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귀 명예교수가 본인의 작품들을 배경으로 각종 질문에 대해 답변하고 있다.
김동귀 명예교수의 평소 생각을 가장 함축적으로 표현한 문장인 듯하다.
많은 이들에게 익숙한 나태주 시인의 '풀꽃' 내용이 액자에 적혀 있다.
서랍장의 무늬가 그은 줄이 아니라 검정색으로 염색한 얇은 나무라는 것이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지난 2015년에 제작해 성균관 석전에 사용되는 두(豆)도 전시되어 있다.
파손된 명륜당 은행나무 가지는 1년 3개월째 동재 옆에 보관되어 있다.
색동목 작품은 아주 얇게 잘라 염색한 나무들이 정교하게 결합되어 있다.
색동목 탁자의 무늬는 정교함을 더한다.
제기나 귀중품을 보관했던 밀양반닫이를 재현한 작품이다.
국내 유명 화장품 회사의 VIP 고객 선물용으로 제작된 색동목함이다.
국내 유명 화장품 회사의 고급브랜드 제품 홈페이지에 김동귀 명예교수의 제작 과정이 소개돼 있다.
최소 400년 이상의 수령(樹齡)으로 추정되며 지난 1962년 12월3일 천연기념물 제59호로 지정된 서울 문묘 성균관 명륜당 은행나무가 지난해 2022년 7월1일 낮 12시 40분경 서울 종로구청의 지지대 교체작업 중 작업인부들의 실수로 크게 파손된 후 작은 가지들은 즉시 치워졌으나 중앙에 위치해 있다가 부러진 큰 가지는 작업 인부들에 의해 커다란 토막으로 잘라져 명륜당 왼쪽의 동재(東齋) 쪽에 보관 중이다.
이미 1년 3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나 그것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방안이 정해지지 않은 채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안타까워하는 이들이 많았는데, 40년 이상의 기간 동안 목공예 전문가로 수많은 작품을 만들어 온 김동귀 경상국립대 명예교수의 고견(高見)을 듣고자 지난 10월6일 청주향교에서 진행된 ‘2023년 제1차 전국유림지도자 연수교육’이 끝나자마자 김 명예교수가 있는 경남 진주로 향했다.
1. 본인 소개와 목공예에 인생을 바치게 된 과정들에 대한 이야기를 부탁드립니다.
이름은 김동귀(金東貴)이고, 1953년 9월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진주교대 미술교육과를 졸업한 후 초등교사로 있다가 뒤늦게 1990년 부산 동아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해 ‘중요무형문화재 소목장(小木匠)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학위를 받고 졸업한 후 지난 2005년부터 지금은 경상국립대로 통합된 진주과기대 인테리어재료공학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2019년 8월말에 정년퇴임했습니다.
목공예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외가가 제법 큰 가구점을 하셔서 어릴 때부터 자주 놀러 다니며 토막으로 뭔가를 만들어 보곤 했으며, 기술자인 외삼촌들에게도 많이 배웠습니다.
그러다가 교대 미술교육과에 들어갔는데, 대부분 그림을 위주로 하는 분위기라 목공예를 배울만한 분이 드물어서 외가를 통해 수소문하여 각각의 전문가들을 찾아다녔습니다만 당시만 해도 목공예에 대한 이론이 제대로 정리된 것도 없었고 민간 기술자들도 ‘혹시 내 기술을 배워가서 일을 뺏어가는 게 아닐까?’ 싶어서 경계하고 아예 가르쳐주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강했습니다.
하지만 전체적인 영역을 제대로 하고 싶어서 젊음 하나만 믿고 움직이며, 숙련된 분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같이 막걸리도 마시고 작은 일부터 성심성의껏 도와드리니 점차 조금씩 기술을 가르쳐주셨습니다만 눈으로 대략 보고 돌아와서 혼자 해보면 그분들처럼 되지 않아서 속상했던 적도 수없이 많았습니다.
시간이 흘러 대학원에 진학하던 1990년부터 1999년까지 대한민국 미술대전 공예분야에서 10년 연속 수상했고, ‘하려면 제대로 해야겠다’ 싶어서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미술교사를 그만두고 대학 시간강사부터 단계를 밟았으며, 전국공예품경진대회 대상(1995년)·통상산업부장관상(1997년)·한국공예가협회상(2004년) 수상 등을 하며 대학교에 초빙을 받아 재직했습니다.
2. 성균관과도 인연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내용인지요?
대학교수로 재직하던 지난 2015년 서울에 계신 누님(김숙자 석전보존회 이사)께서 ‘성균관 대성전에서 매년 봄과 가을에 봉행하는 석전대제에 사용되는 변(籩)과 두(豆)에 대한 문헌기록을 찾았고, 여기에 근거에 복원하려고 하는데 도와달라’고 하셔서 흔쾌히 도와드리겠다고 했습니다.
