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선(성균관대 무용학박사)
코로나19로 극장은, 문화예술계는 큰 변화를 겪고 있다. 예정되어 있던 공연들이 속속들이 연기·취소되기도 하고, 온라인 플랫폼의 영상공연이나 무관객으로 실시간 상영하는 시스템으로 대체되기도 한다. 기존에 당연히 여기던 것에 브레이크가 걸린 상황이다. 극복해야 할 문제가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는 세계적인 재난으로 모두가 힘든 상황이라는 점에서 위안 삼아야 할까? 자력이 아닌 타력에 의한 제한은 불행하고 위태롭다. 사회적 입지 확보를 위해 고민의 끈을 놓아본 적이 없는 문화예술계는 급변하는 환경에 특히 위태로운 실정이다.
춤 전용 소극장 두리춤터(예술감독 임학선)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발발한 2020년 상반기에 계획했던 공연들을 워크숍, 쇼케이스, 좌담 등 다양한 방법으로 대체했다. 안전수칙이 생활화된 지금, 두리춤터는 안전에 각별히 신경을 쓰며 공연을 재개했다.
‘청춘대로 덩더쿵’은 신진예술가를 육성하는 사업으로 재단법인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이 주최·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후원·두리춤터가 주관하는 프로그램이다. 두리춤터에서는 2015년부터 이 사업을 시작해 올해로 5번째 개최된다. 두리춤터가 주관하는 ‘청춘대로 덩더쿵’은 약 5개월 동안 창작과정을 지원하며 신진예술가들에게 실험적 과제를 풀어내는 데 다방면으로 도움을 보탠다. 그간 총 41명의 안무가가 참여하였다. 몇 작품은 해외무대로 진출하여 한국창작춤을 알리며 호평 받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현대의 한국춤이지만, 한국 전통예술에 기반 한 우리의 창작춤과 음악이기 때문에 해외에서 더욱 매력적인 요소로 작용한 것임이 자명하다.
2020년 ‘청춘대로 덩더쿵’은 안무가 김도은과 상자루의 음악, 안무가 양한비와 목기린의 음악, 안무가 박철순과 조봉국의 음악, 안무가 류일훈과 안태원 음악의 협업으로 10월 7일부터 16일까지 두리춤터에서 진행되었다.
두리춤터는 두 개의 무대를 보유하고 있다. 하나는 지층에 위치한 Black box 극장이고, 또 다른 하나는 Foyer 극장이다. 포이어 극장은 두 층을 터서 복층구조로 만들어져 천고가 높아 소극장임에도 불구하고 트여있는 느낌을 준다. 또한 1. 2층 무대 뒤편 대부분을 차지하는 커다란 미닫이문과 복도식 통로가 있어 무대 연출에 공간을 활용할 요소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10월 9-10일에 걸쳐 공연된 양한비의 <닭장>과, 10월 11-12일 박철순의 <마츠리>는 두리춤터의 포이어 극장에서 막이 올랐다. ‘안전’의 가치가 최우선이 된 요즘, 공연장의 관객석에 띄엄띄엄 부착되어있는 금지의 표식은 이 시대에 숙명적인 시그널이다. 주어진 좌석에 앉아 무대를 바라보니 경건한 마음이 든다. 텅 비어있는 무대조차 숙연함이 깃들어 보이는 것은, 이 어려운 시기를 관통하여 노력을 거듭한 예술가와 극장장의 정신이 서렸기 때문일 것이다.
양한비 안무 <닭장> _ 아름다운 울타리 안에서의 소리 없는 아우성
양한비 안무·목기린 음악의 <닭장>은 10월 9-10일에 걸쳐 공연되었다. 빠알간 꽃이 1층 무대 앞에 테두리를 형성하고, 2층 난간에는 4명의 무용수가 난간에 앉아 있다. 그들은 흰색 상·하의에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정갈하게 5:5 가르마를 타서 머리를 싹 빗어 넘겼다. 검은 무대에 빨간 소품, 그리고 흰 의상을 입고 움직이는 무용수들은 한눈에 봐도 보기 좋게 대비를 이루는 조합이다.
