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정 현판과 향안, 단소다. 향안에 '참봉 신기운'이라 기재돼 있다.
1618년(戊午年) 기장향교향안(機張鄕校鄕案)에는 팔가십삼인(八家十三人)의 내향문중 선대의 성명 3자가 등재되어 있다.
그 중에 기장군 정관읍 가동마을 뒤 양지바른 야산에 위치하고 있는 사당이 하나 있다. 이곳이 바로 다산단(茶山壇)이다. 임진왜란 때에 공신 신옥(辛沃) 선생의 장남인 신기운(辛起雲)과 그 아래 월천(月泉) 신오(辛澳) 선생을 모시고 해마다 3월20일 향례(享禮)를 모시고 있다.
양력 4월25일 해가 저물어 갈 즈음에 다산단을 찾았다. 마침 기장향교 원임 장의인 신해동 유림이 반갑게 맞아주며 문을 열어 주었다.
다산단(茶山壇)은 2003년도에 산업화의 바람에 편승하여 결국은 개발계획에 의거 사우(祠宇)가 헐리게 되는 안타까운 일이 생겼으나 후손들의 숭조정신(崇祖精神)에 입각(立脚)하여 다시 단(壇)을 세우게 되었다.
새롭게 단을 정비해 다시 세운 곳이 정관읍 방곡리이다. 선대를 모시고 새롭게 복원하기 위해 준비에 박차를 가한 시기(2005년, 을유년)에는 유림제(儒林祭)가 아닌 문중제사로 향사(享祀)를 봉행하기도 했다.
신옥(辛沃) 공은 영월신씨정관입향조이며 경기도 파주에서 출생했다. 이곳 기장 정관과의 인연은 부산진첨절제사로 정발 장군의 휘하에서 근무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기장향교향안에는(1618년 무오년) 신옥 공의 아들인 신기운(辛起雲) 공의 이름이 세 번째에 “참봉 신기운(參奉 辛起雲)”이라 올라 있다.
1592년 4월13일 정발 장군이 대규모의 왜군 공격에 순절하고 신옥 공 역시 왜군에 항거하다 장렬히 순절할 때에 신기운의 나이 불과 13세였다.
13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전투에 참전하였으나 그만 왜적의 포로가 되어 절치부침(切齒浮沈) “하난도해사의장부모방(何難渡海死宜葬父母邦)”의 글귀로 각오하고 19세에 왜국에서 탈출하여 영남의 거유(巨儒) 한강 정구(寒岡) 정구(鄭逑)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修學)했으며 예빈시참봉(禮賓寺參奉)이 되었으나 이를 사양했다.
후(後)에 신옥 공은 통정대부공조참의(通政大夫工曹參議)에, 신기운은 승사랑(承仕郞) 예빈시참봉(禮賓寺參奉)에 증직(贈職)되었다.
한편 세상 사람들은 신기운을 눌은(訥隱) 선생이라 칭(稱)했으며, 그의 직계 후손으로 기장고을의 거유(巨儒)인 월천(月泉) 신오(辛澳) 선생이 있다.
다산단에는 정위에 다산 선생이, 동쪽에 눌은 선생, 서쪽에 월천 선생의 비를 모셔 단을 세웠으며 매년 3월20일에 유림제로 제향하고 있다.
월천 신오 선생은 정관 사람으로서 용산재라 명한 서당에서 유학을 가르쳤으며 신옥 공은 효자로 삼강록(三綱錄)에 등재된 인물이기도 하다.
다산단에서 봉독되는 축문의 내용은 능히 숭덕과 숭조의 정신(崇德崇祖精神)이 내용으로 담겨져 있으며 경임록(經任錄)에는 1984년 갑자년에 기장향교 원임전교이신 고 안영표 유림이 단장으로 원임장의이신 고 오재순 유림(故 吳載淳儒林)이 향유사(鄕有司)로 1986년 병인년까지 3년에 걸쳐 봉사했으며 영월문중의 선대를 모시는 정성과 유림들의 정신은 후대에 일러 증자께서 말씀하신 신종추원민덕귀후의(愼終追遠民德歸厚矣)의 표상이 되리라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