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종단

석전(釋奠) 음복주를 만드는 쌀의 수량까지 국가가 정했다

두달 후인 9월10일(화)에 '공기 2575년 추기석전'이 봉행된다. 한국고전번역원이 운영하는 '한국고전종합DB' 홈페이지에서 석전 등에 관한 내용을 검색할 수 있다. 『세종실록』 「오례(五禮)」 '제기도설(祭器圖說)'에 석전에서 사용되는 변(籩) 그림이 있다. 『세종실록』 「오례(五禮)」 '제기도설(祭器圖說)'에 석전에서 사용되는 두(豆) 그

오흥녕 2024. 7. 6.

 

 

두달 후인 9월10일(화)에 '공기 2575년 추기석전'이 봉행된다.

 


 

 

한국고전번역원이 운영하는 '한국고전종합DB' 홈페이지에서 석전 등에 관한 내용을 검색할 수 있다.

 


 

 

 

 

 

『세종실록』 「오례(五禮)」 '제기도설(祭器圖說)'에 석전에서 사용되는 변(籩) 그림이 있다.

 

 

 


 

 

『세종실록』 「오례(五禮)」 '제기도설(祭器圖說)'에 석전에서 사용되는 두(豆) 그림이 있다.

 


 

 

 

정조 때 편찬된 『전율통보』 예전(禮典)에 석전 관련 내용이 다수 수록되어 있다. 

 

 

 

 

석전 일무에서 추는 문무(오른쪽) 및 무무(왼쪽) 도구이다.

 


 

 

 

 

『세종실록』 「오례」 길례의식(吉禮儀式)에 4가지 종류의 석전 유형마다의 절차를 각각 규정하고 있다.

 


 

오는 9월10일(음력 8월8일 정축(丁丑))로 다가온 ‘공기 2575년 추기석전(秋期釋奠)’을 앞두고 유교가 국가의 통치이념이자 사회의 지배원리로 작용했던 조선왕조의 기초 사료인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를 비롯한 각종 문헌에서 당시의 석전(釋奠), 음복주(飮福酒), 음복례(飮福禮)에 관한 기록을 살폈다.

 

한국고전번역원(원장 김언종)이 운영하는 한국고전종합DB(https://db.itkc.or.kr) 홈페이지 검색창에서 해당 주제어의 한자를 입력한 후 살펴보면 석전은 2015건, 음복주는 17건, 음복례는 171건의 내용이 검색되는데, 물론 여기에는 서울 문묘 성균관에서의 석전에 대한 내용만 아니라 궁궐, 종묘, 사직단 등 조선왕조에서 중요하게 여긴 시설물과 관련된 부분들도 많으므로 각 내용이 어느 영역에 속했는지를 분류해서 검토했다.

 

다른 자료들까지 폭넓게 확인한 것이 아니므로 한계가 있겠으나 석전을 대하는 국왕과 조정 신료들, 때로는 중국에서 조선을 찾아온 사신들의 입장까지 확인할 수 있는 귀한 자료들임은 분명하다.

 

1. 국왕이 제향을 주관한 조선왕조의 석전

 

1392년 7월17일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開京, 지금의 북한 개성)에서 조선의 첫 번째 국왕으로 등극한 태조 이성계(李成桂, 재위 1392-1398)는 그해 8월8일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 태학사(大學士) 민제(閔霽, 이방원의 장인)에게 명하여 문묘에 석전을 지내게 했는데, 이것이 조선왕조 최초의 석전 봉행 기록이다.

 

건국에 큰 공로를 세우고도 권력에서 밀려났으나 두 차례의 ‘왕자의 난’(제1차 ‘무인정사(戊寅定社)’-1398년 8월 26일-27일에 태조 이성계의 5남 이방원(李芳遠, 후의 태종)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 이복동생이자 세자인 이방석과 실권자 정도전 일파를 제거한 사건, 제2차 ‘박포의 난’-1400년 1월에 태조 이성계의 4남 이방간과 박포 등의 세력이 이방원을 공격하다가 오히려 패배한 사건)을 통해 실권을 장악한 후 제3대 국왕으로 즉위한 태종(재위 1400-1418)의 위엄이 한창이던 1402년 10월12일, 중국 명나라의 도찰원 첨도어사(都察院僉都御史) 유사길(兪士吉), 홍려시 소경(鴻臚寺少卿) 왕태(汪泰), 내사(內史) 온전(溫全)·양영(楊寧)이 제3대 황제 영락제(永樂帝, 재위 1402-1424)가 그해 6월17일에 즉위했음을 알리는 조서를 가지고 대궐에 이르렀다.