극장 2층 좁은 통로를 지나 개폐형 문으로 연결되는 곳에 계란판을 든 1인의 무용수가 우두커니 서 있다. 문밖을 나서려는 행인들은 계란판 소녀의 주변을 맴돌아 지나치며 본인들의 갈 길을 간다. 의도했든, 그렇지 않았든 계란판을 들고 있는 무용수는 사람에게 치이는 희생양이 된다. 모두 문밖을 나선 후 그 옆 커다란 미닫이문이 천천히 열리며 두 명의 악사가 등장한다. 안무가 양한비와 협업한 작곡 및 연주가 목기린(박준형)과 신지훈이다.
전통음악판과 함께 전통혼례가 펼쳐진다. ‘현대판 정재(呈才)’, 옛 궁중음악에 맞춰 한국전통무의 춤사위를 간결하고 절도 있는 동작으로 재해석했다. 시기는 현대지만 그 옛날 여성에게 부과된 정신수양과 몸가짐을 익히는 과정을 연상시킨다. 두 손을 모으고 다소곳이 고개 숙여 절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못해 처연하다. 단 한 번도 앞을 내다보지 못한 신부가 고개를 들어 앞을 응시하는 순간, 닭이 우는 “꼬끼오~” 소리와 함께 암전된다. 호남지역에서는 며느리가 닭의 머리를 먹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라는 속담처럼 여자의 목청이 크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혼례를 치루는 여성이 당당히 고개를 들어 앞을 내다보며 소리를 낸다? 이것은 앞으로 펼쳐질 양한비의 <닭장>의 서막이다.
암닭이 산란을 한다. 관객과 등진 뒷모습의 윤민정은 그랑쁠리에(grand plié)를 하고 맞잡은 두 손을 가랑이 사이로 내밀며 알을 낳는 모습을 표현한다. 힘주어 내려앉으며 모았던 손가락을 펼치는 반복적인 동작은 산란하는 암탉을 묘사함과 동시에 인간 내부의 것을 배출하며 본능을 해소하기 위한 재치 있는 몸짓이었다. 윤민정이 상징하는 것은 ‘폐백닭’이다.
폐백닭은 신부가 시부모에게 올리는 닭으로 자손번영을 의미한다. 동시에 온갖 정성으로 알을 품어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병아리를 기르는 암탉처럼 다산과 한없는 자식 사랑을 염원하고 있다. 그 시절 자손의 번영은 인간사 최대의 이슈였다. 그래서 폐백닭은 관습적으로 폐백 음식 중 가장 화려하게 치장한다. 닭이지만 봉황처럼 치장하는 것은 딸을 봉황처럼 꾸며 시집보내니 예쁘게 봐달라는 친정엄마의 마음을 대변한 것이라 한다. 목청껏 소리 내서는 안 되는 암탉 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것 보다 화려하게 치장하는 폐백닭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윤민정은 폐백닭을 재치 있게 풀어냈다. 높게 치솟은 닭벼슬과 형형색색 꼬치로 장식한 꼬리를 현란한 손가락 놀림으로 표현한다. 닭 특유의 목놀림과 발놀림, 날개짓 또한 그녀의 위트 있는 동작으로 묘사되었다. 신체의 관절을 분절하고 연결시키며 자유자재로 움직인다. 완전히 자기화한 ‘윤민정표 폐백닭’ 장면은 관중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이번 작품의 서두를 장식했다.
어르신들이 주신 지침에 따라 폐백닭 윤민정은 알을 순풍 낳는다. 생명은 신의 영역이다. 하늘에서 점지 받은 새끼를 잉태하는 마냥, 허미소는 팔을 위로 뻗어 알을 하강시킨다. 그리고 그 알은 윤민정의 몸을 관통하여 계란판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윤민정, 양세인, 허미소, 양한비 4인의 군무에서는 기호화된 움직임들의 조합으로 구성되었다. 남성적인 동작과 여성적인 동작에 대해 고민한 흔적이 보인다. 이분법으로 갈리는 성향의 몸동작을 조합하고 해체하며 어색하게 의도된 춤사위를 나열했다. 가장 특징적인 것은 ‘손가락 놀이’였다. 작품의 시작에서 두 손 가지런히 모으고 수줍게 고개 숙인 여성성은 걷혔다. 가지런히 모은 손은 물결치며 다른 상징을 탄생시켰다. 엄지와 검지를 세워 총을 형상화한 손가락은 서로를 겨누는 총이 되기도 하고, 입 꼬리를 올려 억지웃음을 짓게 만드는 도구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큰 소리 내지 못하게 입을 다물게 하는 금지의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한참을 이 규칙 속에서 헤매다 한 명씩 무대 밖으로 탈락시킨다. 사회적 관습을 어긴, 여성성을 지키지 못한 자에 대한 징계이다.
