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문묘 건축물은 오랜 역사 속에서 소실, 재건, 보수, 중창, 복원을 거듭했다.
서울 종묘의 토지는 일제시대에 조선총독부에 의해 등기완료됐다.
서울 조계사의 등기부등본에서도 확인되듯 우리나라는 일제시대의 등기제도를 지금도 준용하고 있다.
양현고 등 수많은 고려, 조선의 국가유적지 토지는 이미 상당수가 민간에 이전됐다.
서울 문묘 성균관의 토지는 '명륜3가 53' 둘레에도 5101.4㎡(1545.8평)가 더 존재한다.
2. 창건 이후 수많은 유림의 재력과 에너지가 투입된 문묘 성균관
본지는 서울 문묘 관리청으로 등록된 문화재청에 ‘1만 평이 넘는 토지를 1972년 9월28일, 29개 건물을 2014년 1월6일에 등기하게 된 근거’를 질의했고, 이에 대해 문화재청은 ‘사적 서울 문묘와 성균관의 보존 및 관리를 위해 등기했다’고 답했다.
서울 문묘는 고려 왕조 개경에서 성균관이 설립된 이후 조선 왕조가 개창되고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1398년에 지금의 자리에 위치했으나 ‘서울 문묘 일원 종합정비계획(2009, 종로구청)’ 136쪽의 ‘[표 4-1] 서울 문묘 건축물 개요’에도 정리되어 있듯 화재, 임진왜란,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등으로 연이어 소실되었다가 재건, 보수, 중창, 복원을 거듭했고 그 과정에서 왕조 정부의 물력과 인력이 사용되기도 했으나 많은 유림의 재력과 에너지가 투입돼 운영됐다.
‘안 문성공(安文成公)은 본명은 구슬옥〔玉〕 변의 ‘향(向)’ 자인데 어명(御名)을 피하여 이름을 바꾸었다. 고려 시대에 찬성사(贊成事)를 지내면서 학교가 쇠퇴함을 근심하여 중국에 자금을 보내어 공자와 70 제자의 화상(畫像) 및 제기, 악기, 경서(經書)를 사들이고 국학(國學)을 바로 세웠다. 또 노비 100명을 헌납했는데...- 『무명자집(無名子集)』 「반중잡영(泮中雜詠)」 220수(首) 중 17수‘
’성균관이 아뢰기를, “현재 중국군이 다 철수하고 산릉(山陵)의 역사도 다 끝났으니, 이때에 모든 건축물을 한결같이 예전 제도에 따라 하지는 못하더라도 우선 성전(聖殿)을 먼저 세워 신령을 모시는 곳으로 삼는 것은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외(中外) 제생(諸生)들이 미폐(米幣)를 수합하여 그 수량이 적지 않은데, 오랫동안 쌓아두고 즉시 조처하지 않아 도를 존모하는 제생의 정성이 허사로 돌아가게 하고 있으니, 미안한 듯합니다. 만일 본관(本館)의 관원으로 하여금 그 일을 전담하여 모인 재물로 재목을 사고 품삯을 지급하여 시간을 두고 점차 건조하게 한다면 민력(民力)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도 일이 쉽게 이루어질 것이니, 예조로 하여금 헤아려 가부를 결정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선조실록』 권24, 선조34년(1601) 2월 24일
격동의 역사를 지나는 동안 성균관 건립, 중창, 복원 당시의 물력, 인력 등의 구체적인 사용현황이 기록된 자료가 확인되지는 않지만 각종 전쟁, 국권 침탈 및 상실, 재정 부족 등의 상황에서도 서울 문묘 성균관은 조선 왕조의 통치이념인 유교 문화의 대표적 상징으로 인식되었고, 아주 오래 전부터 내부 구성원들과 유림들이 자체적으로 운영, 유지, 관리해오던 자치기관이었다.
그 속에서 활동하던 관리, 유생, 수복, 반인(泮人)들의 자율성을 최대한 존중하고 인정하는 분위기가 지속됐으므로 기꺼이 재력과 여러 필요 물품을 내놓고 자발적으로 헌신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지금까지 보존되어 올 수 있었다.
