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림시론

특별기고 - 진주향교를 가다

칼을 내리친다. 내리치면서 눈빛에 힘을 주어 본다. 허공을 향하여 수직으로 한 번, 수평으로 한 번 그었다. 이제 조용히 칼을 내려놓는다. 내 마음의 심검당에서 지어지선(止於至善)의 칼을 내려놓는다. 선산향교에서 인문학 여행단을 모으고 있었다. 여행지는 진주향교와 그 주변 촉석루와 남명 선생의 산천재와 덕천서원 등등이었다. 망설임도 없이 참가신청을 하였다.

장재균 2018. 12. 1.

칼을 내리친다. 내리치면서 눈빛에 힘을 주어 본다. 허공을 향하여 수직으로 한 번, 수평으로 한 번 그었다. 이제 조용히 칼을 내려놓는다. 내 마음의 심검당에서 지어지선(止於至善)의 칼을 내려놓는다.

 

선산향교에서 인문학 여행단을 모으고 있었다. 여행지는 진주향교와 그 주변 촉석루와 남명 선생의 산천재와 덕천서원 등등이었다. 망설임도 없이 참가신청을 하였다. 남도의 진주와 산천재가 갑자기 가보고 싶어졌다. 진주(晉州)의 진주(珍珠)를 느껴보고 싶어졌으며 남명 선생의 성성(惺惺)의 방울 소리를 듣고 싶었다.

 

아침나절부터 내리던 비는 우리 일행이 진주향교에 다달아도 계속 부슬거리고 있었다. 폭염을 적셔주니 오히려 고맙다. 선비의 풍모를 잃지 않으려는 진주향교 이방남 전교님의 갈색 도포가 우중에서도 깔끔해 보인다.

 

여행은 즐거움을 동반하는 새로운 세계다. 상견례를 나누고 문선왕 공자와 선현들을 배알하고 시절에 맞게 준비된 연밥으로 점심을 먹었다. 프로그램 속에 문화체험도 있는지 진주시전통예술회관으로 이동하였다. TV로만 보았던 검무를 관람하였다. 무구로 쓰이는 한 쌍의 칼은 다른 검무와 달리 목이 꺽이지 않는 칼을 사용하며 장단의 구성이 독특하고 춤사위가 다양하게 보였다. 국가무형문화재 12호로 지정된 유영희 선생의 시범과 지도로 칼춤을 추어 보는 기회도 가졌다. 아마 모두가 평생 처음이었으리라.

 

우리 일행은 이곳 진주향교의 청년유사인 양수영 선생의 안내로 남강을 향해 버스에 올랐다. 남강은 진주성 전투의 현장이자 진주의 젖줄이다. 내려올 때 버스 안에서 서로 인사를 나누면서 어느 한 분이 논개의 시를 외워 보이시는 덕분에, 이미 촉석루의 의암 앞에 선 논개의 환상이 떠올랐으리라.

 

입구의 공북문을 지나자 바로 오른쪽에 김시민 장군의 동상이 큰칼을 쥐고 위엄을 보이고 있었다. 이 분도 이순신 장군과 마찬가지로 충무공이라는 휘호를 받으셨다. 안내와 해설을 맡으신 교남문헌연구원의 김익재 박사의 박진감나는 설명은 우리의 눈과 귀를 의롭게 만들어 주었다. 슬퍼도 슬퍼함으로 그치지 말고 다시 잘 사는 축제로 이어지길 바라는 논개의 절의가 유등 축제의 유등에 은은한 불빛이 되어 남강을 유유히 흐르는 것만 같았다. 촉석루 암벽을 타고 오르는 백화등의 억센 줄기는 뜨거워지는 오월이 되면 바람개비처럼 향기를 품어내며 꽃을 피웠으리라. 하얀 소복 속에 노란 일편단심을 담아 마치 바람을 불러일으키듯 피는 이 백화등은 논개의 영혼이 담겨져 있지나 않을까?

 

백화등의 영혼을 뒤로 한 채, 진주성을 나와 천천히 길을 걸었다. 찻집으로 간다는 거였다. 왠 차? 하며 가는데 ‘죽향’이라는 다실로 들어서니 이건 예사롭지가 않은 것이었다. 약간 어두운 계단을 올라서니 삼사십 명이 둘러앉을 수 있는 차탁위에 곱게 차려 놓은 다식과 찻잔들, 병풍처럼 서 있는 대나무 그림, 안주인인 듯한 여인의 환한 미소가 처음 간 손님을 편안하게 해 주고 있었다. 이어서 소개를 듣고 보니 ‘그럴 만 하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마음을 식히라고 연차를 준비하였습니다.”

 

어떤 마음들인지 모를 바이지만 손님을 대하는 진심의 식힘의 미학이 아닌가!