여성성의 최고봉으로 남겨진 한 명, 양세인은 무대 뒤쪽에 남겨졌다. 지하철의 안내음이 흘러나오며 미닫이문이 열리고, 몇 개의 손이 그녀를 범한다. 아무리 건드려도 그녀는 공허한 표정으로 우둑하니 그 자리에 그대로 버티고 있다. 고발되지 않은 성추행은 물 밑의 빙산일 것이다. 잘못을 저지른 것은 그들인데 누구에게 속 편히 말하기 꺼려지는 것은 이 사회가 만들어 낸 오류이다. 양한비는 <닭장>을 통해 여자라면 한 번쯤은 겪어 봤을 법한 이 시대의 문제를 고발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배가 불룩해진 양한비가 등장한다. 자기를 죽여 가며 뱃속에 품은 생명을 위해 희생하는 여자, 엄마의 삶을 단편적으로 그렸다. 3인의 무용수들은 무대와 연결된 문을 왔다 갔다 하며 달걀을 나른다. 계란 한판이 채워지는 과정은 그리 길지 않았다. 수많은 일들이 순식간에 벌어져도 묵묵히 감당해내야만 하는 여성을 표현했다. 그녀는 가득 채워진 계란 한판을 들고 문밖으로 유유히 퇴장했다.
흥겨운 음악이 울린다. 첫 장면에서 계란판을 들고 서 있는 사람을 맴돌아 지나쳤던 장면의 반복이다. 치고 치이며 모두가 퇴장하고 문은 닫혔다. 의도했든, 그렇지 않았든 계란판을 들고 있는 사람은 또다시 희생양이 되며 변하지 않는 굴레를 보여줬다. 마지막에 문이 벌컥 열리더니 계란판을 그대로 든 양한비가 등장한다. 앞을 응시하더니 계란이 가득 들어있는 계란판을 바닥에 내동댕이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닭장>에서 계란판은 작품을 이끌어가는 주요 소품이다. 여성의 정체성과 책임, 사랑과 희생 등을 전하는 매개체이다. 양한비가 가득 찬 계란판은 놓아버린 것은 여성에게 부과된 사회적 규범의 탈피를 의미한 것이라 여긴다. 숨죽여 지내는 것이 지치고 힘들다고, 목소리를 내며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담은 표현이다. 아마도 일관되게 등장한 계란판을 떨어뜨리는 것이 이 작품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알=자식’이다. 자식이라는 존재는 무한한 사랑이자 막중한 책임이다. 이에 <닭장>의 엔딩은 어미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이들에게는 가슴 철렁한 일이다. 바닥에 떨어져 깨져버린 알은 나의 사랑과 책임을 떠나버리는 것이요, 내 자식의 죽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무언으로 소통하는 춤 예술은 직관적일 수도 있고, 또한 은유적일 수도 있다. 이를 결정하는 것은 안무자의 역할이자 선택이다. 모성애를 품은 한 명의 사람으로서 이 작품의 마지막 장면이 조금은 은유적이면 어땠을지 생각해본다. 기성세대의 고리타분한 생각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계란판 외에 <닭장>을 닭장답게, 또한 여성의 한계와 고뇌를 담은 것이 빨간 카네이션 울타리다. 무대와 관객석을 잇는 테두리에 줄지어 놓은 빨간꽃은 안무가 양한비가 그리는 ‘닭장’이다. 시골 농가의 투박한 닭장이 아니다. 빨간 카네이션이 즐비하게 늘어선 어여쁜 울타리다. '빨강'은 시각적 효과뿐 아니라 내포하고 있는 코드마저 강렬하다. 빨강은 안전의 의미로 금지와 경고를 뜻한다. 함부로 넘어서지 말아야 할 울타리의 의미와 일치한다. 심리적으로는 정열과 광기를 뜻하고, 피·혁명을 상징한다. 오랜 전통적 시각에서 사회적으로 인지되는 남성성과 여성성의 틈새에서 빨강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필자가 보는 양한비 <닭장>에서 빨강은 표면적인 아름다움을 넘어 억제되어있는 여성의 열정·욕구와 부합하고, 심심찮게 사회적으로 성적 대상화되는 여성을 암시한다. 등장인물들은 작품의 시작부터 끝까지 한 발자국도 울타리를 벗어날 시도조차 하지 않지만, 그랬기 때문에 현실과 이상의 끈을 져버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정해진 테두리 안에서만큼은 마음껏 나래를 펼칠 자격이 있다는 현실감각을 담아냈다.