 

3일 뒤인 10월15일 서울 문묘 성균관을 방문해 배알(拜謁, 높은 어른을 찾아가 뵘)한 이들은 제향을 어떻게 하는지와 주관하는 이를 물었는데 이에 대해 관반(館伴, 외국 사신을 접대하기 위해 임시로 파견된 관리)은 ‘봄·가을의 석전과 초하루·보름의 제향이 있고, 국왕이 주관한다(有春秋釋奠及朔望祭 國王主之)’고 답했다.(『태종실록』 태종 2년 10월15일)

 

즉위한 후 빠르게 국가의 각종 체계를 갖춰간 태종은 1411년 4월27일 석전에 관한 의식을 상정(詳定, 나라의 제도 등을 심사하고 결정하여 오랫동안 변경하지 못하게 하던 일)하도록 했는데, 계기는 예조 참의(禮曹參議) 허조(許稠, 1369-1439)가 ‘예전에 명나라에 조회하러 가서 공자의 출생지인 곡부(曲阜)를 지나다가 석전 의식을 봤는데, 지금 나라에서 사용하는 의식과 같은 부분도 있고 다른 부분도 있으니 고증을 더해야 한다’는 청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413년 4월13일 올린 글에서 예조가 ‘이전 왕조였던 고려에서는 사직(社稷)·종묘(宗廟)·별묘(別廟, 왕실에서 종묘에 들어갈 수 없는 사친(私親)의 신주를 모시던 사당으로 시작해 중간의 변화를 거쳐 조선시대에는 영녕전(永寧殿)으로 부름)에 대한 제사를 대사(大祀, 국가의 정사(正祀) 중 가장 높은 등급의 제사)로, 선농(先農)·선잠(先蠶)·문선왕(文宣王, 공자)에 대한 제사를 중사(中祀, 국가의 정사(正祀) 중 중간 등급의 제사)로, 기타 다른 제사들과 함께 주·현(州縣)에서 문선왕에게 지내는 제사를 소사(小祀)로 정했으나 중국 송나라의 제도에서 주·현에서 지내는 석전을 중사로 했으니 그렇게 변경하자’고 아뢰자 태종은 그대로 따랐다.

 

1417년 2월10일 세자의 신분으로 문선왕의 석전제를 행했던 세종대왕(世宗, 재위 1418-1450)은 1418년 8월11일 아버지 태종으로부터 양위 받아 국왕으로 등극한 후 다음 해 춘기석전을 석 달 가량 앞둔 11월21일 예조판서 허조와의 대화에서 ‘신하들로부터 하례 받을 때 입던 강사포(絳紗袍) 대신 곤룡포(袞龍袍, 집무할 때 입던 정복)를 입고 면류관(冕旒冠, 정복을 갖췄을 때 머리에 쓰는 관으로, 앞뒤로 구슬을 실에 매달아 늘임)을 쓰고 석전에 가겠다’는 뜻을 천명했는데, 정조 때 편찬된 『전율통보』에 의하면 예전(禮典) 제3조 제례(祭禮) 제1항에 ‘국가에서 지내는 제사는 의례를 주관하는 예조에서 예정된 날짜보다 3개월 전에 국왕에게 미리 아뢰고, 서울과 지방의 관공서에 공문을 보낸다’라고 하며 처벌조항까지 명시되어 있을 정도로 중요한 내용이었으므로 이런 절차들을 지키는 가운데 국왕으로서의 존엄성을 과시하고자 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처음으로 국왕이 석전제에 향축(香祝, 향과 축문)을 전하는 기록인 1421년 8월6일 기사, 국왕이 석전에 가서 문묘에 참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유생에 대한 시험과 강론을 할 수 있는지를 검토할 것을 지시하는 1429년 4월12일 기사, 석전에 사용되는 소와 돼지의 마리 수를 논의하는 1430년 9월16일 기사 등 다수의 기사에서 석전의 각종 규정을 확립하는 데 관심을 기울인 세종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데, 명나라 제6대 황제 정통제(正統帝, 재위 1435-1449)의 즉위 사실을 알리기 위해 조선에 온 사신들이 성균관을 방문한 1435년 3월23일 이들을 맞이한 가대사성(假大司成) 정인지 등은 ‘봄·가을 상정일에 석전을 봉행하는데, 국왕이 친히 하거나 관원을 보내서 한다’고 밝히고 있다.

