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림시론

특별기고 - 바위에 새겨진 각자(刻字)에서 역사를 배운다② 면암 최선생(勉庵 崔先生), 춘추대의 일월고충(春秋大義 日月高忠)을 찾아서

송진모 / 부산시 주재기자,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부산해관(釜山海關, 1907.4.12. 稅關으로 개칭)의 출발은 1883년 7월3일 동광동(本町) 2가 3번지 소재 일본인 가옥을 빌려 개청한 데서 시작된다. 초대 해관장 영국인 Lovatt(약 2년반 근무), 2대 해관장 프랑스인 T.Priy, 3대 해관장 영국인 J.Hunt는 1898년 2월까지 1

송진모 기자 2019. 8. 27.

 

송진모 / 부산시 주재기자,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부산해관(釜山海關, 1907.4.12. 稅關으로 개칭)의 출발은 1883년 7월3일 동광동(本町) 2가 3번지 소재 일본인 가옥을 빌려 개청한 데서 시작된다. 초대 해관장 영국인 Lovatt(약 2년반 근무), 2대 해관장 프랑스인 T.Priy, 3대 해관장 영국인 J.Hunt는 1898년 2월까지 10년간 근무 후, 홍콩으로 전출되었다.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국권이 위태로웠던 그 당시 일본의 간섭을 막기 위해 해관장(海關長)을 한동안 조선정부와 통상조약을 맺은 영국, 프랑스, 이태리, 독일 등 외국인을 고용해서 해관의 일을 맡기고 있었다. 일본인이 처음 맡기 시작한 것은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정권이 일제의 손으로 넘어간 후인 1906년 5월부터이다.

 

1888년부터 10년 동안 영국인 J.Hunt가 부산해관장으로 있을 때, 거주한 곳은 지금은 바다를 메우느라 산이 깎여 없어진 영주동의 영선산(營繕山) 기슭의 영국 영사관 조차지(租借地) 안의 관사였다. 숲이 우거진 한적한 관사에 해관장 헌트 부부와 외동딸 등 세 가족이 살고 있었는데 집안일을 보는 잡역부(雜役夫) 겸 서생(書生)이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헌트집에 채용된 사람이 권순도(權順度)로 양산군 상북면 대석리 출신의 23세 청년이었다.

 

J.Hunt 해관장이 홍콩으로 전출 후, 권순도(權順度)는 부산에서 상점을 내었는데 헌트의 도움이 있었다. 권순도 상회는 동광동 4가의 번화가에 있었고 주거래 상품은 포목이었다. 장사가 잘 되었으며 부산 상무사(商務社)의 회원으로 활동도 하였다. 이 상무사는 영남(嶺南)과 호남(湖南) 간의 점잖은 상인들의 상무를 의논하는 곳인데 사장 이유명(李裕明), 사무장 김영규(金永圭)였다. 상무사는 1899년 상업과 국제무역, 기타 상행위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던 기관으로 전국 보부상단의 업무도 관장하게 되었고, 그리고 상무사 회원들은 면암 최익현 선생이 대마도에 유배되었을 때 그를 뒷바라지하기 위해 대마도를 오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편의를 제공하였다.

 

대마도에서 단식 투쟁 끝에 순국(1907.1.1)한 의병장 면암 최익현 선생의 부음(訃音)를 듣고 부산 상무사 사무장 김영규는 모든 사원과 함께 사무를 전폐하고 망곡(望哭)한 다음, 큰 글씨로 ‘면암 최선생 호상소(勉庵 崔先生 護喪所)’라 써서 문 위에 걸었다. 11월 21일 영구(靈柩)가 부산의 초량 상무사(요즘의 상공회의소)에 안치되었다. 그리고 상무사 사원(社員)을 분정(分定)하여 상구(喪具)를 준비하였으며, 권순도(權順度)는 유진각(俞鎭珏), 이유명(李裕明)과 함께 호상(護喪)을 맡았다. 11월22일 유해가 안치된 초량의 상무사에서 유교의식에 따라 성복(成服)의 예를 올리고 23일에 발인하였다. 대거(大擧), 영차(盈車)와 짐꾼은 모두 상무사에서 전담하였다고 기록으로 전한다.

 


 

 


 

한일병합으로 나라가 망하자 권순도는 부산의 포목 상점을 그만두고 고향인 양산 상북면 대석리로 돌아갔다. 낙향한 우국지사 권순도는 그가 숭배한 의병장 면암 최익현 선생을 추모하는 일을 하였다. 의충단을 쌓고 홍룡사 계곡에 ‘면암 최선생 춘추대의 일월고충(勉庵 崔先生 春秋大義 日月高忠)’, ‘제일강산(第一江山)’라는 글자를 바위에 새겼다. 이곳을 추모소로 삼으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항일사상을 은연중에 불어넣었다.

 


 

 


 

그리고 홍룡폭포를 알리기 위해 길목 일심대(一心臺) 위 석비(石碑) 3면에 '세계인 환영비(世界人 歡迎碑)' '명승 홍룡폭포(名勝 虹龍瀑布)' '창립인 권순도(創立人 權順度)'라는 비를 세웠다. 영국인 해관장인 헌트의 딸을 사랑한 국제적 러브 스토리의 주인공답게 홍룡폭포를 안내하는 비석에 세계인 환영이라 새긴 것이다.

 

가홍정(駕虹亭)은 천성산 홍룡사 앞쪽에 위치한 정자로서 양산 대석에 살던 가선대부 석은(石隱) 이재영(李宰榮)은 노병이 치유되고 난 66세이던 1918년에 자신의 소유지였던 홍룡폭포 아래에 죽우(竹友) 권순도(權順度)와 같이 정자를 세우고 많은 이들이 함께 절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이재영이 저술한 가홍정원운병서(駕虹亭原韻幷書)에 가홍정의 건축 내력이 있으며, 칠언율시의 한시(漢詩)로 주변의 빼어난 풍광을 묘사하고 있다.

 

석은 이재영의 원운(原韻)을 소개해 본다.

 


 

聖山如畵洞天靑 천성산 그림같고 골짜기는 깊어 푸른데

 

一派虹流霹巨靈 한줄기 폭포 무지개에 큰 신령이 소리치네

 

別地雷虹淸晝雨 별천지 우뢰소리 맑은 대낮에 비가 내리고

 

危巖花笑春雲屛 높은 바위 꽃이 웃고 저문 구름은 병풍을 두르네

 

數楹拙搆堪貽累 몇개 기둥으로 든 집은 누추함을 면치 못해도

 

半世塵愁可喚醒 반평생 세속 수심을 불러 깨우쳐 줄 만하다

 

多謝東南行過客 동남으로 가는 과객에게 무척 감사하노니

 

登臨衿珮摠蘭馨 등림하는 선비들은 모두 난초 향기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