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림시론

성균관유도회총본부 창립배경에 대한 검토와 현안에 대한 제언

김인규/횡성향교 전교 한일합방(1910년) 직전의 구한말 유림은 극도로 피폐하였고 을사5적이라는 정부 대신들까지도 유가(儒家) 출신이었는데, 당시의 유림단체 유형은 대체로 다음의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보수파 유림은 민족정신의 양심은 있었으나 친일파 인사들이 득세하는 현실 속에서 소극적으로 저항하거나 무기력한 모습을 보인 은둔 유림이었다. 둘째

오흥녕 2022. 5. 9.

김인규/횡성향교 전교

 


한일합방(1910년) 직전의 구한말 유림은 극도로 피폐하였고 을사5적이라는 정부 대신들까지도 유가(儒家) 출신이었는데, 당시의 유림단체 유형은 대체로 다음의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보수파 유림은 민족정신의 양심은 있었으나 친일파 인사들이 득세하는 현실 속에서 소극적으로 저항하거나 무기력한 모습을 보인 은둔 유림이었다.

 

둘째, 항일독립운동파 유림은 일제의 회유와 탄압에도 굴복하지 않고 민족정신의 양심을 고수하면서 순절, 의병, 망명, 비밀결사, 투옥 등으로 적극 활동했던 지사(志士)유림이었다.

 

셋째, 친일파 유림은 민족정신의 양심마저 외면하고 일제에 아부하고 적극적으로 협력하면서 이익을 추구하는 관료파 유림으로서 경학원을 무대로 활동을 하던 기득권 실세유림이었다.

 

이 무렵 일제는 한민족의 정통성을 말살하고 식민지화를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식계층의 충절을 약화시키고 인재양성 교육기관이던 성균관을 경학원으로 강등·개편하여 친일파 유림들을 요직에 임명했다.

 

일제의 정책에 편승하여 유림단체와 조직이 우후죽순처럼 결성되었는데 대동사문회, 유도진흥회, 유도천명회, 유도창명회, 유도부식회, 유교대도회, 구례유생양반회, 전선유림연합회, 조선유도연합회 등으로 난립되고 경학원 잡지와 유도 등의 소식지·기관지까지 발간되었다.

 

한편 성균관과 향교는 지금과는 다른 형태였는데, 조선의 도성인 한양에 위치한 성균관은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에 규정된 편제에 따라 국가교육의 관료기관으로서 정3품 대사성이하 35명의 교육관료를 임명하고 예조의 관할하에 국가 인재양성기관으로 자리매김하면서 500여 년을 이어갔다.

 

반면 전국에 위치한 향교는 예조의 감독하에 각 도의 관찰사가 관할하여 성균관과는 종속적인 관련 없이 지방 과거시험에 합격한 유생인 생원과 진사들을 추천하여 성균관에 입학시키고 대과를 준비하도록 하는 등 상위 대학입문을 담당할 뿐 지금처럼 성균관장으로부터 전교 선임장을 받는 경우는 원래부터 없었다.

 

따라서 중앙의 유림단체 조직이 필요하지도 않았고 더욱이 유도회총본부라는 명칭조차 없었으며, 현재 성균관의 임원인 전인, 전의, 전학 등의 직제도 해방이전까지는 없었다.

 

아울러 본래 장의(掌議)와 색장(色掌)은 몇 명이 관련된 성균관 유생 자치기구인 재회(齋會)로서 요즈음 학생회 정도의 기능이었을 뿐이며, 이런 모든 것들은 갑오개혁(1894) 이후에 일제의 식민지화를 위해 통제하기 용이한 조직체로 변질시킨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일제의 패망으로 우리나라가 8.15 광복을 맞이하자 유림사회에도 변화의 물결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1945년 11월30일 성균관 명륜당에서 6일 동안 전국유림대회가 개최되어 민족고유문화의 근간인 도의(道義)의 혁신과 향상, 성균관대학 설치, 재단 구성 등을 결의하였고 <조선일보> 12월11일자에 ‘유도회 중앙집행위원회 결의’라는 제목하에 고문 이승만·김구, 위원장 김창숙, 부위원장 김성규·이기완, 총무위원 최중철·이우세·서성달이 선출되었다고 게재했다.