 

세종의 이러한 노력들은 그의 아들인 문종(文宗, 재위 1450-1452)과 손자인 단종(端宗, 재위 1452-1455) 대에 걸쳐 편찬된 『세종실록』의 뒷부분에 「오례(五禮)」 「아악보(雅樂譜)」 등의 형태로 더욱 확실하게 정리되었는데, 길례(吉禮)·가례(嘉禮)·빈례(賓禮)·군례(軍禮)·흉례(凶禮) 등 다섯 가지 분야에 관한 예식의주(禮式儀注)를 담은 「오례」는 성종(成宗, 재위 1470-1494) 대에 완성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 중에서 첫 번째 부분인 ‘길례’-‘변사(辨祀)’-‘소사(小祀)’에 ‘무릇 제사의 예는 하늘의 신에게 하는 것은 사(祀)라 하고, 땅의 신에게 하는 것은 제(祭)라 하며, 사람과 귀신에게 하는 것은 향(享)이라 하고, 문선왕에게 하는 것은 석전(釋奠)이라 한다(凡祭祀之禮 天神曰祀 地祇曰祭 人鬼曰享 文宣王曰釋奠)’고 정리했으며, ‘시일(時日)’에서는 ‘중춘·중추의 상정일에 문선왕에게 석전하고, 초하루·보름에 문선왕에게 전을 드리는데 만약 (삭망 분향이) 석전을 만나게 되면 석전만을 행한다(仲春仲秋上丁釋奠文宣王 朔望奠文宣王 若値釋奠 只行釋奠)’고 명시하며, ‘신위(神位)’에서는 석전의 신위 배치에 대한 내용, ‘축판(祝版)’에서는 문성왕 축판에 기재되는 글 내용, ‘제기도설(祭器圖說)’에서는 석전에 사용되는 변(籩)·두(豆)·보(簠)·궤(簋)·작(爵) 등 각종 기물의 원의 지름·높이·깊이·소재·색깔·모양·특징 등의 내용, ‘찬실도(饌實圖)’에서는 서울 문묘와 주·현의 문성왕 찬실도가 차이 있음을 전하는 내용, ‘악현도(樂懸圖)’에서는 종묘·풍운뢰우(風雲雷雨)·선농·선잠·우사(雩祀)·문선왕이 헌가(軒架, 궁중의 의식음악과 제례음악 연주시 당 아래에 위치하는 악대)·등가(登歌, 궁중의 의식음악과 제례음악 연주시 당 위에 위치하는 악대)·무(舞)를 같이 한다는 내용, ‘헌관(獻官)’에서는 석전 봉행시 집사관 명칭과 인원의 내용, ‘관면도(冠冕圖)’에서는 국왕·왕세자·문관 및 무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착용하는 물품의 명칭과 그림의 내용 등이 세밀하게 정리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등 관찬기록에서 무수하게 보이는 석전에 대한 논의는 임진왜란·병자호란 등 외침과 내부의 변동 등으로 인해 조선 후기에 이르러 상당한 모습의 변형으로 나타내게 되는데, 예를 들어 조선 후기 문신으로 예조판서 등을 지낸 구윤명(具允明, 1711-1797)이 각종 법률서와 법령을 통합하기 위하여 개인적으로 편찬했다가 소문을 들은 정조(正祖, 재위 1776-1800)가 친히 읽어보고 국가의 보조를 받게 하여 1786년(정조 10) 편찬된 『전율통보(典律通補)』 제3권 예전(禮典) 제3조 제례(祭禮)에서는 제3항에서 ‘문선왕에 대한 제사는 봄·가을의 중월(음력 2월과 8월) 첫 번째 정일에 지낸다. 종향도 함께 제사 지낸다(春秋仲月上丁 從享竝祭)’, 제15항에서 ‘대사(大祀) 및 풍운뇌우(風雲雷雨), 선농, 선잠, 우사(雩祀), 문묘에 지내는 제사는 (임금이) 친히 향축을 전한다’고 하는 등 이전과 비슷한 모습뿐만 아니라 제26항의 ‘사직, 대보단(大報壇), 풍운뇌우, 선농, 선잠, 우사, 문선왕에 지내는 제사에는 아악(雅樂)을 쓰고 종묘, 영녕전, 경모궁, 둑소(纛所, 군대 원수(元帥)의 큰 깃발이 있는 곳)에 지내는 제사에는 속악(俗樂)을 쓴다’는 내용 등에서는 차이가 발생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왕의 실록에서는 전혀 볼 수 없고, 오로지 『세종실록』에만 실려 있는 「아악보(雅樂譜)」에는 문선왕석전악장(文宣王釋奠樂章) 등의 목록도 보이고 있고,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운영하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s://encykorea.aks.ac.kr)에서 ‘아악’을 검색하면 ‘문묘제례악(文廟祭禮樂)이 현존하는 유일한 아악’임을 안내하고 있는데 조선 건국 직후인 1392년 7월28일 설치된 아악서(雅樂署)가 전악서(典樂署)와 함께 설치되어 연주하는 악공(樂工)들을 담당하다가 1457년 10월13일 세조(世祖, 재위 1455-1468)의 명에 의해 아악서를 전악서(典樂署)에 합하고 1460년 4월에 만들어진 장악서(掌樂署)가 장악원(掌樂院)으로 바뀌는 과정 등이 『조선왕조실록』과 『국조보감』 등에 다수 기록되어 있다.

