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숙자 이사는 살아온 과정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동료 학생과 선생님들 앞에서 김숙자 중학생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
아인 박종한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다도를 가르쳐 정서 순화를 통한 성장의 모습을 증명해보이셨다.
신상철(申尙澈, 1924-2005) 제23대 체신부장관의 진주우체국 방문시 김숙자 교환계장이 브리핑하고 있다.
진주우체국 전화교환원 교환계장으로 100여 명의 사원들을 이끌던 시절은 지금도 기억이 아련하다.
진주 촉석루 앞에서 친정가족들과 기념사진을 촬영했다.(친정어머니 왼쪽이 김숙자 이사)
7남매 가족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가장 행복한 충전의 시간이다.
바쁜 일정상 자주는 아니지만 아들, 손자와 함께 함께하는 때는 또다른 충전의 시간이다.
지난 2015년 춘기석전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변(籩)과 두(豆)의 제작을 주도했다.
지난 2019년 8월, 73세의 나이에 성균관대 일반대학원 의상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처음부터 김숙자 이사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폐슬'에 대한 내용도 석사학위 논문 56페이지에 담았다.
대학원 졸업식 날에 네째동생(왼쪽), 10년 높은 연배로 성균관에서 만난 윤부용 선생님과 함께했다.
지난 2022년 11월28일 개최된 '석전대제이수자회 동계학술발표회'에서 김숙자 이사가 발표하고 있다.
김숙자 이사가 제기하는 문제들에 대한 내용은 석전대제보존회 홈페이지 '정관'에서 볼 수 있다.
김숙자 이사가 다양한 관심사에 대한 조리있는 설명으로 본인의 생각을 밝히고 있다.
2023년 5월30일 개최된 여성유도회 창립 48주년 기념식에서 각종 전시회 출품작들을 전시했다.
대표적 '할머니 유림'인 김숙자 이사와 성의순 전 부관장이 얼마전 열린 여성유도회 행사에 참석했다.
지난 9월16일 공기 2574년 추기석전 봉행 후 열린 강평회에 김숙자 이사가 자리하고 있다.
성균관의 주요 행사가 있을 때 거의 빠짐없이 참석하는 또 한 분의 할머니 유림이 계시다. 언제나 단정한 쪽머리와 깔끔한 한복 차림으로 주요 장면들을 폰 카메라에 담는 모습을 보이니 '뭘 하는 분일까?' 싶었는데, 활동하는 공간이 한둘이 아니라고 하신다. 궁금한 점들이 많아 몇 번의 인터뷰를 진행했다.
1. 본인 및 살아오신 과정에 대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이름은 김숙자(金淑子)이고, 1946년 12월3일 경남 진주에서 7남매(4녀 3남) 중 셋째로 태어났으니 올해 나이는 77세입니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피난 갔다가 돌아오니 중앙시장 근처에 있던 저희 집터가 폭격을 받아 움푹 패인 상태였던 것이 기억이 나고, 지혜로운 부모님들이 저희 7남매를 사랑으로 돌봐주셔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불편하다고는 생각했지만 불행하다고 고민하지는 않았습니다.
중학교를 못 갈 형편이었는데, 우리나라의 차(茶) 전문가로 진주 대아중·고등학교를 설립한 아인(亞人) 박종한(朴鐘漢, 1925-2012) 선생님이 학생 모집차 제가 다니던 봉래국민학교에 오셨다가 ‘공부를 잘 하면 수업료를 감면이나 면제를 해준다’고 하셔서 대아중학교에 입학해 열심히 공부하는 와중에 어릴 때부터 노래를 잘했기에 각종 콩쿠르 대회의 독창 부문에 나가 상장도 받곤 했습니다.
해인중·고등학교 및 해인대학(지금의 경남대학교)을 설립한 효당(嚆堂) 최범술(崔凡述, 1904-1979) 선생님이 어려운 저희 집안 사정을 아시고는 ‘학비를 모두 면제해주겠으니 해인고등학교로 오라’고 하셨으나 ‘가계를 도와 동생들 공부시켜야 한다’는 생각에 ‘실업계 학교로 가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중학교 졸업 후인 1962년에 이현동의 진주교도소 맞은편 논 가운데에 있던 야간부 학교인 진주상고에 진학했는데,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2학기로 올라갈 때 학교가 어려워져서 해인고등학교(지금의 동명고등학교)와 통합하며 월납금을 한꺼번에 내라는 조건이라 집안형편에 그럴 수가 없었고, 예전에 해인고 설립자인 효당 선생님의 말씀도 있어서 아마 찾아뵙고 사정을 얘기 드렸으면 계속 다닐 수도 있었겠으나 자존심이 강한 사춘기 학생으로 차마 그러지는 못했습니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학교에서 급사로 심부름을 해주며 약간의 돈을 받다가 1962년 12월에 큰언니가 다니고 있던 진주우체국에 임시 교환원으로 들어갔습니다.
