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림시론

<특별기고> 하준약법 한폐번형(何遵約法 韓弊煩刑)

『천자문(千字文)』의 각 문구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큰 교훈을 전한다(출처-나무위키) 김두호 성균관 전인·윤리위원, 유교신문 전국주재기자협의회 수석부회장 중국 남북조시대 양(梁)나라의 학자 주흥사(周興嗣, 470-521)가 무제(武帝, 464-549, 재위 502-549)의 명을 받아 지은 『천자문(千字文)』은 중복되지 않는 1,000개의 한자를 1구(句

오흥녕 2025. 10. 15.

 

 

 

 

『천자문(千字文)』의 각 문구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큰 교훈을 전한다(출처-나무위키)

 


 

 

 

 

김두호 성균관 전인·윤리위원, 유교신문 전국주재기자협의회 수석부회장

 

 


 

중국 남북조시대 양(梁)나라의 학자 주흥사(周興嗣, 470-521)가 무제(武帝, 464-549, 재위 502-549)의 명을 받아 지은 『천자문(千字文)』은 중복되지 않는 1,000개의 한자를 1구(句) 4자(字), 총 250구로 구성하되 자연, 인간관계, 도덕, 역사, 철학 등 다양한 주제를 담아 한자 입문서로 널리 사용되어 왔다.

 

우리나라에도 이미 삼국시대인 521년에 전해진 이후 여러 판본으로 간행되었고, 특히 1583년(선조 16)에 선조 임금의 어명에 의해 명필 한호(韓濩, 1543-1605 : 호-석봉(石峯))가 쓴 『석봉천자문(石峯千字文)』이 편찬되며 오늘날까지 가장 널리 보급되었다.

 

조선 왕조의 국왕들도 큰 관심을 보였는데 예를 들어 제11대 국왕 중종(中宗, 1488-1544, 재위 1506-1544)은 1517년 당시 세 살밖에 안 된 원자(元子, 세자에 책봉되지 않은 맏아들)인 훗날의 인종(仁宗, 1515-1545, 재위 1544-1545)에게 그동안 익힌 『천자문』의 내용에 대해 물었고,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외우자 이를 기특하게 여겨 더욱 경계할 것을 강조한 계잠(戒箴)을 직접 작성해 주며 수양에 힘쓰도록 당부했다(『국조보감(國朝寶鑑)』 권 19, 중종조(中宗朝) 2).

 

제19대 국왕인 숙종(肅宗, 1661-1720, 재위 1674-1720)은 1691년 직접 『천자문』의 서문을 지어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일명 춘방(春坊))에 내리면서 ‘매번 글을 읽을 때에는 글자의 새김을 알 뿐만 아니라 반드시 반복하여 뜻을 궁구하고 유추하여 키워가야 될 것이다’라고 강조했고, 세자시강원은 숙종의 서문을 담은 『천자문』을 간행해 세자인 훗날의 경종(景宗, 1688-1724, 재위 1720-1724)을 위한 서연(書筵, 세자에게 경서를 강론하던 자리)에 사용하기를 국왕에게 청하여 윤허 받았다(『국조보감』 권 49, 숙종조(肅宗朝) 9).

 

이렇듯 오랫동안 한국인의 사랑을 받아온 『천자문』의 구절들 중에서 오늘은 74번째에 해당하는 ‘하준약법 한폐번형(何遵約法 韓弊煩刑, 소하는 간략한 법을 따랐고, 한비자는 번거로운 형벌로 피폐하게 만들었다)’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법의 시행에 있어서의 간결함과 가혹함의 결과를 극명하게 대비해 보여주는 이 구절에서 첫 번째 구절의 ‘하(何)’는 초한전(楚漢戰)의 두 지도자 중 한 명인 한(漢) 고조(高祖)의 명신 소하(蕭何, 기원전 257-193)를 말하고, 두 번째 구절의 ‘한(韓)’은 중국 전국시대의 법가(法家) 사상가 한비자(韓非子, 기원전 280?-233)을 가리킨다.