 

2. 음복주 제조용 쌀의 수량까지 제도로 정할 정도로 엄격했던 석전 봉행 절차

 

 

석전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세세하게 정했던 규정들은 심지어 봉행할 때 사용되는 음복주와 봉행 후 이뤄지는 음복례에 대해서까지 범위가 확대됐다.

 

『세종실록』의 세종 10년(1428) 4월23일 기사에 의하면, 예조에서 성균관의 첩정(牒呈, 서면 보고서)에 의거하여 ‘석전제의 음복주를 빚을 쌀이 1석(石, 섬)뿐이라 태반이 부족하니 4석을 더 주게 하자’는 제안에 대해 국왕 세종은 ‘문신과 유생으로 음복하는 자가 꽤 많을 것이니 6석을 더 주게 하라’고 하여 총 7석을 지급하도록 했다.

 

세종의 둘째 아들이었던 세조는 1460년 8월12일에 상정소(詳定所)에서 호조(戶曹)의 관문(關文, 동등한 관부 상호 간이나 상급 관부에서 하급 관부로 보내던 공문서)에 의거하여 ‘문선왕 석전제의 음복주에 쓸 쌀이 5석(石) 5두(斗, 한 되의 열 배인 말로 표현하며 약 18리터에 해당함)이나 지금부터는 7석으로 하도록 법식(法式)으로 정하자’는 의견을 제시하자 그대로 따랐다.

 

이후의 기록들에서는 더 이상 음복주 제조에 사용되는 쌀의 수량에 대한 언급이 확인되지 않으므로 단언할 수는 없으나 조선시대 석전에 소요되는 각종 물품을 준비했던 봉상시(奉常寺, 제사(祭祀)와 시호(諡號)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가 건국 직후인 1392년 7월28일 설치된 후 몇 번의 명칭 변경을 거쳐 『승정원일기』 1908년(순종 2) 7월30일 기사에서도 마지막 명칭이었던 봉상사(奉常司)의 존재가 보이는 등으로 볼 때 조선왕조가 거의 멸망하는 단계에까지도 지속적으로 지급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3. 예의와 법도를 지킬 것이 요구되었던 음복례

 

제례를 봉행한 뒤에 참여했던 이들이 술과 제물들을 나눠 먹는 의식을 뜻하는 음복례(飮福禮)는 지금도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익숙한 절차이지만 유교 의식과 절차가 엄격했던 조선시대에는 그 의미가 많이 달랐다.

