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산노리에는 앞에는 탑정저수지가 있고 뒤에는 갈마산을 주산으로 하는 배산임수(背山臨水) 지형에 효암서원(孝巖書院)이 위치하고 있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87호인 효암서원은 은진현 갈마동(葛麻洞)에 갈산사((葛山祠)로 세워졌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숙종 39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 서원으로 다시 세워지게 되었다. 처음에는 강응정(姜應貞)만을 독향(獨享)하였으나 후에 서익(徐益), 김문기(金文起), 김성휘(金成輝), 양응춘(楊應春), 남준(南俊), 김필태(金必泰) 등을 추배하였다. 고종 4년에 서익이 분봉(分奉)하여 행림서원에 독행되자 나머지 6현인만 제향하게 되었다.
1871년(고종 8년)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25년에 복원하였다. 서원을 구성하고 있는 건물로는 갈산사(葛山祠) 현판의 사우(祠宇)와 제관들의 숙소로 이용되었던 동재(東齋) 및 모현재(慕賢齋)란 현판의 서재(西齋)와 효의문(孝義門)의 현판이 걸린 외삼문과 삼창문(三昌門)의 현판이 걸린 내삼문 및 효암서원 원정비가 있고, 외삼문 옆에는 강응정 선생의 정려가 있다.
강응정(姜應貞)의 자는 공직(公直)이며, 호는 중화재(中和齋), 본관은 진주(晉州)다. 강응정(姜應貞)은 어머니가 오랫동안 병을 앓자 두 달 동안 옷에 띠를 풀지 않고 정성으로 간호를 했고, 또 아버지의 병세가 위급해지자 아버지 대신 자기를 아프게 해달라고 하늘에 빌고, 똥을 가져다가 맛보아 병이 덜하고 더한 것을 점쳤으나, 끝내 부모가 사망하자 5년 동안이나 여묘(廬墓) 살이를 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성종이 친필로 “효자성균생원강응정정려(孝子成均生員姜應貞旌閭)”의 사액현판을 내려주었다. 이 현판이 외삼문 밖 강응정 선생 정려 안에 있다.
강응정의 효심에 대한 일화가 있다. 어머니가 병석으로 누워 있던 어느 날 갑자기 어머니가 생전 처음으로 들어 보는 “을문이” 이라는 물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였다. 하지만 당시는 엄동설한으로 고기를 구하기도 힘들어 정한수를 떠놓고 정성을 다해 며칠을 빌자, 갑자기 하늘에 먹구름이 일고 소나기가 오더니 물고기 한 마리가 하늘에서 떨어졌다. 강응정은 얼른 그 고기를 주워 배를 갈라 고깃국을 끓여 드렸다고 한다. 내장을 인근 냇가에 버렸는데 알이 부화되어 양촌면 인천리 냇가와 탑정저수지에 서식하게 되었다 한다.
성종 9년에 주계군 이심원은 중종에게 국가의 정황을 상소하면서 “세조 때의 훈신을 쓰지 말고 정여창(鄭汝昌), 정극인(丁克仁), 강응정(姜應貞) 등은 성현(聖賢)에 속하니 서용하는 것이 좋겠다.”고 강응정 등을 천거하였다.
중종 5년에 영사 성희안이 아뢰기를, “조종조(祖宗朝)에는 명유(名儒)가 있었는데, 그는 학술의 조예가 깊고 또 효행(孝行)이 있어서, 사류(士類)가 모앙(慕仰)하여 모여서 스승으로 삼았는데, 그가 강응정”이라 하였다.
백촌 김문기(金文起)는 조선초기 문신으로, 자는 여공(汝恭). 호는 백촌(白村). 초명은 효기(孝起). 본관은 김녕(金寧)이다. 세종 8년에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예문관 검열을 시작으로, 병조정랑, 병조참의, 좌부승지, 공조판서 등을 제수 받았고, 세조 2년에는 활솜씨 대회에서 활을 잘 쏘아 부상으로 활과 화살촉 및 환도(環刀)를 하사 받았으며, 충의(忠毅)의 시호를 받았다. 장릉(莊陵) 배식단에 배향되었다.
1456년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이 주동한 단종복위(端宗復位)의 모의에 가담하였다가 발각되자 고문에 굴복하지 않다가 백관(百官)들이 보는 앞에서 거열(車裂)되고 3일 동안 효시(梟示)되었다.
1981년 서울시와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김문기를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현창하고, 그의 가묘를 서울시 노량진 사육신묘역에 설치했다.
오강 김성휘(金成輝)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자는 입부(立夫), 호는 오강(梧岡), 본관은 광산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 조헌과 더불어 의병을 모집하는데 많은 재산을 희사하였다. 임진왜란 후 임천(林泉) 군수와 동래부사를 제수하였으나 취임치 않았다. 그 후 조정에서 포상하여 형조참의(刑曹參議)를 제수하기에 이르렀다. 95세의 수를 누렸다.
도곡 양응춘(楊應春)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다. 자는 인경(仁卿), 호는 도곡(道谷), 본관은 청주다. 회덕현감을 지내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조헌(趙憲)을 따라 청주에서 왜군을 무찔렀고, 이어서 금산 전투에 참가하여 왜군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실록에는 조헌과 함께 전사한 참모는 양응춘을 비롯하여 19명이다. 이조참의로 증직되고, 1720년 충신으로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매계 남준(南俊)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다 본관은 의령(宜寧), 호는 매계(梅溪)이다. 장예원판결사를 역임하고, 임진왜란 때 의병장 조헌(趙憲)의 휘하에 들어가 청주전투에서 왜군을 무찌르는데 공을 세웠다. 이어 금산전투에서 왜군과 교전하다가 조헌과 함께 전사하였다.
둔암 김필태(金必泰)는 조선 후기 논산 출신의 효자다.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대래, 호는 둔암(屯庵)이다. 김필태는 향리에서 후학들을 교육하여 인재를 양성하였으며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여 돌아가신 뒤에도 성묘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을 안 감사의 추천으로 사헌부감찰과 영릉령을 지냈다. 1811년(순조 11) 문인인 황언진(黃彦鎭) 등의 편집을 거쳐 손자인 김광옥(金光鈺)에 의해 간행된 『둔암집(屯庵集)』이 있다.
이덕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