 

초패왕(楚沛王) 항우(項羽, 기원전 232-202)와의 목숨을 건 싸움에서 유방(劉邦, 기원전 247?-195)이 승리하는 데 있어서 큰 기여를 하고, 한나라 건국 후에는 승상으로서 정무를 맡아 오랜 전란으로 황폐해진 국가 안정과 부흥에 헌신했던 소하는 ‘약법삼장(約法三章)’으로 불리는 간단한 법규를 시행했다.

 

그 내용은 ①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하고, ②상해를 입힌 자와 ③재물을 훔친 자는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행한다(殺人者死 傷人及盜抵罪)라고 매우 간략했으나 과거 진(秦)나라 시절에 너무나도 엄격한 법 적용으로 고통받았던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이끌어냈다.

 

한비(韓非)라는 본래의 이름보다 당(唐)나라의 유학자 한유(韓愈, 768-824)와 구분하기 위해 후세인들이 표현하기 시작한 이름으로 훨씬 더 널리 알려진 한비자는 인의(仁義)가 아니라 법으로 백성을 다스려야 하고, 백성의 생각에 휘둘리지 말아야 하며, 지혜롭고 강직한 사람을 등용해 능력 없는 권세가를 쫓아내야 한다는 등의 강경한 생각이 담긴 사상을 형성했고, 그의 이러한 생각들은 부국강병을 추진하던 시황제(始皇帝, 기원전 259-210, 재위 기원전 221-210)에 의해 채택되어 진나라의 대표적인 정책으로 추진됐다.

 

소하의 간결한 법률은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백성의 신뢰를 얻으며 이후에 한나라가 약 400년간 존속하는데 주요한 밑바탕이 되었던 반면에 한비자의 번거롭고 가혹한 형벌은 백성들의 불만을 초래해 결국 시황제가 세상을 떠난 지 4년만에 진나라가 멸망하는 핵심적인 요소가 되었는데 이것은 통치에 있어 법의 중요성과 함께 시행 방식의 신중함을 강조하고 있기도 하다.

 

두 사람의 인생 후반부도 매우 대조적이어서 장량(張良, 기원전 250-186), 한신(韓信, ?-기원전 196)과 함께 유방을 도운 핵심 3인방인 ‘한삼걸(漢三傑)’ 소하는 스스로 물러날 것을 청하여 은퇴한 후 조용히 살아 이후 후손들도 대대손손 명맥을 이었던 반면에 한비자는 스승인 유학자 순자(荀子)에게 함께 공부했던 이사(李斯, 기원전 284-208)의 모함을 받아 감옥에서 독살되는 운명을 맞이했다.

 

『명심보감(明心寶鑑)』의 ‘상임지이천감 하찰지이지지(上臨之以天鑑 下察之以地祗, 위에서는 하늘의 거울이 내려다 보고, 아래에서는 땅의 신령이 살피고 있다)’는 구절도 잘 알려져 있듯이 우리들의 마음가짐과 행동은 하늘과 땅의 감찰 아래 있음을 경계하고, 스스로를 돌아보며 어디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바른 삶을 만들어 가야할 것이다.

 

복잡하게 구성된 법도 사람들을 괴롭히지만 수시로 바꾸는 법도 겉으로는 뭔가 대단한 게 있는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숨은 의도를 감추고 있는 경우가 많았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지금은 작고(作故)하신 성균관의 옛 지도자 어른이 생전에 말하셨던 “내 주위에는 왜 바른 사람이 없을까?”라는 말씀이 생각하는 요즘이다.

 

예년보다 길었던 추석 연휴를 보낸 후이지만 연세 높은 유가(儒家)의 어른과 못 뵌 지가 격조수월(隔阻數月)이라 격조(隔阻)함을 느끼는 분들에게 오늘 한 통의 전화라도 드려봄이 어떨까?

 

좋은 인연과 나쁜 인연을 구분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한 세상을 살아가며 그동안 쌓은 많은 인연이 승인연(勝因緣, 훌륭한 좋은 인연)되기를 염원하고, 누군가의 지적을 감사하게 받아들일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한 때이다.

 

『논어』 「학이(學而)」편의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구절이 떠오르는 아침에 모두의 안녕을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