 

단순하게 먹고 마시면서 친밀도를 높이는 자리가 아니라 특히 국가에서 시행하는 제례에서는 하나의 절차였는데, 『세종실록』 「오례」 길례의식(吉禮儀式)의 항목에 ‘시학작헌 문선왕(視學酌獻文宣王)’ ‘왕세자 석전 문선왕(王世子釋奠文宣王)’ ‘유사 석전 문선왕(有司釋奠文宣王)’ ‘주현 석전 문선왕(州縣釋奠文宣王)’ 등 네 가지 유형으로 기록된 석전에서 왕세자가 서울 문묘 성균관에 행차하여 봉행하는 과정을 설명한 ‘왕세자 석전 문선왕’의 경우는 ‘행례(行禮)’ 부분에 ‘헌가에서 동안지악을 연주하는 사이에 인진사가 왕세자를 인도하여 음복위(飮福位)로 나아가 서향해 서게 하면 악이 그치고, 대축이 작을 받들어 북향하고 꿇어앉아서 올리면 인진사가 꿇어앉아 홀을 꽂도록 찬청한 후 (왕세자가) 작을 받아서 마시고 나면 대축이 빈 작을 받아서 점에 도로 놓는다. 대축이 조를 받들고 북향하여 꿇어앉아서 올리면 인진사가 조를 받으라고 찬청하며 집사자에게 주고 집사자가 조를 받아 동계로 내려와 문을 나가 사옹(司饔)에게 준다’는 등의 음복례 과정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국왕이 직접 서울 문묘 성균관에 행차하여 봉행하는 과정을 설명한 ‘시학작헌 문선왕’에는 ‘작헌(酌獻)’ 등은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으나 음복례는 보이지 않는데, 이것은 아마도 국왕이 직접 석전을 친히 주제(主祭)한 경우가 흔치 않았고 국왕이 석전을 직접 주제할 때는 유생들을 상대로 과거시험을 치르는 과정이 더욱 중시되었으므로 그랬던 것같다.

 

고위 관리가 국왕의 명을 받들어 서울 문묘 성균관에 나아가 봉행하는 과정을 설명한 ‘유사 석전 문선왕’과 지방의 주현(州縣)에서 각 지역에 소재한 문묘인 향교에 나아가 봉행하는 과정을 설명한 ‘주현 석전 문선왕’에서는 모두 음복례의 과정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국왕을 제외한 나머지 인원이 석전을 봉행할 때는 반드시 음복례를 진행했다.

 

이렇게 의식 속의 한 과정으로의 음복례와 별도로 석전을 지낸 후에 조정의 고위 관리들을 성균관으로 초청해서 술과 제물을 대접하는 과정이 존재했는데, 시대에 따라 모양과 방법은 조금씩 달랐다.

 

먼저 1513년(중종 8) 8월1일에 예조에서,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영의정 성희안(成希顔, 1461-1513)의 초상 중에 봉행하는 석전제와 관련하여 ‘수상의 초상에 음복은 미안한 일이니 의정부와 육조는 참여하지 말게 하고 제관만 음복하게 함이 어떠하겠습니까?’라고 아뢰었으나 (국왕의 비서실이었던) 승정원은 ‘인정으로 볼 때는 옳으나 석전제의 음복은 연음(宴飮, 잔치 자리에서 술 마심)의 예가 아니라 신(神)의 은혜를 중히 여기는 것이니 권폐(權廢, 임시로 정지함)할 수 없다. 그 예를 한 번 변동하게 되면 곧 관례가 되니 예를 변동하는 일은 가볍지 않다’라며 반대하자 국왕 중종은 고위 관료들에게 상의하도록 했다.

 

다음 날인 8월2일에 조정에서는 다시 이 일에 대한 논의가 전개되었는데, 영사(領事) 정광필(鄭光弼, 1462-1538)의 ‘종묘와 사직을 제사함에는 정부·육조의 음복례가 없는데 유독 석전에만 있는 것은 본조에서 사문(斯文, 유교)을 중시하는 별례(別禮, 특별한 예법)인 것으로 생각된다’고 발언한 것으로 볼 때 석전 후의 음복례를 통해 고위 관료들이 서울 문묘 성균관을 방문하여 그곳에 있는 관리 및 유생들과 친분을 넓히고, 대화의 시간을 가지도록 특별히 배려한 것으로 보인다.

