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사설> 70년 전 그날의 열기를 되살리자

성균관유도회총본부가 창립 70주년을 맞아 오는 10월21일 전국 유림대회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70년 전 그날의 열기를 되살려 유림사회 대전환의 계기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지난 8월4일에는 회장단과 시도본부회장 연석회의를 개최해 의견을 수렴하고, 앞으로 전국 향교재단이사장, 전교협의회장 연석회의도 계획하고 있다. 성균관유도회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창립 전의

편집부 2016. 8. 12.

성균관유도회총본부가 창립 70주년을 맞아 오는 10월21일 전국 유림대회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70년 전 그날의 열기를 되살려 유림사회 대전환의 계기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지난 8월4일에는 회장단과 시도본부회장 연석회의를 개최해 의견을 수렴하고, 앞으로 전국 향교재단이사장, 전교협의회장 연석회의도 계획하고 있다.

성균관유도회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창립 전의 유림계 상황은 정말 최악이었다. 광복 이후 성균관으로 모여 든 유림들은 파벌을 이뤄 시도 때도 없이 갈등과 충돌을 일으켰고 심지어는 유혈투쟁까지 빈번하게 벌어졌다.

백범 김구 선생이 상해 임정에서 귀국하기 전까지 이런 상황은 계속됐는데, 백범 선생의 귀국 이후 전국 유림대회가 열리면서 혼란 상황이 비로소 정리되기 시작한다. 1945년 11월30일 개최된 전국유림대회는 남북한 유림 1,000여 명이 성균관 명륜당에 모여 6일간 열렸다. 당시 회의에서는 도의의 혁신과 향상, 성균관대학 설치를 위한 재단 구성 등을 결의했다.

1945년 12월16일부터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미국·영국·소련의 3개국 외무장관이 모여 7개 의제에 대해 토의하였는데 이때 한국에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하고 일정 기간의 신탁통치에 관해 협의한다는 사안이 결정됐다.

이 같은 소식이 알려지자 유림들은 1946년 1월19일 전국유림통일대회를 열어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조선을 원조한다 함은 감사하나 조선의 독립을 승인하고 국교적인 원조를 해주기를 원한다”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미·소·영·중 4개국에 보내기로 합의했다. 이 같은 움직임은 조선의 자주독립을 추구하는 운동으로 확산되었고, 이는 유림의 역량이 올바르게 발휘되는 현상으로 평가를 받았다.

1946년 2월10일에는 오랫동안 분립되어 있던 유도회 간부회의를 성균관에서 개최하고 완전 합의에 의견 일치를 이뤄 전국유림대표자대회를 열어 유도회 조직을 개정키로 했다.

마침내 1946년 3월13일 전국 유림 2,500여 명이 성균관 명륜당에서 유도회 창립총회를 열고 김창숙 선생을 위원장으로 선출했다.

이어 1946년 5월 유도회총본부는 성균관에서 총회를 열어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한국유교의 부흥을 위한 문제들을 상정하고 토의함으로써 사업의 첫 출발을 보게 된다. 당시 토의된 문제들은 첫째, 성균관의 정비 및 유지, 둘째, 향교재산의 관리, 셋째, 성균관대학의 설립이었다.

이런 유림계의 일련의 상황들은 당시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에서 경쟁적으로 보도되었는데, 훗날 유도회 창립은 유림사회의 저력과 특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받는다. 언뜻 사분오열된 것으로 보이는 유림사회가 어느 순간 하나가 돼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모습은 무섭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비록 지난 수년간 성균관과 성균관유도회 등 유림사회가 분열의 모습을 보이면서 혼란에 빠졌지만 이제 상황들이 비로소 정리되기 시작했다. 지금은 유림사회의 공통 의제를 어떻게 새롭게 발굴하고 유림의 역량을 어떻게 하나로 모아 갈 것인지가 문제가 되는 시점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성균관유도회 창립 70주년 행사는 김영근 회장의 말처럼 유림사회 대전환의 계기가 될 수 있다. 중앙과 지방의 유림 2,500명이 성균관 문묘를 가득 채우고 한 목소리로 시국을 질타하는 모습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다. 이를 위해서는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고 유림들의 생각도 제대로 읽어내야 한다. 부디 70년 전 그날의 열기를 되살릴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