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성현은 『대학(大學)』에서 “덕은 근본이요, 재물은 말단이다(德者本也 財者末也)”라고 했다. 이는 기업을 이끄는 자라면 마땅히 정도(正道)를 지키고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상도의 근본을 일깨우는 말이다. 하지만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의 손자 정대선 前 HN 사장이 보여준 모습은 이러한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었다. 한때 범현대가의 후광 속에 공격적 확장을 이어갔던 그는 결국 가문이 물려준 이름은 물론, 우수AMS 경영권과 성북동 저택 등 핵심 자산까지 잇달아 잃는 사상누각(沙上樓閣)의 결말을 맞았다.
♢ 무신불립(無信不立), 신뢰를 잃은 ‘현대코인’의 신기루
사태의 출발점은 201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대선이 이끌던 현대BS&C는 스위스에 법인을 세우고 가상자산 ‘HDAC(에이치닥)’을 발행했다. 이른바 ‘현대코인’으로 불리며 수천억 원 규모의 자금을 끌어모았지만, 메인넷 출범 이후 소스코드와 개발 현황 공개가 늦어지면서 시장의 의구심을 키웠다. ‘깜깜이 운영’이라는 비판이 나온 것도 이 무렵이다.
투명성이 생명인 블록체인 생태계에서 1300억 원 규모에 달하는 사전 채굴(프리마이닝) 물량 의혹은 상장 이후 덤핑 우려를 키웠고, 소액 투자자들의 불안을 자극했다. 여기에 사설 마이닝풀 해킹 사태로 이른바 먹튀 의혹까지 불거졌다. HDAC 측은 공식 풀이 아니라며 선을 그었지만, 투자자들의 의혹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스위스 금융당국(FINMA) 인증을 받은 것처럼 비칠 수 있는 표현으로 과장 홍보 논란까지 더해지면서 기업과 대중을 잇는 가장 중요한 축인 신뢰는 점차 흔들리기 시작했다.
♢ 수백억 원대 자금 의문… 결자해지(結者解之) 나서야
더욱 무겁게 짚어야 할 대목은 자금의 흐름과 오너의 설명 책임이다. 당시 정대선 측은 암호화폐 발행을 위해 스위스에 법인을 세우고 사업 구조를 해외 기반으로 설계했다. 이 과정에서 코인 발행 및 재단 운영과 연관된 자산 일부가 해외 법인 또는 관련 구조로 이전·관리됐을 가능성에 대한 의문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당시 정대선이 보유한 암호화폐 지갑에는 개당 200만 원대였던 비트코인이 상당량 보관돼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비트코인 가격이 크게 오른 2026년 기준으로 보면 그 규모가 수백억 원대에 이를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다만 핵심은 액수 자체가 아니라 그 자산의 성격이다. 그것이 단순한 개인 보유 자산이었는지, 아니면 코인 생태계 구축과 개발, 재단 운영을 위한 사업 관련 자산과 연결된 것이었는지는 여전히 충분히 설명되지 않았다.
해외 법인과 재단 구조가 동원된 사업일수록 자금의 귀속 주체와 사용 목적, 관리 경로는 더욱 분명해야 한다. 만약 일부 자산이 프로젝트 운영 목적과 다른 방식으로 보관·이전·관리됐다면 이는 단순한 경영상 판단을 넘어 신뢰 훼손의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 반대로 적법하고 정당한 구조였다면 그 역시 투명한 자료로 확인돼야 한다.
수많은 투자자가 손실을 호소하고 프로젝트의 존립 자체가 흔들렸던 상황에서 시장이 요구하는 것은 침묵이 아니라 소명이다. 진정한 상도를 아는 기업가라면 자금 흐름을 투명하게 설명하고, 제기된 의문에 스스로 답하며, 피해를 호소하는 이들의 물음에도 책임 있게 응답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자세다.
♢ 탐욕의 덫이 된 부동산, 무너진 기업 윤리
코인 사태로 시장의 신뢰에 금이 간 상황에서 2021년 국세청 세무조사는 기업의 회계와 자금 운용 전반에 대한 우려를 더욱 키웠다. 그럼에도 회사는 본업인 정보기술(IT)의 경쟁력을 다지는 대신, 사명을 HN Inc로 바꾸고 ‘헤리엇’ 브랜드를 앞세워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사업 확장에 나섰다.
결과적으로 이는 부동산 호황에 기대 과도한 레버리지를 일으킨 무리한 확장이었다는 평가를 피하기 어렵다. 기술 기반 기업으로서 내실을 다지기보다 외형 확대에 치우친 선택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는 이후 시장이 그대로 보여줬다.
♢ 사필귀정(事必歸正), 상도를 저버린 대가
금리가 오르고 시장이 급격히 얼어붙자 그 부작용은 한꺼번에 드러났다. 대치동 고급 오피스텔 등 주요 사업장의 공사가 멈춰 섰고, 자금난에 몰린 HN Inc는 2023년 결국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회생 절차를 거치며 경영권은 SM그룹 계열로 넘어갔고, 상장사 경영권과 개인 자산까지 흩어지는 상황에 이르렀다.
정대선과 HN그룹의 몰락은 단순한 투자 실패나 사업 판단 착오로만 보기 어렵다. 그것은 정도(正道)를 벗어난 경영이 어떤 결말로 이어지는지를 보여주는 뼈아픈 사례다. 재벌이라는 이름과 눈앞의 이익만 좇아 의로움(義)을 잊는다면, 결국 사필귀정(事必歸正)의 이치를 거스를 수 없다는 경구를 이 사례는 다시 일깨운다.
기업의 흥망은 숫자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신뢰를 잃은 경영, 책임을 외면한 확장, 공과 사의 경계를 흐린 판단은 언젠가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된다. 정도를 잃은 번영은 오래가지 못한다는 오래된 가르침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