 쇠퇴함을 근심하여 중국에 자금을 보내어 공자와 70 제자의 화상(畫像) 및 제기, 악기, 경서(經書)를 사들이고 국학(國學)을 바로 세웠다. 또 노비 100명을 헌납했는데, 지금의 반인(泮人)들은 모두 그때 헌납한 노비의 후손들이다. 이 때문에 반인들이 반촌(泮村) 북쪽에 제단(祭壇)을 만들어 문성공의 기일(忌日)이 되면 제사를 올리면서 경건히 추모하는 정성을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는다고 한다. - 『무명자집(無名子集)』 「반중잡영(泮中雜詠)」 220수(首) 중 17수

 

윤기(尹愭, 1741-1826)가 지은 시문집 『무명자집』 중 성균관에 대한 내용을 풍부하게 담고 있는 「반중잡영」은 ‘안향이 바친 노비 100명의 후손들이 반촌 북쪽에 제단을 만들어 그의 기일에 제사를 올리며 추모한다’는 사실을 명시하고 있는데, 어디서 그렇게 하는지 명칭을 표시하지 않지만 지금 서울시에서 숭보사 앞에 설치한 안내판에서 설명하는 내용과 거의 일치한다.

 

숭보사에 모시고 있는 12위(位)의 신위(神位)와 관련하여 ‘서울 문묘 일원 종합정비계획’ 90쪽에서는 고려 태학사 문성공 회헌 안상공을 비롯한 12인을 언급하고 있을 뿐 각각이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았으나 관련 내용들을 기초로 추적해보니 9인은 확인되고 있으나 3인은 정확하게 누구를 지칭하는지 파악되지 않는다.

 

<확인되는 9인>

 

□ 고려 태학사 문성공 회헌 안상공 : 안유(安裕, 1243-1306). 본관은 순흥(順興). 흔히 안향(安珦)으로 알려져 있으나 조선 문종과 이름이 같았으므로 피휘(避諱)하여 안유로 계속 불렸다. 1289년에 충렬왕을 따라 원나라를 오가며 성리학을 처음으로 도입하여 시조로 추앙받고 있다.

 

□ 좌의정 문정공 일송 심공 : 심희수(沈喜壽, 1548-1622). 본관은 청송(靑松). 1570년 이황의 장례에 성균관 대표로 참여하고 이후 도승지, 대사헌, 예조판서, 좌승지 등 주요 직책을 역임했다.

 

□ 대사성 오재 조공 : 조지겸(趙持謙, 1639-1685). 본관은 풍양(豊壤). 대사성, 부제학, 형조참의 등을 역임하며 청렴함으로 명망이 두터웠다.

 

□ 참판 성곡 이공 : 이제(李濟, 1654-1714). 본관은 전주(全州). 대사성, 대사간 등을 역임했다.

 

□ 우의정 문충공 학남 정공 : 정우량(鄭羽良, 1692-1754). 본관은 연일(延日). 1749년(영조 25) 병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올랐다.

 

□ 판서 삼주 이상공 : 이정보(李鼎輔, 1693-1766). 본관은 연안(延安). 대사성, 이조판서, 예조판서, 대제학 등을 역임했다.

 

□ 영의정 익정공 익재 홍공 : 홍봉한(洪鳳漢, 1713-1778). 본관은 풍산(豊山). 사도세자의 장인이고 정조의 외할아버지다.

 

□ 영의정 문충공 해석 김공 : 김재찬(金載瓚, 1746-1827). 본관은 연안(延安). 1807년 우의정, 1808년 좌의정, 1809년 영의정을 역임했다.

 

□ 영의정 문충공 경산 정상공 : 정원용(鄭元容, 1783-1873). 본관은 동래(東萊). 1848년(헌종14)에 영의정이 되었으며, 1863년 철종 승하 후 고종이 즉위할 때까지 원상(院相)으로 국정을 관장했다.

 

<확인되지 않는 3인>

 

□ 대사성 윤재(綸齋) 신공 □ 대사성 돈간재(敦艮齋) 윤공 □ 판서 열포(만포?) 이상공

 

누구인지 확인되는 9인은 대체로 성리학의 시조이거나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인물들이지만 안향을 제외하고는 어떤 계기로 신위가 모셔졌는지에 대한 기록이 어디에서도 확인되지 않는다. 추후 문화재청, 서울시, 종로구청에서 연구용역 등을 통해서 사실관계를 제대로 파악하는 작업이 필요한 부분이다.

 

3. 이상하고 복잡한 소유, 거주, 관리로 인해 붕괴와 화재 위기에 직면

 

대법원 인터넷등기소(www.iros.go.kr)를 통해 숭보사 관련 지번인 ‘서울시 종로구 명륜3가 15-1, 15-2, 15-3’의 등기부등본 내역을 확인해 보면, 3필지 모두 종교용지로 지목(地目)이 설정되어 있으며 면적 60.5㎡의 15-1 지번과 45.3㎡의 15-2 지번은 1988년에 서울시 종로구가, 86㎡의 15-3 지번은 1974년 5월30일에 매매했다며 1981년 4월에 김모씨가 처음으로 등기완료했다.