성균관 내부에서 진행된 과정은 자세하게 알지 못하고 지금은 어느 분인지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성균관 관계자 한 분과 계속 연락을 주고받으며 변(籩)과 두(豆)를 복원하는 작업을 시작했는데, 변(籩)은 대나무로 만들어야 하니 주산지인 전남 담양의 명인(名人)을 통해 진행됐고 두(豆)는 나무로 만들어야 하니 제가 처음부터 끝까지 규격에 맞는 각종 도구와 장비를 제작해서 만들었습니다.
제작이 끝난 뒤에는 직접 가지고 성균관으로 올라가서 그곳 관계자에게 처음 옻칠을 했을 때와 시간이 지난 후 색깔이 변할 수 있다는 점 등을 설명했고, 말로만 듣던 대성전 등의 공간을 직접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다만 조금 안타까웠던 점은 조선시대에 가장 엄숙하고 위엄있는 공간이었으니 국가적인 차원에서도 상당할 정도로 관리가 되었을 텐데 일제강점기와 우리 역사의 어려운 시기를 지나면서 다소 관리가 소홀해져서인지 바닥이 고르게 평평하지 못하거나 기둥의 색칠 등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점 등이 눈에 보여 국가문화재로서의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서 좀 더 노력이 더해져야 할 것 같았습니다.
목공예 일을 하다 보니 좋은 원목을 구하기 위해 일본을 자주 가게 되는데, 일본은 오래된 건물을 보수하거나 관리할 때 작은 나무 하나를 교체하기 위해 전국을 꼼꼼하게 흩을 정도로 찾아서 원래의 모습 그대로를 지향하며 문화재에 대한 전문기술을 가진 이들도 꽤 많이 보유하고 있으면서 후세대도 양성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각종 문화재를 살펴볼 일들이 그동안 많았는데, 성균관뿐만 아니라 다른 문화재들도 일본에 비해 정성과 신경을 덜 쓰는 듯한 모습을 볼 때가 많아서 안타깝습니다.
3. 2015년 이후로는 성균관의 두(豆)를 추가 제작하는 등의 과정은 없었습니까?
가정에서 사용하는 제기도 시간이 흘러서 다소의 흠집이 생기고 색깔이 좀 변하더라도 계속 사용하듯 석전에 사용하는 제기도 처음 모습과 조금 달라지는 점이 있어도 이어서 사용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이후의 관리는 당연히 성균관에서 맡아서 할 것이고, ‘1~2개 정도를 추가로 만들 수 있느냐?’는 문의가 있긴 했습니다만 작업의 특성상 정밀하고 치밀하게 계산된 치수를 적용한 날, 베어링 등의 각종 도구를 사용해 이미 사용 중인 제기와 거의 오차가 없는 수준으로 만들어야 하기에 상당한 인력과 비용이 소요될 수밖에 없습니다.
2015년 당시에는 누님의 부탁도 있고 해서 턱없이 모자라는 비용만 받고 심혈을 기울여 제작했습니다만 지금도 그때처럼 열악한 조건에서 봉사하는 자세로 해달라고 동료나 관련 업계 전문가들에게 부탁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또한 각종 도구와 시스템을 갖춰야 하니 최소한 몇십 또는 100개 이상의 물량이 확보된 후라야 추가 작업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장인(匠人)이 사라지고 있다고 하는데, 이곳 목공예 분야도 작은 원목 하나에 1억원 이상 또는 수천만원씩의 비용이 들고 5~10년을 건조시켜야 하므로 사람이든, 자금이든 투입되는 것은 많은데 지난 1980~1990년대 이후로는 전체적으로 수요도 많이 줄어서 수입은 쉽게 나오지 않으니 이미 하고 있던 이들은 계속하지만 젊은이들이 새롭게 시작하기는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지진의 발생빈도가 잦은 일본은 그 영향으로 아직도 아파트가 생각만큼 많지 않고 단독주택이 상당하다보니 목공예 제품에 대한 수요도 높습니다만 한국은 어디서나 고층 아파트만 늘어나고 붙박이장이 일반화되다 보니 목공예 제품에 대한 수요가 점점 줄어들고, 하나의 기술을 체득하는데 무수한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야함에도 돈벌이가 쉽지 않으니 후세대가 배우려 하지 않아서 이대로 가면 아무리 문헌으로 고증이 되어도 앞으로는 전통문화의 소중한 자산들을 제대로 만들어 가기는 더더욱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4. 지난해 7월에 400년 이상의 수령을 가진 성균관 은행나무가 관리 측의 실수로 큰 가지가 파손되는 사고가 있었고, 지금 1년이 넘었음에도 여전히 성균관 내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유사한 사례로 지난 2019년 6월18일 진주성 호국사 앞에 위치한 600년 수령의 느티나무가 죽어서 이 지역에서 크게 문제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말이 쉬워서 600년이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대충 잡아서 1419년부터 시작한다고 하더라도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 한산도대첩, 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大捷)’으로 불리는 진주성대첩에서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 1554-1592) 장군을 비롯한 관민(官民)이 일치단결해 왜군을 물리쳤다가 다음 해인 1593년 6월에 7만 명의 왜군이 다시 쳐들어와서 9일간의 전투 끝에 결국 성이 함락되고 그 안에 있던 모든 생명체가 왜군에게 도륙(屠戮, 마구 죽임)된 아픈 역사를 비롯해 지난 시기 이 땅에 존재했던 희로애락(喜怒哀樂)을 지역민들과 함께 했던 나무였습니다.