 

음복의 과정은 당연히 제례주(祭禮酒) 혹은 음복주(飮福酒)라고 불리는 술(酒)을 동반하게 되고 이를 과음하여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는데, 『성종실록』에 기록된 1476년(성종 7) 4월7일 기사에 의하면 대사헌 윤계겸(尹繼謙) 등이 그해 2월 봄 석전제의 음복 때 성균관의 종 녹금(祿今)에게 노래를 부르게 하고 손을 잡으며 희롱한 우참찬(右參贊) 어유소(魚有沼, 1434-1489)를 의금부에서 심문하게 하도록 청하자 국왕 성종은 일단 허락했고, 이후의 과정에서 녹금이 대궐에서 한때 일했던 궁녀라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되는 상대였고, 이후로도 어유소가 함부로 녹금의 집을 들락거린 사실 등이 밝혀지며 처벌을 요구하는 조정 관료들의 목소리가 커지는 등 점점 사태가 심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1467년 발생한 이시애(李施愛)의 난 등에서 큰 공을 세우는 등 실력있는 무인으로 국왕들의 인정을 받았던 어유소는 ‘내가 변방에 오래 있었으니 무슨 지식이 있겠고, 또 그 계집이 일찍이 궁인이 된 것을 어찌 알았겠는가? 술을 너무 많이 마셔 나도 모르게 실수를 하였으니 비록 뉘우칠지라도 미칠 수 있겠는가? 내가 차라리 베개에 엎드려 죽는 것이 낫겠다’는 등의 말로 상황을 모면하려 했고, 그를 아낀 국왕 성종도 대간들의 탄핵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오히려 조정의 중대사를 여러 고위관료들과 의논하게 하고, 다음 해인 1477년에는 병조판서로 임명하며 끝없는 신뢰를 다시 한번 표현했다.

 

반면에 조선 중기의 문신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의 부친인 이몽량(李夢亮, 1499-1564)에 대한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지은 최립(崔岦, 1539-1612)은 자신의 문집인 『간이집(簡易集)』 에 실린 신도비명 내용에 ‘내가 태학(太學)에서 벼슬을 하고 있을 때 공이 석전의 초헌관으로 임명되어 의식을 집행한 적이 있었다. 이윽고 제례를 다 마친 뒤에 명륜당에서 음복을 행하였는데, 당시에 정부의 백관들이 일 때문에 오지 못하고 오직 향관(享官)들만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도 공이 좌중을 압도하면서 행사를 진행하자 오히려 원수(員數)가 성대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음복을 끝내고 나서는 각자 자리에서 일어나 연음(燕飮)을 하였는데, 이때에도 반드시 술잔을 잡고 자리에 있는 관원에게 전해 줄 적에 공이 술잔을 들고는 항상 좌우에 읍(揖)을 하였으며, 좌우에서 술잔을 건네주어 받게 되었을 때에도 땅에 엎드려 사례를 한 뒤에 마시곤 하였다. 이렇듯 공이 끝까지 자기 자리를 고수하면서 술을 마셨으므로 사람들 역시 함께 읍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렇게 하지 말라고 공에게 권해도 공은 조금도 흐트러지는 기색이 없이, 겸허하면서도 평화스러운 분위기가 온몸에서 우러나오곤 하였다. 그런데 다른 헌관들은 공처럼 그렇게 제대로 행하는 사람이 있지 않았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선진(先進, 선배)들이 보여 주는 행동거지에 대해서 작은 일이라도 자세히 살펴보는 버릇이 있었는데, 이런 광경을 한번 목도하여 공이 장후(長厚)한 군자라는 것을 알고는 항상 칭찬하여 마지않았다’라고 표현함으로써 편안한 술자리로 여기는 대부분의 사람들 속에서도 간혹 예를 다하는 이가 있음을 밝혔다.

 

1534년(중종 29) 8월5일에 사간원(司諫院)의 대사간 오결(吳潔), 사간 채세영(蔡世英), 헌납 신거관(愼居寬)은 석전제에 음복하지 못한 것으로 대죄했는데, 그 내용은 ‘석전제 드리는 날에는 조정이 음복하고 다음 날에는 본원(本院, 사간원)이 음복하는 것은 조종조의 관례인데, 8월3일의 석전제 후 이튿날인 8월4일에 성균관에서 본원에게 음복하기를 청하기에 성균관에 갔으나 마침 왕자와 재상들이 하련대에서 대사례의 습례(習禮)를 하고 있어 알성(謁聖)하기도 어렵고 명륜당에 앉아서 음복한다는 것도 편안치 못하여 음복하지 않고 돌아왔으나 「음복은 사적인 일이 아니고, 역시 공적인 일」(飮福 非私事 亦公事也)인데 하지 않고 돌아왔으니 대죄한다’는 것이었다.