양한비의 <닭장>은 페미니즘적 성향을 띈다. 여성과 남성의 관계를 살피고, 사회적으로 억압되어있는 여성성을 벗어나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자 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여성의 고뇌와 사회문제를 고발하며, 개인의 권리를 주장하는 과정에서 투철한 의지를 보여준다. 의지를 실현시키는 것에 꼭 투철함이 필요하냐는 반문을 던질 수도 있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다. 더구나 여성에게만 주어진 것들─임신·출산과 연관된 모성애와 자기희생─의 임무를 수행하는 이들에게는 백번 그렇다. 몇 년 전, 사회적으로 큰 이슈를 모아 원작을 영화로 제작한 <82년생 김지영>이 오버랩된다. 실제 인물 김지영이 관념과 부딪히고 깨지면서도 현실 속 자기 안에서 자유를 얻었던 것처럼, 양한비의 <닭장>도 결이 같다.
안무가 양한비는 다양한 시도의 작품 활동을 통해 그만의 안무방식을 구축하고 있는 주목할 만한 신인이다. 그는 자신의 뚜렷한 생각이 사회적 공감과 맞닿아 있고, 다소 무거운 주제를 재치 있게 풀어냄으로써 작품에 재미와 여운을 남긴다. 기존의 것을 모방하고 변용하기보다 자기만의 테크닉을 만들어 내는 새로운 시대의 춤 작가이다. 양한비의 행보가 기대되는 이유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으로서 양한비의 앞날을 응원한다.
박철순 안무 <마츠리> _ 미추(美醜), 관념적 사고의 실현
10월 11-12일, 박철순 안무 · 조봉국 음악 <마츠리>의 막이 올랐다. 포이어 극장에서의 공연은 보통 1층과 2층을 터서 천고가 높은 쪽을 무대로 사용한다. 맞은편 1층과 2층에는 관객석을 배치한다. 그러나 안무가 박철순은 보통의 공간을 반대로 사용했다. 비어있는 공간이 아닌 가득 차 있는 공간이다. 복층 구조물을 그대로 무대로 사용하길 택했다. 상·하의 공간, 계단과 난간들, 2층 벽을 가득 메우는 거대한 책장, 눈에 들어오는 것이 너무 많다. 이제 관객은 상상한다. 안무가는 이미 의도된 공간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대해서 말이다.
안무가 박철순은 조봉국 음악가와 협업하여 <마츠리>라는 작품을 내놓았다. 일본의 축제 ‘마츠리’는 신(神)을 모시며 복을 기원하는 제례에서 유래했다. 여러 세대를 거쳐 종교적 의미는 퇴색하고, 지역공동체의 단결을 도모하는 화려한 축제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 일본을 상징하는 벚꽃이 만개하는 시점, 봄 마츠리에는 유독 인파가 모인다. 박철순은 유년 시절을 보낸 일본에서 벚꽃 아래 이름 모를 수많은 벌레들의 주검을 바라봤던 기억을 끄집어낸다. 이것이 작품 <마츠리>의 모티브다.
