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림시론

일천원권 지폐에 얽힌 불편한 진실

결론부터 말하면 ① 퇴계 이황 선생께서는 복건(幅巾)을 쓰신 적이 없다. ② 일본인의 사진 한 장으로 명륜당의 앞문을 없애버린 것은 문화재청과 한국은행의 만행이다. ③ 명륜당 서쪽에 세워진 비석에 대한 진실을 이제라도 국민에게 바로 알리자. 퇴계 선생하면 우리 국민들은 지폐에 실린 심의와 복건을 쓴 분을 연상하게 되지만 여기에는 심각한 오류가 있다. 복건은

편집부 2015. 9. 11.

 


 

결론부터 말하면 ① 퇴계 이황 선생께서는 복건(幅巾)을 쓰신 적이 없다. ② 일본인의 사진 한 장으로 명륜당의 앞문을 없애버린 것은 문화재청과 한국은행의 만행이다. ③ 명륜당 서쪽에 세워진 비석에 대한 진실을 이제라도 국민에게 바로 알리자.

 

퇴계 선생하면 우리 국민들은 지폐에 실린 심의와 복건을 쓴 분을 연상하게 되지만 여기에는 심각한 오류가 있다. 복건은 반드시 정자관(程子冠)으로 바꿔야 할 것이다.

 

이는 학봉 김성일 선생의 <퇴계선생언행록>, 동암 류장원 선생의 <상변통고> 사계 김장생·신독재 김집 선생 부자의 <의례문해> 등을 보면 그 내용을 확연히 알 수 있다. 내용이 대동소이하므로 학봉 선생의 글을 아래에 인용한다. 

 

"김취려(金就礪)가 복건(幅巾)과 심의(深衣)를 만들어 보내자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복건은 승(僧)들이 쓰는 두건과 같아서 쓰기에 온당치 못한 듯하다' 하고는, 심의를 입고 정자관(程子冠)을 썼다. 말년에 재에 거처할 적에도 이렇게 하였는데, 손님이 오면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 (金就礪造幅巾深衣以送 先生曰 幅巾似僧巾 著之似未穩 乃服深衣 而加程子冠 晩年齋居如此 客來則改以常服焉)"

 

또한 문화재청과 종로구청은 성균관과 사전 상의도 없이 명륜당의 앞문을 전부 헐어버렸다. 근거 자료는 일본인 세키노 다다시의 사진 한 장이 전부라고 하니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그러면서도 입으로는 영정조 때의 원형을 회복하겠다고 아우성이다.

 

여기서 하나 반드시 짚고 넘어갈 일이 있다. 현재의 『태학지(太學志)』에 나오는 반궁도가 『태학지』가 처음 발간된 정조 때의 기록이라고 보는 것은 분명한 오류이다. 이 반궁도가 정조 때의 것이 아님은 태학계첩(1747년)만 보아도 분명히 알 수 있다.

 

현재의 반궁도는 1932년에 명륜학원 학생들이 필사하는 과정에서 첨가된 것이라고 양대연 교수는 증언하고 있다. 증언을 떠나서 태학지에 소개된 건치(建置)의 내용과 그림은 전혀 맞지 않는다. 봉안위차도에 고종 연간(1883년)에 모셔진 중봉 조헌 선생과 신독재 김집 선생이 그려져 있는 것만 보아도 나중에 가필(加筆)됐음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관에서 실시하는 모든 성균관 복원 자료는 모두 이 잘못된 자료에 근원을 두고 있다.

 

정말로 정부가 원형을 복원시킬 의지가 있다면 일제 강점기에 의해 새로 지어진 동서재부터 전부 헐어내고 각각 7칸으로 다시 짓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처음 지폐를 도안하는 과정에서 명륜당 월대의 서쪽에 세워진 비석에 대한 문의가 있었다. 당시 학계의 전문가들조차 유래를 알 수 없다고 했었다.

 

몇 년간의 전적(典籍)을 찾는 수고 끝에 이는 고종 8년(1871년)에 서원 철폐의 당위성을 태학에 유시(諭示)한 글임을 알게 되었다. 어렵게 찾은 비석의 글과 고증의 근거들을 한국은행에 보냈으나 이 내용은 전혀 홍보되지 않은 상태로 묻혀버렸다.

 

백보 양보하여 애초에는 몰랐을 수도 있다고 하자. 그렇지만 밝혀진 내용조차 국민에게 알리지 않는 것 또한 무성의의 극치이다. 관계 당국은 이제라도 잘못된 점들을 바로잡고 유교문화에 대한 인식을 제고(提高)하기 위해 유교 전문가를 비롯한 사계(斯界)의 전문가들을 모아 대책을 수립해야 할 것이다.

 

방동민 (무형문화재 제85호 석전대제 이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