 

이해할 수 없는 점은 특히 15-3 지번의 경우 매매를 했다면 국가든, 개인이든 상대주체가 표시되어야 하는데 그런 흔적이 없다. 이에 대해 성균관 문묘 근처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주민은 “박정희 정권 후반기 유신시대 때 소위 체육관 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간접선출했던 통일주체국민회의 소속 권력자가 관공서를 움직여서 등기를 마쳤다는 소문이 있었다”고 전했으나 어디에서든 확인이 불가능했다.

 

이렇게 소유자가 서로 다른 데다 더욱 문제는 사당이 위치한 15-2 지번은 종로구, 살림채가 위치한 두 지번 중 15-1 지번은 종로구, 15-3 지번은 처음 취득한 김모씨의 자손이 가지고 있어서 종로구나 김모씨 모두 현재의 상황을 변경하기가 매우 어렵게 되어 있다.

 

2022년 6월 중순 현재 어떤 상황인지 파악하기 위해 현장을 방문하니 문은 자물쇠로 굳게 닫혀 있고, 우편함에 있는 단전(斷電) 안내문에 의하면 거주자인 이모씨가 5월 이후로는 거의 체류하지 않은 것 같으며 요금 체납으로 오는 6월25일부터 전기가 끊길 것임을 한전이 통보하고 있다.

 

실제 눈으로 보이는 부분만 확인해도 보통 심각한 정도가 아닌데, 숭보사 건물들의 지붕은 마치 70-80년대 판자집을 연상시킬 정도로 지붕이 낡아서 두꺼운 천으로 덮어두었으며 출입구 역할을 하는 대문 지붕도 내려앉기 직전이라 나무 받침대가 겨우 버티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숭보사 관리를 담당하고 있는 종로구청은 “확인하신 것처럼 지금 건물 내외관의 상태가 상당히 좋지 않아서 구청에서도 소유주, 거주자와의 접촉을 통해서 개선방안을 찾고 있으나 그분들이 그다지 협조적이지 않아 제대로 된 보수공사 등의 조치를 못하고 있다”고 답했다.

 

4. 문묘의 안전을 크게 위협하는 현 상황을 외면하는 문화재청

 

1984년 1월1일 초대 문교부장관을 지낸 안호상(安浩相) 박사를 회장으로 선임하여 결성된 후 지속적으로 숭보사의 제향과 보존 문제에 대해 관심과 논의를 지속해온 숭보사보존회(회장 안명호) 관계자는 “숭보사 관련 토지들은 1978년에 갑자기 종교용지로 지목이 변경되는 등 납득이 안 되는 역사적 과거가 있고, 성균관대 정문과 가깝다 보니 최근 공시지가가 급등-2022년 현재 1㎡당 492만 2천원으로 1평(=3.3㎡)당 환산하면 1624만 2천6백원이다-하고 있으며 토지 소유자가 나눠져 있는 등으로 복잡하다. 하지만 보다시피 건물이 거의 무너지기 직전이고 음식점과 바로 붙어있는 등 화재위험도 상당하니 빨리 무슨 조치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래 전부터 점점 악화되는 모습을 지켜본 성균관 관계자는 “숭보사의 현재 관리자는 서울시, 종로구청이지만 역사성과 위치 등을 고려하면 문묘와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이다. 숭보사가 잘 보전되어야 문묘도 안전하게 유지되는 것인데 서울시, 종로구청이 알아서 하려니 내버려두고 문화재청이 손을 놓고 있는 것은 납득이 안 된다”며 답답해 했다.

 

예전의 호칭인 서울 문묘든, 지금 주로 사용하는 용어인 성균관 문묘든 서울특별시 종로구 성균관로 일대에 위치한 각종 시설물들은 단순히 오래된 유적이 아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온고지신(溫故知新)과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자세로 소중히 보존하고 가꾸어 전세계인들에게 당당히 소개하고 관광상품화하여 내외국인들이 언제든 찾을 수 있는 문화의 공간이자 자라나는 후세들의 문화적 자긍심을 고취시키는 밑바탕이 되어야 한다.

 

지금의 숭보사는 자체는 물론 담벼락으로 붙은 문묘의 안전까지 크게 위협하고 있다.

 

1987년 6.10 민주항쟁의 결과로 그해 10월29일 제정된 현행 헌법 제9조는 ‘국가는 전통문화의 계승·발전과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야 한다’고 명시하여 전통문화 보존과 그에 대한 국가의 노력을 강조하고 있다.

 

지금의 복잡하고 위험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문묘의 직접적 책임당국인 문화재청의 결단과 빠른 조치를 촉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