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속담에 “꿩은 머리만 풀에 감춘다”라는 말이 있다. 어린아이가 자기 눈을 가리고선 아무도 자기를 못 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잘못한 일이나 결점 등을 일부만 감추고는 전부를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빗대는 말이다.
중국 속담에도 “罵來不開口 打來不動手”라는 말이 있다. 번역하면 “욕을 해도 입을 열지 않고, 때린다 해도 손을 쓰지 않는다”는 말로 “무대응이 최선의 대응이다”라는 뜻이다.
지금 (사)한국관광학회의 유교문화활성화지원사업을 보면 이만큼 잘 어울리는 말도 없는 듯하다. 제기된 의혹들 대부분이 사실이라 어설픈 변명은 또 다른 의혹을 낳고, 사업단에 참여했던 인사들의 증언과 제보까지 잇따라 딱히 반박할 수도 없는 처지니 아예 묵묵부답이다.
지금까지 드러난 유교문화활성화지원사업의 민낯은 그야말로 비리 종합백화점이다. 성균관이 정상적 상황이었다면 유교문화활성화지원사업은 사업계획 표절에서부터 국고보조금 횡령까지 드러난 사실과 의혹만으로도 사달이 나도 벌써 났어야 할 사업이다.
유교를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했던 이들이 저지른 일들은 표절이나 횡령에만 그치지 않았다. 이들은 유교아카데미를 한다며 유교인문학이니 양명학이니 하는 말장난으로 성균관과 향교의 정체성마저 무너뜨리려 했다.
성균관과 향교의 대성전에는 孔子를 주벽으로 四聖, 孔門十哲, 宋朝六賢, 東國十八賢이 배향돼 있다. 성균관과 향교, 유림의 정체성은 문묘에 배향된 이들 先聖先賢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이는 바로 성균관과 향교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삼국사기』「신라본기」를 보면 신라 성덕왕 16년(717)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守忠이 돌아오면서 문선왕(공자)과 10哲 72弟子圖를 가져와 왕에게 바쳤고 이를 곧 太學에 안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문묘를 세웠다면 배향이 있기 마련이다. 중국의 예에 따라 10철 72제자들을 모셨던 모양이며 우리의 賢哲이 그 자리에 오르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고려로 들어오자 곧 우리의 현철이 配位에 오르게 된다. 문창후 최치원이 그 첫 번째의 영예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현종 11년(1020)의 일이다. 뒤이어 설총이 홍유후로 봉해지면서 先聖廟庭에 從祀되는 영예를 얻어냈다. 이후로 성리학을 수용하기까지 더는 문묘배향이 없었다.
설총에 이은 배향은 연대가 훨씬 내려와서 문성공 안향이 되며 충숙왕 6년(1319)에 종사된다. 고려에서는 초유의 일이다. 안향은 신유학으로 일컬어지는 정주학의 도입자임을 감안한다면 道統과 무관할 수 없다. 조선으로 들어와 1398년 성균관 창건 후 중종 12년(1517) 문충공 정몽주가 배향되며 도통으로 표현되는 그 정체성을 분명히 한다.
반면 양명학은 이 같은 성균관과 향교의 정체성을 송두리째 부정한다. 양명학은 주자학을 비판하고 부정하며, 심지어 왕양명은 주자의 설을 홍수와 맹수에 비유하기도 했다.(『전습록』「答羅整菴少宰書」)
이 때문에 일찍이 퇴계 이황은 왕양명에 대해 “窮理의 학문을 배격하려 해 朱子의 설을 홍수와 맹수의 재해와 같다고 배격하고, 繁文의 폐단을 제거하려 해 진시황이 책을 태운 것을 孔子의 刪削한 뜻에 맞다고 하였다”며 “만약 이런 사람이 임금의 신임을 얻어 그 뜻을 편다면 이 학문과 이 세상의 화가 진나라보다 어디가 더 심할지 알 수 없다. 邪說이 사람을 빠뜨리는 것이 한결같이 이런 지경에 이르니 매우 탄식할 일이다”라고 배척하였다. (『퇴계선생문집』 권41 「白沙詩敎傳習錄抄傳因書其後」)
율곡 이이 역시 “(왕양명은) ‘주자의 해독이 홍수나 맹수의 화보다도 심하다’고 말하였으니 그의 학문을 알 수 있다”며(『율곡선생전서』권31 「語錄」), 양명학을 邪術이라고 배척하였다. (『율곡선생전서』 권13 「學蔀通辨跋」)
지금 세상에 주자학을 공부했건 양명학을 공부했건 무슨 시비가 있을 리 없고, 양명학도 중국이나 우리나라 유학사의 한 면을 장식하고 있으니 이론이 있을 리도 없다.
하지만 성균관과 향교라는 공간으로 들어오게 되면 문제가 달라진다. 성균관과 향교는 法古創新의 정신으로 문묘에 배향된 선성선현의 가르침을 받들어 실천하는 공간이지 일반 교양강좌나 동양철학 일반을 가르치는 강의실이 아니다. 문묘의 선성선현을 부정하는 양명학이 들어와 자리할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문묘에 배향된 선성선현에 뿌리를 둔 성균관과 향교의 이념과 경서 해석 등은 모두 道統으로 범주화된 조선성리학의 전통을 기반으로 한다. 하지만 양명학에서의 도통 관념과 經書 해석은 6백년 넘게 이어온 성균관과 향교의 의례 전통을 부정하고 四書集註에 기반을 둔 경서의 정통 해석도 부정한다.
왕수인의 호를 따 양명학이라고 부르듯이 주자학도 굳이 晦菴學이라 불러야 한다고 하고, 양명학을 비판했다 해서 퇴계를 폄훼하고, 기호양명학 운운하며 율곡을 견강부회하면서 성균관과 향교의 유림이라 자처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일찍이 100여 년 전 암울했던 시기에 양명학을 표방하며 성균관의 문을 두드렸던 일단의 인사들이 있었다. 물론 이들은 성균관의 문턱에 발을 걸칠 수도 없었다. 이들은 양명학으로 주자학을 비판하면서 여기에 서구 종교를 뒤섞어 교리를 구성하고 세계 종교를 주장했으나 결국은 신흥종교의 길로 빠지고 말았다.
최근에 비슷한 일들이 성균관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다. 과거에는 그나마 구국의 염이라도 담고 있어 시대적 의미를 엿볼 수 있으나 지금은 전혀 그런 것도 아니다.
성균관에서 느닷없이 양명학 논란이 벌어지게 된 배후에는 (사)한국관광학회의 유교문화활성화지원사업 관련자들이 있다. 이들은 사업 비리, 국고보조금 횡령 의혹, 자기 스승을 해친 패륜 등 양파껍질 까듯 드러나는 추한 민낯을 감추기 위해서는 성균관과 향교의 정체성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게 이롭다고 생각한 것 같다.
성균관장 선거 일정이 확정되고 성균관 정상화가 가시화되자 이들은 성균관장 선거에 개입하려 준동하고 있다. 이들의 사업 비리와 국고보조금 횡령 의혹 등은 수사기관에서 조사해 밝히면 그만이겠지만, 혹여 성균관과 향교의 정체성이 무너진다면 이제는 어찌 할 도리가 없게 된다. 百尺竿頭에 선 심정으로 성균관의 정상화를 바라는 전국 유림들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이상호 /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