당시는 지금처럼 자동으로 전화가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체신부 소속이던 우체국에서 각 지역의 회선을 교환원들이 연결해주곤 했는데, 이듬해인 1963년에 교환원들에 대한 기능직 공무원시험이 처음 시작되어 그 시험에서 합격해 정식으로 체신부 전화교환원 공무원이 됐습니다.
동료들은 대부분 고졸이었으나 저는 중졸이라 승진 등에서 계속 학력에 대한 차별을 받았습니다만 비굴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동료들보다 열심히 하면 되겠다'고 생각해서 노력하다 보니 장관상을 2개 받았으며, 1972년에 처음으로 157명의 여성 교환계장을 승진시킬 때 저도 임명을 받았습니다. 신상철(申尙澈, 1924-2005) 체신부 장관이 진주우체국을 방문했을 때 휴대용 마이크를 사용해 설명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는데, 그러다가 1974년 우체국을 퇴직했습니다.
2. 당시 전화교환원들의 근무환경은 어떠했습니까?
교환원들이 연결을 해줘야 먼 지역간의 통화가 가능했으므로 전화국의 교환원들은 24시간 근무했는데, 당시 여성들은 직장을 다니다가도 결혼을 하면 대부분 퇴사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교환원 중에 결혼해서 출산하신 분도 계셨는데, 요즘처럼 우유나 분유가 있던 시절도 아니어서 출근 후 할머니가 젖먹이 아이를 업고 찾아오시면 쉬는 시간에 젖을 먹이기도 했고, 제일 가슴이 아팠던 경우는 집에 계신 할머니에게 떼놓은 아이가 밤에 열이 나고 아프면 할머니들이 업고 전화국을 오셨는데 병원도 마음대로 못 가던 때라 엄마 교환원이 아픈 애기를 어르고 달래는 장면이었습니다.
33, 4세 정도였던 부장들을 10대 후반, 20대 초중반이었던 교환원들이 ‘할머니’라고 놀리면서 부르곤 했고, 계속 다니더라도 정년 연령이 지금보다 훨씬 짧았습니다.
3. 1974년에 우체국을 퇴직했다고 하셨는데,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당시에 건강이 많이 안 좋아지면서 100명 정도 되는 아래 직원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다는 점들이 부담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아래의 네 동생들을 공부시켰는데, 그해에 7남매 중 막내 동생이 서울대에 입학하는 모습을 보고 나니 친정어머니께서 ‘이제는 너를 위해 살아라’고 말씀하신 점도 작용했으며, 공교롭게도 퇴직 후 10일만에 친정아버지께서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는 등 일이 많았습니다.
4. 이후에는 어떻게 살아오셨습니까?
퇴직과 아버지의 빈 자리에 대한 생각으로 심신이 미약해져 방황하다 언니들의 도움으로 작은 백화점의 유아복 매장을 인수해 또 다른 삶을 시작했습니다.
어려서부터 자존심도 강했고, '내 앞가림을 내가 한다'는 자세로 살아오며 뭐든 매진하는 성격이라 처음의 어려움을 차츰 극복했고, 아이 아버지를 만나 1975년에 아들을 낳은 후에는 애를 업고 서울에 물건하러 다녀오곤 했는데, 오고 가며 어딘가에 부딪히곤 하며 아이 몸에 피멍이 드는 것을 보고 속상해서 이후에는 신발 매장, 분식점, 주택 건축 등으로 분야를 완전히 바꾸며 쉬지 않고 일했습니다.