 

조선 중기를 살았던 문신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의 『미암집(眉巖集)』에서도 1573년(선조 6) 2월6일 있었던 석전제 음복의 내용을 전하고 있는데, 이날 음복을 위해 병조 판서 김귀영(金貴榮)과 함께 성균관을 방문한 부제학(副提學) 유희춘은 알성 후 대성전의 동북쪽 협문으로 들어가 명륜당 서쪽 협실에 앉았다. 삼재(三宰) 원혼(元混), 예조 판서 정유길(鄭惟吉), 호조 참판 심수경(沈守慶), 이조 참판 강사상(姜士尙), 공조 참의 윤두수(尹斗壽), 호조 참의 이린(李遴)이 먼저 도착해 있는 가운데, 우의정 박순(朴淳)이 제일 늦게 도착하자 판서 김귀영과 유희춘이 성균관의 동지(同知)로서 정중히 박순에게 읍을 하고 당에 올랐으며, 2품 이상이 먼저 나아가 읍을 하고 서벽(西壁)에 서고 참의가 다음으로 나아가 읍을 하고 모두 자리에 나아갔다. 유생들이 뜰로 나와 뵙기를 청하고 앞으로 나갔는데, 당상관이 모두 서니 제생(諸生)들이 재배하고 모든 재상들은 다시 교의(交椅)에 앉으니 술상이 나오고 음식도 푸짐했다. 이에 음복의 과반(果盤, 과일 담은 쟁반)을 별석에 차리고 우의정 이하가 순서대로 나가 절을 하고 받아 마셨으며, 당하관도 5명이 한 무리가 되어 올라가 음복을 마쳤고, 우의정이 녹사(錄事)를 시켜 좌우에 ‘이제 끝냅시다’라고 알리자 순서대로 나왔다.

 

우의정까지 역임한 심수경(沈守慶, 1516-1599)이 지은 『견한잡록(遣閑雜錄)』에는 성균관 석전 음복례의 모습이 매우 구체적인데 내용은 아래와 같다.

 

‘성균관에서 춘추로 행하는 석전제가 끝나면 문무 대소관(文武大小官)이 모여 음복례를 행하는데, 그 예가 매우 성대하였다. 1품부터 당상(堂上) 3품까지는 명륜당상(明倫堂上)의 교의(交倚)에 앉고, 당하(堂下) 3품부터 9품까지는 계단 위에 마련한 긴 의자에 앉아있다가, 조촐하게 차린 상 앞에 서서 차례로 엎드렸다가 일어나 음복하였다. 음복이 끝나면 상과 교의, 긴 의자를 철거하고, 제자리로 가서 평좌(平座)하면 각기 큰 상을 드리는데, 주찬(酒饌)이 매우 풍성하였다. 이는 모두 성균관에서 마련하는 것으로, 당상관·당하관 할 것 없이 서로 주거니받거니하였다. 또 술을 잘 마시는 자에게는 따로 큰 잔을 주어 아주 취한 뒤에야 파하였다. 춘추로 행하는 둑제(纛祭, 국가의 군사권을 상징하는 제사로 유일하게 무관들이 주관하여 지냄)를 지낸 뒤에도 음복의 예를 훈련원(訓鍊院)에서 행하는데, 석전제와 마찬가지이다. 병조에서 보병에게 군포를 주면 본원(本院, 훈련원)에서 마련하는 것이다. 관례에 따라 관악(官樂)과 영기(伶妓)를 주어 가무(歌舞)를 성대히 베풀어서 환락이 극도에 달한 뒤에야 파하였다. 또 춘추로 행하는 무예도시(武藝都試)를 여는데, 종장(終場)하는 날에는 정부 6조의 당상관 전원과 도총부(都摠府)와 훈련원에서는 각기 당상관 한 사람씩이 참석하였다. 관례에 따라 조정에서는 주악(酒樂)을 내리고, 각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모든 기구를 공급하게 하여 또한 환락이 극도에 달한 뒤에야 파하였다. 이것들은 모두 조정의 성대한 일이었는데, 임진난 후 음복 등의 행사가 모두 행해지지 않으니 크게 탄식할 일이다'

 

4. 현대의 석전과 제례주·음복주

 

일제강점기, 해방을 거치면서 석전의 모습은 상당히 변했고, 그 속에서 제례의식으로서의 음복례만 남았는데, 좀 더 정확하게는 음복수조례(飮福受胙禮)라고 표현하고 있다.