그때 진주시의 의뢰를 받고 생각을 해보니 ‘이렇게 역사와 전통을 가진 나무를 그냥 썩혀 버릴 수는 없겠다’ 싶어서 몇 날 몇 일을 고민한 끝에 ‘진주 반닫이’와 선비문화를 대표하는 ‘경상’, 충절을 상징하는 논개의 정신을 되새길 수 있는 여인의 가구인 ‘좌경대’로 만들어 진주를 대표하는 상징물로 만들었고, 그 이후 경남 진주시 판문동에 위치한 진양호 우드랜드 2층 전시실에서 방문객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성균관 은행나무도 단순히 오래된 나무만이 아니라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으로 임금과 왕세자, 영의정을 비롯한 주요 정승 및 퇴계 이황 선생, 율곡 이이 선생 등 누구나 알만한 대표적인 인물들과 함께 했고 격동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으니 그런 역사적인 면을 담아서 활용했으면 합니다.
이런 경우의 나무는 한번 훼손되면 다시 원래 상태로 만들 수도 없으므로 먼저 어느 곳에서, 어떤 용도로 사용하도록 할 것인지에 대해 논의하고, 오랜 경험을 가진 전문적인 곳에 맡겨 신중하게 작업하며, 완성된 후에도 보존할 수 있는 방향으로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어디까지나 그런 모든 과정은 현재의 소유자인 성균관에서 정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전문가의 입장에서 보자면 의뢰인이 원하는 용도라고 하더라도 그 용도에 맞는 나무라야 딱 맞는 점들이 있으니 만약 대성전이나 명륜당 등에서 사용되는 물품을 만든다면 은행나무로 제작해도 문제 되는 부분은 없는지도 정확하게 확인해 봐야할 것입니다. 내구성이 약하여 조금 시간이 흐른 후에 사용이 힘들거나 옛날부터 내려온 관념에 어긋나서 나중에 설치된 곳에서 이동시켜야 하는 경우도 발생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5. 이렇게 훌륭한 작품들은 이후에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너무 큰 정성이 들어가서 쉽게 하진 못하실 것같아서 여쭙니다.
지금도 진주 시내의 나무 보관소와 경남 산청의 작업실을 오가며 새로운 작품을 만들고 있습니다만 여기 있는 작품들이 제 지난 삶의 최고작으로 각종 수상작들도 많습니다.
체력 등을 고려할 때 앞으로 5~10년 정도 더 일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이제는 인생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이것들을 어떻게 할까를 계속 고민하고 있는데, 보존과 관리 등을 제대로 잘할 박물관이나 지자체가 있으면 전부 기증할 생각도 가지고 있습니다.
가격으로 환산하면 1점당 상당할 정도가 됩니다만 좋은 예술품은 더 많은 이들이 보며 그 속에서 삶의 의미를 깨닫고, 아름다움을 느끼며, 앞으로의 시간을 행복하게 만들어 가는 바탕이 된다면 그보다 더 의미 깊은 쓰임은 없는 것 같습니다.
제가 일생을 보내온 진주시와 우선적으로 관련 논의를 진행하고 있는데, 이 정도의 작품들을 제대로 전시하고 보관하려면 최소 몇 백평의 건물이 필요하고 건축비도 개인이 부담할 수 없는 수준이라 어차피 제 능력으로는 건물을 지을 수 없으므로 지자체 등을 통해 공공의 자산으로 돌리려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목공예에 대한 전시장이 제대로 만들어진 곳이 없기에 앞으로 여기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동료나 후배 작가들에게도 선례를 남기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이전 일정을 마치고 이동 후 오후 늦게 진주에 도착해 궁금한 몇 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을 들었으나 김동귀 명예교수는 질문마다 본인의 경험 속에서 우러나온 이야기들을 전했다.
마침 오는 10월13일까지 열리는 ‘목(木) 가구전’의 전시장도 둘러볼 수 있었는데, 40년을 넘어 50년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기간 동안 오로지 목공예에 매진해 온 장인의 숨결과 노력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아주 얇은 나무에 색을 입힌 후 마치 포개듯이 합쳐서 물결 무늬 등 곡선으로 표현한 색동목 작품인 색동목탁자와 색동목의자, 지난 2018년 국내 유명 화장품회사의 VIP 고객 선물용으로 50개 한정 제작된 색동목함은 마치 플라스틱에 코팅지를 입힌 듯한 눈의 착각을 뒤로 한 채 ‘나무로 어떻게 이렇게 만들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계속하게 했다.
모든 인생을 바쳐 절정의 경지에 오른 그의 전문적 지식과 기술이 성균관과 유림들에게 좀 더 제대로 사용되는 기회가 마련되었으면 하는 희망을 품은 채 발걸음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