하는 것마다 잘 되는 편이었는데, 특히 분식점을 하며 번 돈으로 1980년대 후반부터 집을 지어 부동산 경기가 한창 좋을 때는 한 채 지어서 팔면 한 채 가격 정도의 수익이 나곤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돈이 모이니 그걸 염두에 둔 이들로 인해 한창 힘든 시간들을 보냈고, 지난 1998년 11월에 아이 아버지가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난 후에는 더 이상 예전처럼 돈을 버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어떤 분들은 제가 의복에 관심이 많고 제례, 의례복 등을 바르게 입으시도록 신경 써서 만들어드리니 ‘서울 광장시장에서 옷을 만드는 장사를 하고 있다’고 잘못된 말씀들을 하시는 것같던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맡기면 비용이 많이 드는데, 각 과정들마다 적절한 가격 및 기술자의 수준을 알고 있으니 저에게 부탁하는 분들에게 최대한 도움이 되도록 한번 맡을 때마다 여러 번 직접 방문하고 꼼꼼하게 챙겨서 만들어드리는데 그것이 어느 순간부터 마치 제가 돈을 벌기 위해 옷 제작을 맡는 것처럼 알려져 속이 상할 때도 있었습니다.
5. 성균관은 언제, 어떤 계기로 출입을 시작하셨습니까?
앞서 이야기 드렸던 아인 박종한 선생님이 ‘너가 나중에 기회가 되면 성균관에 가서 공부를 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곤 했는데, 경남 진주에 살 때 서울을 와본 적도 없는 저는 성균관이 뭘 하는 곳이고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아인 선생님의 영향으로 차(茶)에 대한 관심을 커져 나중에는 한국차문화협회의 이사도 지냈는데, 차를 통해 예를 배우고 가르치는 과정에서 보니 사람마다 조금씩 서로 달랐고, 또 누군가에게 예를 가르치려면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책임감을 느끼면서 지난 2000년에 처음 성균관에 나올 때는 이런 부분들을 정리해 제대로 배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몇 번 그냥 돌아보다가 ‘어디에 가면 되느냐?’고 물어보니 성균관여성유도회중앙회를 추천해주는 분들이 계셔서 거기에 갔다가 명덕학당에 입학한 전후로 석전(釋奠)을 각각 1번씩을 봤는데, 그때 한 번도 바깥에서 본 경험이 없던 석전 제례복에 매료되었습니다.
특히 제례복 앞의 빨간색 ‘폐슬(蔽膝, 제복을 입을 때 앞에 늘이던 헝겊으로 무릎 덮개의 역할을 함)’이 참 이상해서 만나는 분들에게 질문을 드렸으나 대답을 해주는 분들이 계시지 않아서 답답함을 느끼다가 권오흥(權五興, 1936-현재, 1996년 9월10일 중요무형문화재 제85호 석전대제 보유자로 인정받음, 현재는 명예보유자) 석전대제 보유자 선생님을 소개받아 여쭤보니 선생님께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보라’고 하셔서 그 책이 규장각에 있다는 얘기를 듣고는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던 서울대학교 규장각(奎章閣)을 직접 찾아가서 열람 신청을 했습니다.
전혀 올 일이 없을 것같은 50대 후반의 아주머니가 온 걸 궁금하게 보신 어느 연구관님이 ‘왜 여길 오셨냐?’고 물어보시기에 자초지종을 설명 드렸으니 아마도 보관 중인 『국조오례의』 원본을 가져오셔서 보여주시는데 온통 한문에다가 인쇄상태도 좋지 않아 뭐가 뭔지를 몰랐습니다만 복사를 해주시는 걸 자꾸 보니 조금씩 보이는 듯했고, 그렇게 연구관님과 안면을 익히고 나니 나중에는 ‘여기 서울대로 오는 것보다 지금 사는 곳(경기도 안양시 평촌)에서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지금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이 가까우니 그쪽으로 가서 살펴보시라’고 안내해주셔서 이후부터는 장서각을 계속 드나드니 그곳에서도 수위 아저씨부터 많은 이들이 저를 알게 되었고 어느 날에는 머리가 하얀 노학자께서 오셔서 책을 보는 법, 자료 찾는 방법 등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6. 석전에 대한 애착이 굉장히 강하신 것같습니다. 그동안의 경험에서 생각하신 점들이 있으십니까?
석전대제이수자가 되어 지난 2009년 처음 지방에 교육을 갔을 때 ‘당신들이나 잘 하지, 뭘 교육하려고 왔느냐?’는 반응을 대하고 무척 당황스러웠습니다.