벚꽃이 지고 난 이후의 광경을 본 적 있는가? 만개한 벚꽃의 찬란함이 지나간 자리에는 추잡함이 남는다. 황홀경에 젖어 들 정도의 찬란함의 정도만치 비정할 만큼 처참하다. 행인의 발걸음에 짓이기고 짓이겨져 진액을 토해내는 광경이란, 비단 벚꽃만이겠는가. 힘없는 작은 벌레에게 사람의 발걸음은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것이다. 위로부터 짓누르는 발걸음은 작은 미물에게는 감당해내지 못하는 죽음의 그림자다. <마츠리>는 화려한 벚꽃과 그 아래 처참히 짓밟히는 벌레들의 대비를 통해 인간의 양면성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관객석 바로 앞에서 빨간 원 탑 조명이 비춘다. 조명이 내려앉은 곳에는 무용수 3명─김시원, 배진호, 서이진─이 무거운 어깨를 드러내며 빨간빛을 쬐고 있다. 영화를 보면 복선을 암시할 때 이런 분위기였던가. 음습하다. 3인의 무용수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천천히 무대 중앙으로 나아갔다. 서로 짓밟고 짓밟히며 물고 뜯는다. 영락없이 인간의 탈을 쓴 좀비의 모습이었다. 엉키고 설킨 3인무에서는 곧 인간의 추악한 성질을 드러낸다. 자고로 3인이 모이면 작은 사회를 이룬다고 했다. 동양의 철인(哲人) 공자가 말한 바대로, 서로에게 스승이 되어줄 수도 있다. 반대로 한 명을 따돌려 머릿수를 줄여가며 더 큰 이득을 취할 수도 있다. 무대 위의 좀비들은 무참히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뿔뿔이 흩어져 각자 후미진 공간으로 파고들었다.
각자의 공간에 들어간 김시원, 배진호, 서이진은 개인의 방식대로 아파하고, 기도하고, 자책하며 따로, 또 같이 공존한다. 타인에게 감추고 싶은 자신의 나약함, 폭력성, 두려움 등 각자의 캐릭터를 연구한 흔적이 보인다. 김시원이 서이진의 머리채를 잡아채며 폭력을 가하지만, 계단 아래쪽에 몸을 숨긴 배진호는 두려움에 방관할 뿐이다. 폭력을 휘두르는 김시원은 서이진을 내동댕이치고 몸을 숨기듯 무대 뒤편으로 향했다. 가녀린 몸의 서이진은 자신의 연약한 모습을 구슬픈 노래를 부르듯 보여줬다. 김시원은 죄책감에 자신의 몸을 자해한다. 차가운 스틸 소재의 장스탠드 불빛을 받으며, 벌거벗고 스스로 채찍질하며 몸을 학대하는 고행의 행위로 구원받고자 한 수도사의 모습과 같았다. 하지만 그 순간도 찰나, 계단 아래에 몸을 구겨 넣고 눈치만 보며 나서지 못했던 배진호의 목 뒷덜미를 잡고 끌고 나와 또다시 폭력으로 응징한다. 잡아먹고 먹히는 관계에 지쳐 하나, 둘 쓰러질 때까지 잔혹함은 계속됐다.
조명이 2층을 비추며 관객의 시선이 이동한다. 벽돌을 쌓아 올린 것처럼 블랙박스들이 켜켜이 정렬되어 있다. 그 중간에 있는 박스 하나가 빠지며 그 사이로 박철순의 얼굴이 등장한다. 커다랗게 싸놓은 네모난 바탕에 자그맣게 네모반듯한 구멍이 난 곳으로 보이는 화면은 텔레비전 안의 텔레비전과 같이 이중적 효과의 미감을 살려 집중도를 높였다. 빛이 서서히 퍼지며 1층 무대 중앙에 쓰러져있는 3인의 무용수를 비춘다. 박철순은 2층의 작은 화면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며 벚꽃 잎을 뿌린다. 인간사에 지쳐 쓰러져 있는 그들을 격려하듯 하늘에서 벚꽃 잎이 흩날려 내린다. 작디작은 꽃잎은 3인 무용수의 몸에 한 겹, 두 겹 쌓이며 그들의 무덤이 된다. 일본의 마츠리 축제에서 경험한 유년시절 박철순의 충격적인 기억, 화려함과 추악함이 공존하는 장면이다.
경건한 종소리가 울려 퍼지며, 박철순은 쌓여진 블랙박스들을 휘저어 허물기 시작한다. 고요하게 벚꽃 잎을 날려주던 성자의 모습은 사라졌다. 벽을 허물고 뛰쳐나온 그는 두려움 가득 찬 눈빛과 움직임으로 모습을 드러낸 또 다른 약하디 약한 인간이었다. 그는 계단의 난간과 와이어를 활용하여 동아줄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인간상을 드러냈다. 안전을 위해 설치된 와이어는 아이러니하게 위험천만해 보였다. 인간의 몸을 한낱 가녀린 줄에 의지하는 모습은 지하세계로 떨어지지 않으려는 인간의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여기에 심금을 울리는 조봉국의 노래가 더해져 몰입도를 높였다.