3. 조선총독부와 대한민국 정부도 등기하지 않았던 서울 문묘 성균관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종묘, 경복궁, 창경궁, 창덕궁 등은 국왕과 왕가를 위한 시설이었으므로 처음부터 왕실에서 물력과 인력을 투입하여 건설, 유지, 관리하였고 조선 왕조가 무너지자마자 조선총독부가 시설 철거, 개조, 자료 이관, 인원 철수 등을 단행했다.
반면에 서울 문묘 성균관은 1911년 6월15일 ‘조선총독부 부령 제73호 경학원 규정’에 따라 경학원(經學院)으로 개편된 후에도 대지 16433평, 건물 39동을 인가받아(2009 서울 문묘 일원 종합정비계획, 74쪽) 지금 확인되는 대지 40089.4㎡(12148.3평), 건물 약 33개보다 훨씬 더 큰 규모로 보존되었고 유림, 수복도 존재하면서 분향과 석전을 진행했다.
그러면 등기에서는 어떤 차이를 보일까?
우리나라의 근대적 등기 제도는 1906년 12월 시행된 '토지가옥증명규칙'에서 시작됐는데, 그 이전에는 조선 초 만들어진 입안(立安)이라는 제도가 시행되다 구한말에 도입된 가계(家契)와 지계(地契) 제도가 가옥과 토지의 공적 소유 관계를 나타냈다.
지계는 개항 후 국내에 거주하게 된 외국인의 거류지에 관한 조약에 의해 처음 발급됐는데, 외국인은 거류지의 10리 이내에서만 토지를 소유할 수 있었고 이 제도는 결과적으로 일본인의 토지 침탈을 막는 역할도 했다.
이에 따라 실질적으로 이미 조선을 지배하던 일본 정부는 대한제국의 토지 관리 제도가 미미해 부동산의 소유권이 부당하게 침해되는 사례가 많다는 명목으로 지계를 대신할 '토지가옥증명규칙'을 만들었다. 이 규칙은 토지나 가옥을 거래한 뒤 당사자는 계약서 2통을 만들어 통장 또는 동장에게 제출해 인증을 받은 뒤 군수 또는 부윤의 증명을 받도록 했고, 외국인의 토지 소유권 취득을 폭넓게 인정했다.
일제는 한일합방(1910) 후인 1912년 조선민사령과 조선부동산등기령을 잇따라 공포해 일본의 민법과 부동산등기법을 조선에서 사용하도록 했고 1912년 8월의 토지조사령, 1914년 4월의 토지대장규칙을 통해 토지대장을 만들고 이를 근거로 등기부까지 작성이 이루어진 후에는 제국 운영에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토지에 대해 직접 등기작업을 진행했다.
그 사례들은 쉽게 확인되는데, 대법원 인터넷등기소를 통해 ‘서울특별시 종로구 훈정동 1-2’에 위치한 종묘의 등기부등본을 열람하면 토지에 대한 소유권 보존등기는 1928년 1월12일, 모든 건물에 대한 소유권 보존등기는 1973년 4월18일에 일괄적으로 진행됐다. 즉 종묘는 일제 강점기에 최소한 토지에 대해서는 이미 국가 소유임을 확인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에 위치한 경복궁의 등기부등본을 열람하면 토지에 대한 소유권 이전등기는 1996년 4월12일 이루어졌고 등기원인은 ‘1995년 12월30일 교환’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1995년 8월15일부터 1996년 11월13일까지 이루어진 조선총독부 철거와 관련되어 그 부지와 합하여 처리하는 과정으로 파악된다. 조선총독부가 자리했던 지역인만큼 당연히 당시 국가인 일제의 소유라고 등록했다. 다만 건물들은 2013년 12월23일에 일괄적으로 문화재청에서 소유권보존등기를 진행했는데 이번 확인과정에서 국민들에게 익숙한 건물인 근정전, 향원정 등의 등기부등본은 목록에서 보이질 않았다. 문화재청에서 등록을 놓친 것인지, 다른 지번으로 표기되어 있는지 확인이 필요하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에 위치한 창경궁의 등기부등본을 열람하면 토지에 대한 소유권 이전등기는 1971년 5월21일 이루어졌고 등기원인은 1963년 2월9일 승계로 되어 있다. 합병한 사적지에 대한 언급이 있는 것으로 봐서 분할된 토지를 합쳐서 이때 하나로 등기한 것으로 보이는데, 추후 ‘1963년 2월9일 승계’의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할 예정이다. 대한제국 말기이자 한일합방 직전인 1909년 11월1일부터 위락시설인 창경원(昌慶苑)으로 개조했으므로 역시 일제의 국유지로 등록했을 것으로 보인다. 건물들은 1973년 4월19일에 일괄적으로 문교부 문화재관리국에서 소유권보존등기했다.