예전에는 지난 2004년부터 국가무형문화재 석전대제의 전수교육을 위하여 교육과학기술부장관의 허가를 받아 전수교육을 겸하는 4년제 학점은행제 교육기관인 ‘성균관 석전교육원’ 과정과 석전대제를 전공으로 하는 '전통연희과'가 있었고, 고1 때 사정상 자퇴를 했던 저는 거기에 입학하려고 환갑 때 고졸 검정고시를 합격해 학력을 인정받은 후에야 대학에 해당하는 석전교육원 과정에 지난 2006년 정식으로 입학해 140학점을 취득해 2009년에 졸업했습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지난 2018년부터 4년제 학점은행제 과정이 갑자기 없어졌고, 4년동안 고졸 140학점(타학위소지자 48학점, 전문학사소지자 80학점)을 취득해야 가능했던 전수교육이 지금은 1년제 전례사 과정(18~20과목 이수)으로 대폭 축소되며 전문성은 물론 정식학위로 인정조차 받지 못하게 되니 권위도 떨어지고, 지원자도 줄어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지금 (사)국가무형문화재 석전대제보존회 홈페이지(https://sukjeon.or.kr)의 ‘기관 소개’-‘정관’-‘제6장 성균관 석전교육원’을 보면 엄연히 학점은행제 교육기관으로 성균관 석전교육원을 설치·운영한다고 명시하고 있는데, 정작 정관대로 운영이 되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
지난 1986년 중요무형문화재 제85호로 석전대제가 지정되고, 1995년 강정희 선생님이 보유자로 최초 지정되었으나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자 다음 해인 1996년에 권오흥 선생님이 두 번째로 보유자로 지정되었지만 지난 2018년 석전보존회는 ‘문화재청에서 단체종목에서는 개인 보유자를 없애고 단체가 전승을 책임지게 하기로 했다’고 설명하며 석전대제이수자들의 찬반투표를 통해 보유자 없는 단체로 변경하고 보유자는 명예보유자로 지정 변경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조치가 이해되지 않아 문화재청에 직접 알아보니 ‘2013년, 2014년 종묘제례, 석전대제, 사직대제의 내부 문제로 대규모 합동성 의례의 보유자 인정에 대해 검토 한바는 있었지만 시행하지 않았고, 자신들이 그런 결정을 유도한 적도 없다’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이런 이상한 과정을 통해 개인 보유자가 없어지면서 권오흥 보유자도 명예보유자가 되고 전수조교(지금은 전승교육사)도 없어지면서 지금은 석전대제보존회라는 단체가 공동으로 교육 등을 해가는데, 저는 지금도 석전과 같은 국가적인 중요무형문화재는 개인 보유자와 분야별 전승교육사들이 있어야 높은 수준의 기량을 유지해갈 수 있다고 보고 있기에 원래 방식대로 책임감과 전문성을 함께 갖춘 개인 보유자를 재선정하고 그를 뒷받침하는 전승교육사를 두며 그들에게 다른 무형문화재처럼 전승지원금을 직접 지급해 책임지고 석전 제례, 의례의 보존 및 교육을 최선두에서 담당하게 해야 본래의 수준을 유지해갈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석전 교육을 마친 이들이 향교의 의전장의가 될 수 있도록 제도화하거나 전국 234개 향교에서 경남향교재단의 사례처럼 권역별로 교육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하여 지역과 석전교육원이 함께 발전하는 방향도 모색되어야 합니다. 교육을 열심히 받아도 정작 활용할 곳이 없고, 교육받은 게 오히려 ‘조금 안다고 잘난 척하냐?’ 등으로 냉소 받는 경우도 생긴다고 하니 이건 우리가 스스로를 깎아 내리는 잘못된 모습입니다.
조금 전에 언급한 정관 제6장에 ‘전수장학생 선정을 문화재청에 요청하는 부분’도 여러 차례에 제안했으나 특별한 이유 없이 계속 유야무야되고 있어 이 부분도 문화재청과 잘 협의하여 우리 석전보존회와 석전이수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조치가 되었으면 합니다.