높은 곳에서 아래로 하강한 자의 숙명은 어떻게 되는가? 버티지 못하고 약자의 세계로 내려온 박철순은 잠재되어 있던 거친 면모를 폭발적으로 드러낸다. 살기를 띈 주먹을 잠재우려 애쓰지만 쉽지 않아 보인다. 완력을 사용하여 반대쪽 손으로, 온몸으로 제어하려고 하지만 살기는 거세지기만 한다. 허공을 가로질러 남을 해하려던 손은 결국 자신에게 돌아온다. 박철순은 스스로 목을 조르며 이승과 저승의 통로를 오가는 장면을 가감 없이 보여줬다. 본인에게 귀속된 양면성을 드러낸 셈이다.
사람과 상황을 가늠하는 잣대는 지극히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강자는 언제까지나 강자이지 않고, 약자도 언제까지나 약자이지 않다. 장소나 상황에 따라서도 강자와 약자의 위치는 돌변한다. 강자와 약자의 역할 변화는 무용수 3인과 함께 확장된다. 서로 비교하며 강자와 약자가 교차되는 사이, 서이진은 박철순의 등을 밟고 2층 무대로 올라간다. 가장 연약했던 존재가 강자의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새롭게 지배한 위의 자리에서 자신에게 디딤돌이 되어준 박철순에게 벚꽃 잎을 뿌린다. 서이진의 손에서 뿌려지는 벚꽃 잎은 보드라운 위안과 같다. 박철순은 온몸으로 벚꽃 잎을 맞이하며 빗물을 받아먹듯 입을 크게 벌려 꽃잎을 받아먹고, 몸에 내린 꽃잎마저 열렬히 탐한다. 엄마 젖을 갈구하는 갓난아이와 같이, 본능에 가까운 나이브한 모습으로. 하늘에서는 더 이상 화려할 수 없을 정도로 꽃비가 쏟아져 내렸다.
<마츠리>의 첫 장면, 3인이 서 있던 그 자리에서 박철순 홀로 빨간 조명을 받고 있다. 축 늘어진 어깨로 망연자실 서 있는 박철순은 숙명을 받아들인 인간의 모습이다. 그의 눈과 마음은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 끊임없는 선택의 기로에 놓인 그의 뒷모습은 그저 쓸쓸해 보였다.
박철순의 <마츠리>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달린 인간세계의 미추(美醜)를 다뤘다. 화려함 이면에 숨겨진 추잡한 삶을 여실히 드러냈다. 일본에서 지낸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 당시 느꼈던 감정을 청년이 바라보는 인간세계에 대입했다. 화려한 벚꽃과 그 아래 널려진 벌레의 주검, 찬란하지만 추악함을 품고 있는 인간의 이면과 닮아있다.
우리는 모두 어떤 사람에게는 강하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약하다. 강한 사람은 약한 사람을 억압한다. 그 목격자가 가해자보다 약한 사람이라면 방관하게 되고, 방관자가 강자에게 들키는 순간부터 그 역시 강자의 먹잇감이 된다. 못되게 굴고 후회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후회는 반성으로 이어지다가도 반대로 힘을 더욱 과시하게 되기도 한다. 약자는 패배를 거듭하며 더욱 약해지고, 강자는 승리를 거듭하며 더욱 강해지기 때문이다. 박철순은 모순적인 인간의 이면에서 시작되는 사회적 병폐를 <마츠리>에 그려냈다. 현재의 나를 인식하고, 지금의 자리에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고민한다. 함께라면 할 수 있을 것이란 희망과 위태로움을 함께 품고서 말이다.
박철순은 <마츠리>를 통해 그의 공간구성 능력을 보여줬다. 무대와 객석을 뒤바꾼 발상이 독특하다. 아이콘으로 가득 차 있는 복층 구조물을 전적으로 활용하여 <마츠리>의 맞춤형 공간을 탄생시켰다. 구획한 공간에 의미가 부여되고 댄서들은 각 캐릭터에 빙의되어 무대가 아닌 개인의 익숙한 방구석에 있는 느낌이었다. 악사 배치 또한 마찬가지였다. 무대 뒤편 복층 하단은 천고가 낮아 무용수의 동작에 제약을 받아 자칫 버려질 수 있는 공간이다. 여기에 조봉국, 박성권, 주현탁 연주자들을 배치하여 공간을 극복했고, 박철순의 안무와 어우러지는 퍼포먼스가 연출됐다.