 

아울러 석전 봉행에 참여한 헌관 및 제집사뿐만 아니라 그날 참례객으로 참석한 모든 이들에게 수복 집안의 김인겸 여사와 이욱 수복 등이 정성 들여 만든 제례주를 음복의 의미로 약간의 육포(肉脯) 등과 함께 배포하고 있는데, 1935년생으로 경기도 안양에서 살다가 23살이던 지난 1957년 1월에 성균관에서 일하던 이정우 수복(李楨雨, 1932-2012, 43년 재직)에게 시집을 오면서부터 60년 넘게 춘기·추기 석전의 제물 준비 및 제례주 제조를 담당한 김인겸 여사의 증언에 의하면, 지난 1960~70년대만 해도 2천 명 이상의 내·외국인 참례객들이 석전 봉행시 성균관을 방문하여 국내 주요 언론의 1면에 메인기사로 나갈 정도였고, 1980-90년대에도 최소 500-1,000명이 기본인 데다 청와대, 서울시경 등 관계기관에도 맛을 보도록 제공되었으므로 지금보다 훨씬 많은 양이 쓰였으며,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현재는 참례객 숫자가 많이 줄어 큰 항아리 3개를 채울 정도인 80kg 1가마 정도를 사용해 제례주를 만들어 석전을 지내고 참석한 후 돌아가는 참례객들에게 배포하고 있다고 한다.

 

정록청 앞에 있던 우물에서 길어 올린 물로 제례주를 비롯한 석전을 준비했는데, 돌아가신 시아버지 이완산(李完山, 1902-1969, 52년 재직) 수복과 남편 이정우 수복부터 들은 바에 의하면 1950년 한국전쟁 발발 후 정부와 국군이 후퇴하고 서울이 북한군에 의해 점령될 위기에 이르자 수복 가족들이 수복청 옆에 위치한 제기고에 있던 각종 제기를 우물 속에 넣어 탈취될 위험을 없애고 피난을 떠났다가 전쟁 종료 후 다시 꺼내서 이후의 석전 봉행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사용했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 등에서 언급되었던 소, 양, 돼지의 사용 여부 및 특히 절단된 머리의 사용에 대해 김인겸 여사와 수복 집안 장남인 이태형 대표, 현재의 이욱 수복은 ‘양은 우리나라에서 귀해서인지 보지 못했고 대신 염소를 사용했는데 1950-1960년대만 하더라도 살아있는 염소를 사다가 수복청 옆의 전사청에서 직접 잡았으나 몇 년 지나지 않아 더 이상 직접 잡지 않고 도축된 것을 사서 사용했고, 1980년대 후반까지도 소·염소·돼지의 머리를 성균관 석전에서도 올렸으나 혐오스러우니 더 이상 머리 부분은 사용하지 말자라는 논의가 성균관 내부에서 결정되고 통보되어 이후부터는 석전을 앞두고 필요한 고기를 구입할 때부터 목 아래의 몸통과 다리가 있는 형태로만 사용하고 있다’고 전했다.

 

석전은 유교를 대표하는 의례이고, 특히 서울 문묘 성균관의 석전은 유교인, 유림뿐만 아니라 한류 열풍의 와중에 한국을 찾은 외국인들과 젊은 한국인 세대가 시중에서 한 번도 보지 못하는 다양한 모습을 담고 있는 종합예술의 의미도 가지고 있다.

 

더군다나 석전 봉행시 문묘제례악(文廟祭禮樂)을 연주하는 악단(樂團)과 팔일무(八佾舞)를 추는 무용단(舞踊團)의 우아하면서도 격조 있는 모습은 유교의 창시국이었던 중국에서조차 사라진 원형을 파악하기 위해 올해 춘기석전 봉행시에도 한국의 성균관을 찾아올 정도로 관심을 모으고 있으며, ‘빠른 시간 내에 나름의 원형을 회복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는 중국 정부에 비해 사회적 및 국가적 관심도가 떨어지는 우리나라의 정부·사회·언론·여론주도층·일반 국민들을 상대로 한 더욱 확장된 형태의 홍보와 노력이 성균관과 유림에게 절실히 필요하다. 

 

지금은 예에 대한 우리 조상들의 자세를 알 수 있는 다음의 글이 다시 한번 생각나는 시간이다.

 

‘그 예를 한 번 변동하게 되면 곧 관례가 되니 예를 변동하는 일은 가볍지 않습니다(一變其禮 則仍成例事 變禮之事 非輕)'-『중종실록』 중종 8년, 8월1일 기사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