성균관에 복식에 대한 자료가 남은 게 없어서 외부에서 교수님 등으로부터 과외를 받고 와서 2006년부터 권오흥 보유자님과 복식수업 등을 같이 하곤 했는데, 교육을 다니다 보면 ‘지난 번에 오셨던 이수자 선생님의 말과 지금 오신 선생님의 설명이 왜 다르냐?’는 질문들을 계속 받기도 했었습니다만 이런 점들도 석전보존회와 이수자들 모두 주의해야할 부분인 것같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는 석전관련 기록들이 어느 정도 있는 것같고, 해방 이후로도 성균관 내의 창고에 관련 기록들이 상당히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모든 게 사라져서 국가기록원 등에 보관된 조선총독부 자료나 당시 신문기사 정도를 제외하고는 확인할 기록들이 없습니다만 혹시라도 누가 성균관 내의 자료들을 무단반출한 것인지 등에 대해 아는 분이 있으면 그런 내용들도 모아서 추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제시대에는 총독이 주요 간부들을 데리고 참석했고, 지면신문들이 4~8면 정도였을 때인데도 1면 전부를 채워 보도할 정도로 주요 행사로 다뤄졌는데, 지금은 일반 언론에 거의 보도가 나가지 않을 정도로 존재감이 사라진 모습도 많이 아쉽습니다.
지난 2012년에 이정우 성균관 수복(守僕)이 세상을 떠나시고, 배우자인 김인겸 여사님이 시집온 이후 과정들을 지켜봤으므로 내용을 알겠지만 문서로 작성되어 보존된 부분이 없었기에 총무처의 제안에 따라 석전에 대한 내용들을 조사하여 보고서를 제출했고 그것이 지금도 석전 팜플렛 등에 활용되고 있습니다.
공적으로 사용되는 것이니 제가 작성한 부분이라는 것이 명기되지 않아도 좋게 이해하고 넘어가고 있으나 개인들이 석전에 대한 강의를 진행하면서 제가 조사하고 작성한 내용들을 출전으로 밝히지 않고 자신이 정리한 것처럼 하는 부분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나라도 선진국으로 되면서 지적재산권이 철저하게 보호되고 있으니 자료는 공유하되 출전은 반드시 밝혀 서로 동반상승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에 아무도 보는 사람도 없는데 김인겸 여사님이 막걸리 한 병과 명태 한 마리를 들고 은행나무 밑에 술을 붓고 절을 하는 모습을 우연히 봤는데, 성균관과 석전을 그냥 공간과 의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신앙으로 여기며 생활해왔고 일제, 해방, 한국전쟁 등 혼란한 시대를 지나는 과정에서 최소한 100년 이상 동안 굳건하게 지켜온 성균관 수복 집안과 김인겸 여사님에 대한 예우도 좀 더 나아졌으면 합니다.
사실은 석전의 무형문화재 지정도 너무 늦었고, 강정희 최초 이수자에 앞서 어려서부터 석전의 전 과정을 몸으로 익혀온 수복에 대한 인간문화재 지정 등도 먼저 추진되었어야 할 일이었습니다. 김인겸 여사님이 춘기석전을 앞두고 날이 추울 때는 제례주를 만드는 독을 겹겹이 이불로 감싸던 모습도 기억나고, 추기석전에 앞서 날이 더워서 술이 상할까 봐 온도를 낮추려고 식히려 애쓰던 장면도 떠오릅니다.
(유교신문은 지난해 2022년 5월 ‘수백 년 동안 문묘를 지켜온 수호자, 성균관 수복(守僕)을 아십니까?’(/coding/news.aspx/1/1/59672)와 ‘미움도, 원망도 없어요. 그리움만 남았을 뿐’(/coding/news.aspx/1/1/59753) 기사를 통해 성균관 수복의 역사적 유래와 현재까지의 상황, 수복 집안에 시집와 60년 넘게 성균관을 지켜온 김인겸 여사의 삶에 대해 상세히 보도했다)
7. 성균관대 일반대학원 의상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유림들은 보통 유학대학원으로 진학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렇게 하신 이유와 계기는 무엇이었습니까?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석전에 대한 관심이 석전 봉행시 사용되는 의복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의례에 관한 부분은 성균관에서도 어느 정도 알고 계신 분이 계셨으나 의복은 누구로부터도 도움을 받을 수 없었고, 유학대학에서 이런 부분들을 해결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나마 의상학과에는 전통의상을 전공한 교수님과 연구자들이 있기에 그분들과 함께 가능하겠다고 생각하여 2012년에 대학원을 입학했는데 당시 한 학기 선배가 25세였으니 40년 넘는 차이가 나는 '나이든 후배 학생'이었습니다.
