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포럼

신간 소개 <예교주의>

17세기부터 19세기 초까지 중국 지식인이 가장 몰두했던 사상적 경향을 탐구한 이 책은, 그 경향이 ‘유가 예교주의’였다고 주장한다. ‘예교주의’가 당시 지식인의 윤리, 학문, 종족에 대한 담론을 통해 표현되었다고 분석한다. 기존에 ‘고증학’이라고 널리 알려졌던 사상적 경향을 ‘언어적 순수주의 해석학’으로 표현해야 타당하며, ‘언어적 순수주의 해석학’에 몰

오진희 기자 2013. 10. 16.


 


 


 

17세기부터 19세기 초까지 중국 지식인이 가장 몰두했던 사상적 경향을 탐구한 이 책은, 그 경향이 ‘유가 예교주의’였다고 주장한다. ‘예교주의’가 당시 지식인의 윤리, 학문, 종족에 대한 담론을 통해 표현되었다고 분석한다. 기존에 ‘고증학’이라고 널리 알려졌던 사상적 경향을 ‘언어적 순수주의 해석학’으로 표현해야 타당하며, ‘언어적 순수주의 해석학’에 몰두한 당시 학자들의 밑바탕에는 ‘리’(理)보다 ‘예’(禮)를 중시한 ‘예교주의’라는 사상적 조류가 있었다고 주장 하고 있다.

 

20세기 초반의 양계초(梁啓超)는 고증학이 송·명대의 ‘리학’에 대한 반발이라고 생각했고, 장태염(章太炎)은 한족 지식인을 탄압하기 위해 벌인 ‘문자옥’(文字獄)의 일환이라고 생각했다. 장태염의 이 학설은 서복관(徐復觀) 등의 옹호를 받아 20세기 타이완과 중국 대륙학계 양측으로부터 가장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장태염의 학설에 대안을 제시한 사람이 미국에서 주로 활동한 여영시(余英時)였다. 그는 고증학의 유행 원인이 ‘유가 지식주의’(Confucian Intellectualism)가 흥기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한편, 엘먼은 고증학의 발달로 <고문상서>가 위작임이 밝혀지는 등, 우상파괴 효과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고증학이 기존 유학의 계승이 아니라, 기존 유학을 무너뜨린 새로운 사조였다고 본 것이다. 그는 청대에 이와 같은 인식론상의 혁명이 일어난 이유가 서양 출신의 선교사들이 전해준 수학·과학 지식의 흡수, 출판문화의 발달, 강남 지역의 풍부한 장서루와 문인들의 학술교류 네트워크, 학문을 전업으로 삼을 수 있게 된 사회경제적 변화 덕분이라고 진단하고, 청대 학자들이 전례 없던 언어학적 기술을 동원하여 ‘담론의 혁명’을 실천하면서 성과를 펼쳐나갔다고 평가했다. 또 엘먼은 고증학이 18세기 후반의 ‘한학운동’으로 그 정점을 이루었으며, 그 이전의 현상을 모두 ‘한학운동’의 예비단계에서 나타난 전조 현상이라고 보았다.

 

이 책은 청대 사상의 안내서로서 엘먼의 책 <성리학에서 고증학으로>를 유용하게 보완하면서도, 몇몇 측면에서 엘먼에게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18세기 중국을 살았던 수많은 주요 저술가, 제도, 사회적 범주에 관한 분석을 조명하고 있다. 이는 이전까지 전혀 검토되지 않던 것들이다. 문의/ 모노그래프출판사 02)2274-78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