좀 더 정확한 부분들은 일제 강점기 당시의 서류들을 확인해봐야겠지만 종묘, 경복궁, 창덕궁 등의 왕실재산은 기본적으로 조선총독부가 최소한 토지에 대해서는 등기를 진행했고, 건물들은 서울 문묘와 마찬가지로 문교부 문화재관리국과 이후 승격된 문화재청의 업무소홀로 등기를 하지 않았다가 뒤늦게 하나씩 진행한 것으로 보인다.
4. 고려, 조선왕조가 건립했으므로 대한민국 서울 문묘 성균관은 당연히 국가 소유다?
한 국가의 헌법과 법률은 문구는 그대로 유지되어도 시대 변화에 따라 해석과 적용이 달라지곤 한다.
특히 국가와 공권력의 영향력이 너무 막강하여 개인과 단체의 권리와 재산쯤은 가볍게 무시하던 시절을 지나온 우리나라에서는 지금의 사법부가 국민 여론의 보편타당한 기준을 받아들이고 있고, 이런 맥락에서 과거에는 도저히 불가능해보였던 ‘사건의 재심’ ‘국가정책의 오류 판정’ ‘소유권에 대한 관념 변경’ 등이 헌법재판소, 대법원 등 최고 권위의 사법기관에서 계속 나오고 있으며, 이런 모습을 보며 국민들은 ‘세상이 변했고 우리 사회도 합리성에 기반한 판단이 통하고 있음’을 알고 안도한다.
서울 문묘 성균관은 왕실 소유의 재산이라기보다는 공적(公的) 기관으로서의 성격과 자율성이 보장되고 조선 민족의 혼이 깃든 곳이었으므로 폭압적인 조선총독부조차도 원래의 교육 기능과 관리양성 등은 막았으나 마지막까지 등기작업이나 완전한 해체를 시도하지 않았다.
해방 이후는 물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에도 전국 유림을 조직화하여 성균관유도회총본부를 결성하고 성균관을 재편성했던 지도자 심산 김창숙(心山 金昌淑, 1879-1962) 선생이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를 비판하며 하야를 주장하고 박정희 대통령의 군부정권을 격렬하게 비판하여 정부마다 온갖 탄압책을 구사했으나 서울 문묘 성균관에 대한 등기작업은 진행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김창숙 선생이 세상을 떠나고 유림 조직이 당시 정부를 옹호하는 입장과 그런 흐름을 반대하는 입장으로 나뉘며 내분이 발생하고, 1960년대 중반부터 성균관이 성균관대학교에서 배제되는 상황이 되었는데도 등기작업은 이루어지지 않다가 박정희 정권이 폭압정치의 강도를 올려가던 1972년 9월28일에 토지에 대한 소유권 보존등기가 이루어졌고, 그로부터 약 20일 후인 10월17일에 위헌적 계엄과 국회해산 및 헌법정지 등을 골자로 하는 대통령 특별선언인 ‘10월 유신(維新)’이 발표됐다.