복식사를 전공하는 동기도 없는 조건에서 프로젝터나 PC 프로그램 사용의 미숙으로 속상해서 혼자 울기도 많이 했습니다만 배움에 목 말랐던 때라 다음 해인 2013년까지 소논문 등을 쓰며 공부에 매진해 거의 논문을 정리했는데, 가장 큰 난관이 논문을 쓰기 전에 치르는 종합시험 중 영어시험이었습니다.
연구 분야를 성균관 석전대제 제례복식 착용실태 고찰로 정한 이유는 조선의 왕들은 ‘조종성헌존중주의(祖宗成憲尊重主義)’을 원칙으로 하여 유제(遺制)를 함부로 바꾸지 않아 제도는 그대로이나 의궤, 조선왕조실록, 유물 등에서 시대별로 변화를 볼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습니다.
누구도 전공이나 연구를 한 이들이 없었기에 처음부터 혼자 자료를 찾고, 일제가 남긴 기록들을 국가기록원이나 당시 발행된 신문 등에서 찾을 수 있어서 힘들었지만 이를 통해 중국에서 발생하여 우리나라에 들어온 이래의 변화상을 확인할 수 있었고, 우여곡절을 거쳐 지난 2019년 8월에 논문(「성균관 석전대제 제례복식 착용실태 고찰-1920~2019년 중심으로-」)이 심사를 통과해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보통의 석사학위 논문보다 더 많이 확보한 내용과 자료 때문에 조우현(趙又玄) 지도교수님은 곧바로 박사과정 진학을 권하셨으나 여러 가지를 감안하여 그렇게 하지는 못했으나 대신 이후로도 계속 자료를 수집하며 정리해 왔습니다.
석사논문 내용이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내용이라 출판사에서도 책을 내자고 했었으나 ‘이런 것은 성균관에서 발행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어서 응하지 않았고, 지금이라도 성균관에서 이런 책이 필요하다고 하면 그동안 보완한 부분들까지 포함해서 제대로 된 책을 내고 싶습니다.
8. 차, 다식(茶食), 폐백(幣帛), 조화(造花), 한복 및 제례복 등 다방면에 관심사를 가지고 계시고, 또 뭐든 잘하려고 애쓰시는 것같습니다. 이렇게 다방면에 몰두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차는 어릴 때 인연이 되었던 선생님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관심을 가졌고, 다식·폐백·바느질 같은 건 원래 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어려서부터 어머니가 하시는 걸 어깨 넘어 보면서 역시 관심을 가졌던 것같습니다.
뭔가에 한번 눈이 가기 시작하면 계속 파고드는 성격이라 관련 분야를 아는 분이라면 굳이 찾아가서도 물어보고 하며 차츰 더 나아졌던 것같고, 조화를 배울 때는 전화국에 근무하던 시절에 퇴근하면서 눈에 보인 가게에서 무급 조교 역할을 하며 일했습니다. 폐백을 한창 만들 때는 몇일 동안 잠도 자지 않고,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작품을 만들려고 애썼습니다.
어렵게만 느껴지는 우리 옷을 제대로 만들고 입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여러 번의 강의보다 더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기에 다른 것보다 더욱 신경을 썼는데, 한번은 경남향교재단에서 교육용 한복 제작을 요청해 평소 거래하는 기술자에게 맡겨서 배송시키는 와중에 너무 바빠서 미처 살펴볼 겨를이 없었는데 경남 창원에 강의하러 가서 배달된 옷들을 보니 제작된 수준이 평소와 달리 너무 형편 없어서 눈물이 날 정도로 창피해 겨우 참았습니다.
그래서 돌아오면서 재단 사무국장께 모두 반송해달라고 요청하고, 다른 기술자를 통해 새로 제작한 옷을 다시 보내서 뒷수습을 했는데 우리이기 때문에 그만큼 책임이 따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옷은 단순히 하나의 제품일 뿐만 아니라 그 지역에서 입게 되는 전통예복은 상징하는 의미도 크기에 대충 만들거나 대충 입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의례에서의 의관 정제는 그 기관의 정체성과 현재의 수준을 보여주는 지표이기에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데, 성균관에서 분향이나 알묘, 석전 등의 각종 의례를 봉행할 때 잘 모르거나 실수로 본래의 모습과 맞지 않는 형태로 착용한 모습을 보면 웃으면서 ‘선생님, 뭐하시는 것입니까?’라고 말씀을 드리며 교정을 봐드립니다.
