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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향교 민성배 유도회장, "문묘배향, 학문 넘어선 정치의 산물"

전통 유교 의례인 문묘배향이 단순한 학문적 평가를 넘어 정치적 산물이었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민성배 해남향교 유도회장은 지난 17일 해남향교 충효관에서 ‘문묘배향의 변천사’를 주제로 강연을 열고, 문묘가 종묘와 함께 왕조의 정통성과 정치적 정당성을 상징하는 핵심 공간이라고 밝혔다. 그는 문묘의례를 “유교 정치문화를 대표하는 중요한 국가 의례”라고 규정했다.

손은수 기자 2026. 4. 19.

 

 

전통 유교 의례인 문묘배향이 단순한 학문적 평가를 넘어 정치적 산물이었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민성배 해남향교 유도회장은 지난 17일 해남향교 충효관에서 ‘문묘배향의 변천사’를 주제로 강연을 열고, 문묘가 종묘와 함께 왕조의 정통성과 정치적 정당성을 상징하는 핵심 공간이라고 밝혔다.


그는 문묘의례를 “유교 정치문화를 대표하는 중요한 국가 의례”라고 규정했다.

 

민 회장에 따르면 문묘배향은 고려시대에도 이루어졌으며, 설총·최치원·안향 등이 공자와 함께 배향됐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배향 기준은 더욱 복잡해졌고, 학문적 업적뿐 아니라 정치적 입장과 왕실과의 관계가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특히 조선은 숭유억불 정책 아래 문묘를 국가 사전체계에 편입시키고, 왕실과 사림 세력 간의 협의 속에서 배향 인물을 선정했다.


이 과정에서 정치적 합의가 이뤄지지 않을 경우, 이색·이숭인·권근 등 초기 유학자들은 배향 대상에 오르지 못하기도 했다.


사림 세력이 성장한 중종대 이후에는 정몽주가 처음으로 문묘에 배향됐고, 이어 선조대에는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 등 이른바 ‘오현’의 종사가 추진됐다.


다만 당시 사림 내부의 분열로 결정이 지연되다가, 광해군 2년에 이르러서야 이들이 문묘에 함께 배향됐다.


이처럼 문묘배향은 전국 유생들의 상소와 정치적 협의를 거치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졌다.


남명 조식의 경우 전국적인 상소 운동이 전개됐음에도 불구하고 왕의 재가를 얻지 못해 끝내 배향이 무산되는 등, 정치적 요인의 영향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또한 붕당 정치가 심화된 조선 후기에는 특정 학파와 정치 세력의 영향에 따라 문묘 배향 인물이 추가되거나, 기존 인물이 출향됐다가 복향되는 사례도 반복됐다.


이이와 성혼의 출향·복향, 김장생·송시열·송준길 등의 배향 과정 역시 이러한 정치적 역학 관계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민 회장은 “문묘배향은 유학의 도통과 학문적 정통성을 표방하는 제도이지만, 실제 운영에서는 왕실과 사림 간 정치적 힘의 균형과 타협이 크게 작용했다”며 “문묘는 학문과 정치가 결합된 상징적 공간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해남향교는 매월 음력 초하루와 보름에 대성지성문선왕 공자를 비롯한 5성 등에 대한 삭ㆍ망분향례를 봉행하고 있으며 분향례후 유림을 대상으로 내외 유명강사를 초청 강연을 실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