 

‘우연히 잘 정돈된 선택’이라는 생각과 ‘미점유부(未占有孚)’라는 주역의 글귀가 떠올랐다. 미점유부는 ‘점(占)을 치지 않더라도 믿음이 있다’라는 뜻이다. 곧 다시 말해 격물의 완성이 미점유부로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해 보는 것이다.

 

왠지 마음이 끌리어 안주인과 같이 사진도 하나 박아 두었다. 나오면서 명함과 책도 한 권 얻었다. 곧고 맑은 향기가 스민 김형점이라는 이름이 박혀 있었다.

 

저녁을 먹은 후 게스트하우스에서 짐을 풀고 그곳에서 계명대 교수로 있는 이태훈 박사의 건강강좌를 들었다. 모두들 연세가 연세인지라 진지하고 관심 있게 집중하는 듯 하였다. 지압과 적중의 운동법으로 퇴계 이황의 활인심법을 계승한 듯 하였다. 인기가 있어 이태훈 교수는 시간을 넘어 대구로 돌아가기가 바빴으리라. 누군가 마련한 진주 생막걸리 한 잔으로 만족하며 잠자리로 돌아 왔다.

 

이튿날, 날이 새도 비는 잔잔히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받치고 홀로 진주성을 둘러보았다. 한 바퀴 둘러보고 돌아오는데 같이 동행한 주역 학인 두 분이 이제야 산책을 나오신다. 아무 말 없이 다시 진주성으로 향하였다. 촉석루 루벽에 진한 황고동의 능소화가 뚝뚝 지고 있었다.

 

서장대 위에서 바라보는 남강은 마치 창포 뿌리의 굽은 새우등처럼 굽어도 곧게 흐르고 있었다.

 

간단히 조식을 마치고 남사 예담촌과 유림독립기념관으로 향하였다. 창밖은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으나 선비들의 기개와 항거의 정신을 느끼고 배울 유림독립기념관으로 향하는 마음인지 몰라도 비의 성가심은 들지 않았다. 잠시 눈을 감으니 성성자를 차고 칼을 든 남명 선생의 모습이 환상처럼 아른거린다.

 

경남 산청군 단성면에 다다르자 지리산에서 내려오는 물줄기인 사수천이 독립기념관 앞을 도도히 흐르고 있었다. 며칠 사이에 많은 비가 내려 물살이 거세다. 국운이 기울자 한 맺힌 옛 선비의 비분강개의 굳센 지조인 듯하다. 3.1 만세 운동의 거센 물결과 같이 유림에서도 일제에 거세게 저항하였다. 다만 잘 알려지지 않아 일반인들은 거의가 잘 모르는 사실이다. 유학자이며 독립운동가인 면우 곽종석 선생을 비롯하여 김복환 선생과 심산 김창숙 선생 등 파리장서 운동에 참여한 137인의 유림 선비들의 존영과 문집, 글씨, 유품 등을 모셔 놓은 곳이 산청 단성의 유림독립기념관이다. 이 곳의 관장이신 84세 노령의 손성모 선생의 한 맺힌 얘기를 담담하게 들었다. 남사 마을이 고향이신 선생은 파묻힐 법한 이러한 운동을 후세에 남기고자 백방으로 뛰시어 이 곳 예담촌에 후인의 교육장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교학정신은 상생의 원리이기도 한 것이다. 선생의 노고와 노익장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같은 동네인 예담촌은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제1호로 지정된 전통문화마을이다. 사양정사를 뒤로 돌면 600년이 훨씬 넘은 감나무와 700년 된 매화나무가 아직도 잘 자라고 있으며 마을을 잇는 옛 돌담길의 정취는 어느 곳도 흉내 낼 수 없는 고담의 일품이다. 새로 지은 정자에 올라서니 사수천을 끼고 국악당과 니사재를 비롯한 여러 문화재와 고가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먹거리들도 다양하고 훌륭해 보이나 시간이 없어 아쉬움만 남기고 산천재로 향한다.

 

산천재를 가기 전 먼저 덕천서원으로 갔다. 서원 앞에 바로 도로가 있어 왠지 분주하다 도로 건너에 퇴색한 글씨로 세심정(洗心亭)이라는 현판이 보인다. 마음을 단정히 씻기가 어려울 것 같다. 서원 입구의 오래 된 은행나무도 도로의 소음에 찌들어 보여 내 마음이 안타깝다. 서원의 정문이 시정문(時靜門)인 것이 오히려 유감이다. 비가 내리는 데에도 불구하시고 우리를 위해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의 14대손이라 하시는 조종면 선생이 해설과 강설을 위해 기다리고 계셨다.