관장님 등 어른들께서 외부 행사나 기념촬영 등에서 착용하는 의복도 자연스럽게 주목하며 살펴보는데, 이런 것은 의복을 아는 사람들의 눈에는 그 기관의 수준을 상징할 수도 있기에 소홀히 할 수가 없습니다.
이 과정에서 안에서는 제가 무례하다는 얘기를 들을 때도 있었는데 그건 개인적인 문제로 감내할 수 있으나 차라리 이렇게 해서라도 바깥에 나가서는 ‘성균관이 저 정도밖에 안 되냐?’는 소리는 듣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여러 가지를 두루 잘해보려고 애쓰는 건 매사 꼼꼼하고 뭐든 잘 하셨던 친정어머니가 하시는 걸 어릴 때부터 계속 보고 배웠던 것 같고, 성격도 좀 닮은 것 같습니다.
저희 7남매가 모두 뭐든 하나에 매달리면 끝을 볼 정도로 열심히 하는 편인데, 특히 여섯째 동생(김동귀(金東貴) 전 경상국립대 교수)은 외가 쪽의 손재주를 물려받아 경남 지방무형문화재 제29호 소목장, 목칠공예 분야의 장인으로 지정되었고 지난 2015년에 춘기석전을 앞두고 제가 주도해서 변(籩)과 두(豆)를 새로 제작할 때 여섯째 동생이 턱없이 적은 예산임에도 여러 어려움을 무릅쓰고 『소희주현석전의도(紹熙州縣釋奠儀圖)』 등의 문헌에 기록된 내용대로 두(豆)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2015년의 변(籩)과 두(豆) 제작에 관한 내용은 그해 6월 유교신문에 '변두(籩豆) 새롭게 제작해 춘기석전에 실찬 진설'(/coding/news.aspx/1/1/2556) 기사로 상세히 보도되었다)
9. 지난해 11월에 진행했던 성의순 전 성균관 부관장님 인터뷰 때도 똑같이 드렸던 질문이 있습니다. 이렇게 상당히 활동적이시면 시기나 질투, 미움 등을 받지 않으십니까?
어릴 때부터 기대했던 성균관의 이미지와 실제 모습과의 차이에서 오는 괴리 때문에 저도 마음속의 갈등이 많았고, 몇 번이나 여기에서의 활동을 그만두려고도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화가 나기도 하는 상황들이 있었으나 직접 부딪히고 싶지는 않아서 충돌하지는 않습니다만 아닌 건 아니라는 생각은 분명히 말을 하는 편입니다.
그런 후의 판단은 상대가 하는 것이고, 나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 비굴했던 적은 없으니 경우에 따라 다소 섭섭한 말이 귀에 들리긴 합니다만 살면서 어쩔 수 없는 부분들인 것같습니다. 세상살이가 내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석전, 의복, 의례에 대한 자료 정리도 누가 알아주건, 알아주지 않건 제가 할 수 있는 부분까지 하는 것이고, 그 이후에는 다음 분들이 해주시겠지요.
10. 앞으로의 삶은 어떻게 만들어 갈 계획이십니까? 그리고 어떤 할머니, 어른의 모습으로 남고 싶으십니까?
아들이 주는 용돈을 받지 않다가 3~4년 전부터는 받고 있습니다. 돈이 없어서 받는 게 아니라 주는 것도 정성인데 받아야지 싶었습니다. 아들은 군을 제대하고 대학에 복학한 후 저한테 말도 하지 않고 친구들과 창업을 해서 지금은 경기도 성남의 분당에 한국 사무실을 두고 중국 청도에 거주하며 회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새롭게 도전하며 수많은 좌절을 겪었을 텐데 젊음을 무기로 빈손으로 오늘에 이르러 항상 고맙고, 미안하고, 생각만 하면 가슴이 저립니다.
저희 7남매 중 6남매 아이들이 미국, 캐나다, 프랑스, 호주, 중국 등 해외에 거주하고 국제결혼도 많이 했습니다만 다들 열심히 살아가고 있고, 때때로 그들과 교류하며 많이 보고 배웁니다.