 

다음 해인 1946년 3월13일 다시 전국 유림 2,500여 명이 성균관 명륜당에서 열린 최초의 유도회 창립총회에서 심산 김창숙 선생을 초대 위원장으로 선출했는데, 여기서 최초로 공식화된 유도회라는 명칭은 실질적으로 흐트러진 유림을 규합하고 전통유학의 본산이었던 성균관의 교육기관 기능을 복원시키기 위한 단체로서 창립 명분과 실리만큼은 큰 성과를 거두었으므로 이에 대한 심산 김창숙 선생의 공로는 지대했다.

 

김창숙 유도회 초대 위원장은 우선 성균관대학기성회를 결성하고 독지가였던 이석구로부터 재단법인 학린사 토지를 희사받아 성균관대학을 구성하고, 그해 9월25일에 미군 군정청 문교부로부터 성균관대학을 인가받아 전통학문기관을 혁신한 현대적인 최고 교육기관을 탄생시켰으며, 1953년 2월6일에는 전국향교재단을 규합하고 재산을 기부받아 종합대학으로 인가받았다.

 

 

유도회총본부 창립 후 10여 년이 지난 1956년초에 이르러 재단기본재산에 대한 부정처리 문제와 성균관대학교 총장의 교체 문제를 둘러싸고 마찰과 갈등이 심화되어 2월21일 유도회총본부 임시중앙위원회가 소집되어 이우세를 위원장으로 하는 수습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다음 전국대회를 소집할 때까지 유도회총본부, 재단법인, 성균관대학교, 성균관에 대한 모든 수습대책을 위임했으나 정통성을 가리기 위한 소송으로 수년간 분쟁을 계속하다가 결국 1961년 5.16군사정권 포고령 제6호로 유도회총본부는 16년만에 해체됐다.

 

하지만 1964년 5월10일 전국향교대표자대회가 개최되어 유도회총본부 재건을 다짐하고, 그 실현을 위한 대표자대회의 소집을 성균관 관장단과 재단법인 성균관 이사단에 위임하기로 하는 유도회 수습위원회가 구성됐다.

 

6년이 지난 1970년에 이르러 유도회총본부가 해체된 지 10년만에 처음으로 소집된 전국대표자대회에서 이가원을 제2대 유도회총본부위원장으로 선임하고 새로운 조직을 구성하여 재단법인과 유도회총본부와 성균관을 재건하여 지금의 삼위일체 체제를 완성하였고, 1994년 유도회 정관을 개정하여 위원장이란 명칭을 회장으로 변경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창립배경에 관한 본질과 1946~1970년의 분규과정의 난맥상을 보면 이미 해체되었던 유도회총본부를 굳이 재건할 만큼 절실한 필요가 있었는지 의아할 수밖에 없다.

 

만약 재건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정부나 사회로부터 유림의 단결된 모습을 인정받기에 더욱 충분하지 않았을까? 물론 사회교화에 많은 공헌을 쌓았지만 유림 미래의 대의명분으로 볼 때 잃는 것이 크기 때문이다.

 

지금의 성균관 위치는 문화체육관관부 종무2실의 담당하에 7대 종단의 하나로 자리하고, 향교재단과 향교는 각 도청 문화체육관광국 문화유산과에 관련되어 있어 종교의 일부분 또는 문화유산관리 정도밖에 평가받지 못하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급선무로 성균관, 재단 성균관, 유도회총본부 조직을 통합하여 단결된 모습을 보여야 하며 지금 이대로라면 국가로부터 지원받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유림의 앞날은 요원하다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객관적 입장에서 유림조직의 현실을 평가한다면 전통적인 교육기관임을 잊은 채 대다수가 종교적 분파라고 오해할 여지를 자초하고 있지 않은가!

 

『서경』 태갑편에 말하기를 ‘하늘이 내린 재앙은 그래도 피할 수 있지만 자신들이 자초한 재앙은 살아남을 수 없다’고 한 구절이 마치 오늘날의 유림현실을 비유하는 말같아 우려스러운 마음을 떨칠 수가 없다.

 

지금이라도 제도를 개선하고 조직을 통합하는 것이 정부와 사회로부터 인정받는 길이고, 성균관과 유도회총본부의 지도자를 선출하기 직전인 금년이 절호의 기회이므로 변하지 않고 있는 백년하청(百年河淸)의 안일한 허송세월을 심기일전(心機一轉)으로 거듭나야만 한다.

 

이 길만이 공부자의 교학사상을 온전하게 계승할 수 있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