 

덕천서원은 도산서원과 더불어 이 땅의 정신을 400여 년간을 이어 온 양대 산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온 종일 내리는 비는 강좌 자리를 만들기가 어려웠다. 그냥 몇몇은 서기도 하여 선생의 얘기를 들었다. 산천재로 가서 남명 선생의 성성(惺惺)의 소리를 듣기로 하였다 어느 누군가 그랬다. 남명 선생을 만나려거든 산천재로 가라!

 

드디어 산천재(山天齋)에 왔다. 이 번이 세 번째다. 산천재는 여럿이 가지 말고 혼자 달이 밝거든 가라 했거늘 할 수 없이 여럿이 왔다. 네 번째는 다시 혼자 오리라. 산천(山天)은 산천(山川)이 아니다. 주역의 26번째 괘인 산천대축(山天大畜)에서 따온 말이다. 풍천소축(風天小畜) 뒤에는 천택리(天澤履)가 따르고 산천대축(山天大畜)뒤에는 산뢰이(山雷頤)가 따른다. 망령됨이 없이 참다운 마음으로써 바른 것을 받아 견고하게 쌓는 것을 대축(大畜)이라 한다. 흙이 쌓여서 큰 언덕을 이루고 학문과 경험을 많이 쌓아서 큰일을 행하는 것이 대축인 것이다. 또한 축(畜)은 ‘쌓는다’는 뜻 외에 ‘그친다’는 뜻도 들어 있다. 그쳐야 쌓음이 이루어지는 것이리라. 남명 선생은 지리산을 옆에 두고 그치며 쌓기를 얼마나 하셨을까? 축덕(畜德)하야 대행(大行)의 도(道)를 행하셨으니 가히 군자야(君子也)라!

 

그럼 그 뒤의 산뢰이(山雷頤)는 또 무엇인가? 크게 쌓아 모아졌으면 잘 길러야 하므로 만물을 기르고 어진 이를 기른다는 이(頤)괘를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아서 산천재에 가서 서기만 하여도 축덕(畜德)이 되는 바이니 산천재에 와봄이 어찌 유익하지 않겠는가?

 

산뢰이의 기운이 함께하여 임진란의 의병장을 그렇게 많이 길러내심이 아닐런가?조종명 선생의 여러 얘기는 접고 산천재의 기둥에 걸린 남명 선생의 시(詩)나 읊어 보리라.

 

 

 

춘산저처무방초(春山底處無芳草)

 

지애천왕근제거(只愛天王近帝居)

 

백수귀래하물식(白手歸來何物食)

 

은하십리끽유여(銀河十里喫猶餘)

 

봄 산 어느 곳인들 향기로운 풀이 없겠냐마는

 

상제가 사는 하늘에 천왕봉이 가까이 다가 가 있는 것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맨손으로 왔으니 무엇을 먹고 살까

 

은하처럼 펼쳐져 있는 십리 물길은 아무리 퍼 마셔도 오히려 남으리.

 

사실인즉 이번 여행의 속내는 남명 선생을 만나는 것이었다. 끽다(喫茶)의 즐거움과 독서의 즐거움에 버금가는 것이 여행의 만남이다. 특히 고인의 풍모를 따라 역사의 줄기를 따라 음풍농월의 묘미를 느껴보는 것이 여행의 맛남이 아니겠는가?

 

이어서 끽다만큼이나 달콤한 망고빙수의 맛도 보고, 최구식 한국선비문화연구원장님의 역량있는 강의에도 깊은 감사를 아니 드릴 수가 없다. 최구식 원장님은 학문 실천의 중요성을 심도 있게 잘 설명해 주셨다.

 

그러고보니 강사님이라 표현하기는 뭐하지만 모두가 다 무대에서 절창하는 가수처럼 자기분야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훌륭한 분들이 아닐까 한다. 충(忠)의 절의가 곳곳에서 배어 나옴을 느꼈다. 김향점 선생은 차나무는 옮겨가면 죽는다 하며 여인의 정절로 삼는다는 상징적 애기와, 김익재 선생의 논개의 충의와 , 조종명 선생의 의병의 절의에 대한 얘기등은 물론이고 양수영 선생의 진주비빕밥, 진주냉면 얘기도 양념의 맛처럼기억에 남는다.

 

진주비빕밥은 육회가 들어가는데 전주비빕밥처럼 뜨겁게 음식을 할 수가 없는 것은 전쟁 중에 먹어야 하는 애환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며, 진주냉면은 옛 기생들이 먹던 간식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숭고한 마음으로 다음에 진주에 들리면 먹어 봐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선산향교의 여러분을 포함하여 진주향교의 여러분과 성심껏 강의를 해 주신 여러분에게 고마움 전하며, 특히 구석구석 알차고 보람 있도록 먹거리, 볼거리, 익힐 거리를 기획해 주신 양수영 님에게 큰 고마움을 전한다.

 

다시 찾고 싶은 진주가 되게 해 주셔서 무한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