누구나 당연하게 여기는 틀을 깨부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기존의 틀에서 웰메이드를 만들기보다 상상의 나래를 편 자신의 공간적 틀을 제시한 안무가 박철순의 실험정신에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그의 열정에 동참한 무용수와 악사들에게도 아낌없는 찬사를 보낸다.
2020년 《청춘대로 덩더쿵!》의 무대를 빛낸 양한비의 <닭장>과 박철순의 <마츠리>는 ‘음양대대(陰陽待對)’의 미학과 만난다. ‘음양’은 상반된 구조를 지니고 있지만, 그 구조 속에서 상호 보완하는 대대(待對)적 관계를 이루고 있다. ‘대대’란 서로 마주하며 기다린다는 뜻이다. 이 관계는 상반되는 대상을 자신의 존재를 확보하기 위한 필수요소로 삼는다. 서로 반대가 되어야 서로를 이루어 준다는 '상반상성(相反相成)'의 논리는 ‘음양대대’의 미학의 기저에 있다. 둘이 공존해야 생존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서로 반대의 성향으로 적대적 관계에 놓이기도 한다.
양한비의 <닭장>에서 ‘여성과 남성’, 박철순의 <마츠리>에서 ‘화려함과 추악함’이라는 상반된 개념을 빌려 인간의 밑바닥까지 치달았다. 인간 본성에 내재한 미추(美醜)가 현실화 되는 광경을 보여주었다. <닭장>에서 울타리는 보호와 감금의 양면성을 갖는다. <마츠리>에서 강자와 약자의 대립은 시공에 따라 상대적이다. 뒤엉킨 인간 삶이지만, 이들은 결국 현실 속에서 나를 찾고 화해하며 답을 구하고자 했다. 이 모든 것에 ‘음양대대’의 원리가 적용된 것이다. 다른 성향을 지닌 사람들이 서로 배척하며 상처투성이 되거나, 상호 감응해 조화되며 서로를 완성시켜 주거나 선택은 개인의 의지에 달렸다. 과거의 실패에 낙담하기보다, 용기 있게 딛고 일어나길 택한 양한비와 박철순의 걸음마다 축복이 따르기를 기원한다.
2020년 바이러스 시대의 서막, 문화예술계는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야만 하는 시점이다. 그렇기 위해선 젊은 세대에서 삶에 대한 뜨거운 고찰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일을 만들어가는 사람은 기성세대가 아니다. 그들이 때로는 격려하고 때로는 무시하는 위태로운 젊은이들에게 우리의 내일이 달려 있다. 꿈을 향해 발을 내딛는 이들의 도전만이 수많은 실패 위에서 새로운 규칙을 창출하기 때문이다. 차세대 안무가 양한비와 박철순은 본인의 작품 속에서 수많은 시도를 하고 있다. 이들의 도전이 오랜 시간 지속된다면 실패와 성공을 거듭하며 자기만의 규칙을 만들어 낼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올해 ‘청춘대로 덩더쿵’의 주역 양한비와 박철순의 시도는 가치가 있다.
한국창작춤이 태동한 지 50년이 되어간다. 1976년, '이 시대의 춤을 추자.'라는 모토 하에 신무용을 뛰어 넘는 창작춤을 추구했던 당시 젊은이들의 사건은 가히 혁신적이었다. 2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옛말이 무색할 정도로 변화의 주기는 점점 빨라지고 있다. 그동안 한국의 춤계는 어떤 새로운 시도들이 존재했고 무엇을 이룩하였는가? 그간의 기록들을 총망라해 한국창작춤을 정론화할 필요가 있다. 이 작업은 반성과 성찰의 시간 속에서 우리에게 한 단계 도약할 비전을 제시할 것이다. 반짝반짝 빛나는 청춘, 끈질기게 몰입하는 열정을 지닌 양한비와 박철순이 한국춤의 역사에 남는 기분 좋은 상상을 해본다. 그리고 새로운 방식으로 춤을 짓는 양한비와 박철순에게 ‘뉴제너레이션 춤작가’라는 칭호를 붙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