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포럼

(사)화성연구회, 백승종 전 서강대 교수의 "큰 선비 모재 김안국" 주제 발표

백승종 전 서강대 교수가 강연하고 있다. 참석자 모습이다. 김안국의 친필 시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세모의 빈 산, 흰 집은 차고 은거한 이는 문을 닫고 화로를 마주 보고 있네. 눈 그친 숲 너머로 천 봉우리가 드러나고 해 지는 강가에 외로운 새 한 마리 돌아오네. 백발의 노년, 누가 벗이 되랴? 황관(도사의 모자) 쓴 채로 늙어가니 한숨만 나네. 세

김용헌 2025. 6. 25.

 

백승종 전 서강대 교수가 강연하고 있다.

 


 

 

참석자 모습이다.

 


 

 

김안국의 친필 시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세모의 빈 산, 흰 집은 차고 은거한 이는 문을 닫고 화로를 마주 보고 있네. 눈 그친 숲 너머로 천 봉우리가 드러나고 해 지는 강가에 외로운 새 한 마리 돌아오네. 백발의 노년, 누가 벗이 되랴? 황관(도사의 모자) 쓴 채로 늙어가니 한숨만 나네. 세상의 인심이 차든 덥든 내버려두고 속세의 티끌은 본 지 이십 년이 되었네.

 


 

(사)화성연구회 주관하고 수원학연구센터가 후원하는 수원과 관련한 역사-문화인물들의 새로운 시각을 통해 수원지역의 위상과 당대 한국사를 종합적으로 조명하고자 "수원을 읽는 또 다른 시선들"이란 주제 강연 중 2번째 강좌로 백승종 전 서강대 교수의 "수원의 벗이자 스승-모재 김안국" 주제 발표가 지난 6월24일 19시부터 수원화성박물관 영상교육실에서 30여 명의 화성연구회 회원과 시민이 참석한 가운데 있었다. 

 

모재 김안국(金安國)은 조선 중기의 문신. 대사간, 예조판서, 판중추부사를 역임했다. 본관은 의성. 자는 국경(國卿), 호는 모재(慕齋), 시호는 문경(文敬). 김연의 아들이자 김정국의 형. 조광조와 함께 김굉필의 대표적인 제자 중 한 명이다. 

 

발표자는 "김안국은 진실한 선비였다. 명종실록에 대사헌 송세형(宋世珩)이 김안국의 행실을 증언하는 대목이 다음과 같았다"라고 말했다. 

 

"김안국이 예조판서로 있을 때 건백(建白)하여 법으로 정하기를 혼인잔치에 음식은 3~4 그릇을 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부터 솔선수범하여 자기집 초례 날에 술을 세 순배만 돌리고 그쳤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모두 본받았습니다."(명종실록  3월13일). 

 

발표자는 "김안국은 사화로 이천과 여주에서 은거하였는데 한 사람의 농민으로 농사에 종사하였고, 향촌 선비들의 벗이자 스승이었다. 신분 철폐를 주장하지 안았으나 신분이 낮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았다.어느날  소낙비를 만나 노비의 집으로 비를 피했을 때 노비 방순과도 살구나무 나래에 둘러 앉아 술이 취할 때까지 마셨다는 기록이 김안국《모재집》에 있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실용과 실질을 숭상하여 사치와 허세를 배격하였다. 매사를 말로만 그럴듯하게 꾸며 주장한 것이 아니라 나라에 필요한 일은 법과 규칙으로 제정하였으며 자신이 앞장서 실천하였다. 우리가 그를 실천적 지식인이라고 부르는 까닭이 바로 그 점에 있다. 김안국은 선비를 상대할 때 상대의 지위가 높고 낮음을 따지지 않았다. 유능학 성실한 선비이기만 하면 누구든지 이끌어 주고, 격려해 주었다. 조정에 나아가서도 아랫 사람의 말을 귀담아들었고, 젊은 선비들의 과감한 언론과 비판을 사랑하였다. 그는 나라를 근심하고 염려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죽을 때까지도 '나랏일'이란 말을 되풀이 했다. 끊임없이 수련하여 큰 학문을 이루고, 그것을 신천하다가 일생을 마쳤으니, 이런 인물은 그 옛날에도 찾아보기 어렵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