앞부분에서 언급했던 아인(亞人) 박종한(朴鐘漢, 1925-2012) 선생님이 제 인생에서 큰 나침반 역할을 하셨는데, 그 당시에 중·고등학교 교사들을 영입해서 ‘학급당 25명 국민학교’라는 전무후무한 실험도 하셨고, 진주 대아중·고등학교를 설립한 후 초창기이기도 했고 지역적으도 변두리라서 사고 치거나 정서적으로 불안한 문제 학생들이 많자 그들을 아침 일찍 교무실에 불러 차를 한 잔씩 주시면서 다도를 가르치셨습니다.
뭔가 기교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차를 우리고 물을 따르는 소리를 들으며 정화를 시켰는데, 지방 변두리의 별 볼일 없던 무명의 학교가 점점 변하기 시작해 서울대 등 명문대에 한 해 몇 십명씩이 합격하며 명문고로 변신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석전교육원에 들어가기 위해 고졸 검정고시를 치려고 성균관에서 의논을 드린 두 분 중의 한 분이 김정자(金貞姿) 제3-4대 성균관여성유도회중앙회장(재임기간 1984-1992년)이신데, 제가 공식적인 자리에서 반드시 한복을 입게 된 것도 당시 김정자 전 회장님이 한복을 깔끔하고 멋있게 입으시는 것을 보고 느껴서였고, 또한 명덕학당 교장으로 계시면서 저를 포함한 재학생들에게 밥을 참 많이 사주셨습니다.
당시는 전사청 옆의 수복청에서 명덕학당 공부를 했는데, 김정자 교장님이 전부에게 너무 자주 밥을 사시기에 저희가 한번은 사 드린다고 했더니 웃으시면서 ‘말도 안 되는 소리한다. 우리집 양반이 밥 사주라고 돈 주고 갔다. 우리 남편 돈이니 괜찮다. 많이 먹어라’라고 말씀하시며 그 후로도 계속 그렇게 하셨고, 더 연세가 드신 후에 부군을 먼저 보내시고 성북동의 자택에서 몸이 편찮아 한밤 중에 대학로의 서울대병원으로 이송되며 강남에 사는 자식들이 긴급히 모이는 상황을 겪은 후에는 다음에 또 편찮으시자 ‘애들이 내일 출근도 해야 되고, 바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다’라는 생각에 일부러 자녀들과 가까운 강남쪽 병원으로 이송을 가셨더군요.
이런 어른들을 보며 배우고 느낀 게 많았습니다.
아직도 남은 인생이 얼마나 더 될지 알 수는 없지만 가만히 있기보다는 뭐라도 해보려고 애쓰고, 담담한 얘기들 속에서 지혜를 전하는 그런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
11.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시면 얘기해주십시오.
제가 이렇게 여러 가지 이야기들, 특히 석전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해 왔던 부분들을 이 자리에서 털어놓은 것은 누군가를 탓하거나 비난하기 위함이 아니라 외부에서 그런 소리를 듣기 전에 우리 스스로가 지금의 모습을 되돌아보고 앞으로의 제대로 된 발전 방향을 잡아가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입니다.
성균관도 좋아지고, 석전도 제대로된 위상을 확립하며, 석전보존회와 석전이수자들도 존중받고 환영받는 위치에서 전국 유림과 국민들을 만날 수 있는 날을 꿈꿉니다.
과거 역사에서 중국은 공산화 과정과 문화대혁명이라는 격변기를 통해 유교전통문화의 상당수가 소실되며 석전도 원형을 잃어버렸는데, 우리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그 어려웠던 시간들을 보내면서도 유림 어른들이 목숨 걸고 소중하게 지켜오지 않았습니까? 그만큼 힘들게 보존해왔던 과정이고 내용이기에 지금처럼 매년 봄, 가을이면 통상적으로 치르는 의식으로 여기지 말고, 세계유교문화의 종주국이라는 자부심으로 엄격하게 관리해 나갔으면 합니다.
(사)석전대제보존회 이사, 성균관전례위원회 연구위원, 석전교육원 복식교수 등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하며, 앞으로도 성균관과 석전에 대한 짝사랑을 계속해 나갈 생각입니다.
‘54년의 역사를 가진 전국 유일의 유교권 정론지’ 유교신문의 발전을 기원 드립니다. 긴 시간 동안 인터뷰 진행하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