어떤 이들은 ‘고려·조선 왕조가 성균관을 건립했으니 당연히 국가 소유이지 않느냐?’고 얘기하지만 1948년 제헌헌법은 물론 현행헌법의 전문과 부칙 어디에도 ‘대한민국이 고려왕조와 조선왕조를 계승했다’는 법적 지위를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은 없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민국은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 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 독립 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며 모든 사회적 폐습을 타파하고 민주주의 제제도를 수립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케 하며 각인의 책임과 의무를 완수케 하여 안으로는 국민 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국제 평화의 유지에 노력하여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정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결의하고 우리들의 정당 또 자유로이 선거된 대표로써 구성된 국회에서 단기 4281년 7월12일 이 헌법을 제정한다’ (제헌헌법 전문)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게 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 1948년 7월 12일에 제정되고 8차에 걸쳐 개정된 헌법을 이제 국회의 의결을 거쳐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한다’(현행헌법 전문)
그리고 만약 ‘대한민국이 고려왕조와 조선왕조를 계승했다’는 논리를 인용한다면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45’에 위치한 경희궁은 원래 72800평 부지였으나 지금은 101,174㎡(약 30659평)으로 절반 넘게 줄어들었으니 나머지 민간 소유 토지도 국가 소유로 환수해야한다.
서울 문묘 성균관 주변에 위치한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3가 2-1’의 양현고(養賢庫, 성균관 유생들의 물품조달 기관),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3가 147-1’에 위치했던 사섬시(司贍寺, 종이돈 제조 및 외거노비 세금 징수처),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1가 2-32’에 있었던 흥덕사(興德寺)도 조선 왕조의 지원으로 건립, 운영된 것으로 ‘서울 문묘 일원 종합정비계획(종로구청, 2009)’ 92-93쪽에서도 밝히고 있으므로 당연히 그 부지에 있는 민간 소유 토지도 국가 소유로 만들어야한다.
이외에도 서울 시내를 비롯해서 전국 곳곳에 산재했던 왕자방, 공주궁, 후궁전, 관청의 건물, 토지, 염전, 어장 등에 대한 자료는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등의 관찬기록 뿐만 아니라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등에 보관되어있는 자료에서 얼마든지 확인가능할 테니 민간 소유 재산을 지금이라도 국가 소유로 바꿔야 한다.
하지만 이런 과정이 만약 현실화된다면 재산권과 소유권에 대한 극심한 혼란을 야기할 것이므로 국민들을 탄압하고 독재를 하겠다고 마음먹지 않는 이상 실현되기는 어렵다.
5. 1972년 9월28일의 서울 문묘 토지 소유권보존등기의 합법성을 지금이라도 따져봐야한다.
2014년 1월6일에 이루어진 서울 문묘 성균관 건물 29건에 대한 일괄적인 소유권 보존등기는 ‘1972년 9월28일의 토지 소유권 보존등기를 통해 합법적으로 서울 문묘 성균관에 대한 소유권을 국가가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가장 중요한 근거로 하고 있으므로 앞으로의 문제는 1972년 9월28일의 토지 소유권 보존등기가 과연 절차적 정당성과 논리적 타당성을 얼마나 갖추고 있는지를 확인하면 금방 판단이 가능할 것이다.
당시의 강압적인 시대 분위기를 감안하면, 서울 문묘를 지키던 유림들에게 설명하거나 근거 서류를 제대로 제시하는 과정을 생략했을 가능성이 크고, 만약 당시 성균관장 등 극소수 대표자의 서명이나 동의를 받았더라도 ‘중대한 결정은 총회를 통해 다수의 동의를 받은 가운데 이루어져야한다’는 유림 사회의 오랜 관행과 최소 몇 십년동안 내려온 종헌 등을 지키지 않았을 것으로 예상된다.
만약 이런 과정들에서 심각한 문제가 발견되고, 우리 헌법과 사법부가 보호하고 있는 사유재산권의 기본인식과 어긋났다면 지금이라도 바로잡아야 한다.
‘국가가 서울 문묘 성균관의 토지와 건물을 강탈해간 것과 마찬가지다’라는 주장에 대해 ‘서울 문묘 성균관은 원래부터 국가 소유이므로 나라가 등기처리하고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합법이다’라는 지금까지 너무나 당연시되던 문화재청의 인식 중 어느 것이 국민 여론과 사법부의 동의를 얻을지 결과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