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세제(철학박사, 결성향교 선비문화학교장)
함양(咸陽)에 안의(安義)라는 고을이 있다. 예전에는 현(縣)으로서 제법 규모를 자랑하며 번성했던 것 같다. 곳곳에 산재한 고적(古蹟)들이 옛날의 영화를 말해준다. 지금은 많이 쇠락해서 함양군에 속한 면(面)이 되어 있다. 거기 세월의 풍랑을 견디며 묵묵히 옛것을 지키는 안의향교가 있다.
옛날 안의에는 덕이 높은 주상 전하의 주신(周臣)들만이 현령으로 올 수 있었다 한다. 그때는 향교의 위상이 매우 높았다. 아마 ‘현자(賢者)’와 ‘지자(智者)’들이 덕(德)을 다투며 각축(角逐)했으리라.
엊그제 안의에 다녀왔다. 옛 선비들의 자취가 곳곳에 생생하여 그 아름다움을 제현들과 함께 하고자 이 글을 쓴다.
『논어』 「이인편」 머리에 이런 말이 있다. “마을의 풍속이 인후(仁厚)한 것을 아름답다고 하니, (머물 곳을) 택할 때 인후한 곳에 처하지 않는다면 어찌 지혜롭다 하리오?”[子曰 “里仁爲美, 擇不處仁, 焉得知?”]
‘아름답다’고 하면 대개 서양의 미(美)를 기준으로 하여 ‘균형이 잘 잡힌 상태’, ‘마음을 흐믓하게 하는 장면’ 등을 연상한다. 하지만 우리네 옛 정서는 그런 것을 ‘아름답다’ 여기지 않았다. ‘사람다움’ ‘사람다운 사람의 정취’를 ‘아름다움’이라 생각했다.
이데아의 세계를 간구했던 정신 우위적 사고의 서양에서는 우리가 사는 세계[자연·현실]를 그림자의 세계ㆍ거짓된 세계라 여기고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이상 세계ㆍ절대 세계를 아름다움의 표준이라 여겼다. 그래서 아름다움은 ‘황금분할’(golden section)처럼 현실에서는 어떻게 해도 이룰 수 없는 신성(神性)의 가치, 꿈의 세계로 간주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현실[자연] 친화적 우리 전통 사회에서는 미지의 세계에서 누리는 안락보다 눈앞에 펼쳐진 생활 속의 훈훈한 정(情)을 아름다움의 기준이라 생각했다. 현실에 동화되는 것을 최고의 선이요 가치, 이상이라 생각한 탓이다. 그래서 ‘미(美)’라는 말보다 ‘도(道)’라는 말이 더 중하다고 봤다. 요즘도 동양의 미를 탐구하는 사람들은 사리ㆍ도리를 뜻하는 이 ‘도’에서 궁극적 감흥과 조화로움, 쾌(快)의 의미를 찾는다.
아마 그것은 사회의 발생과 성격을 바라보는 눈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리라. 인위적이고 사회계약적인 서양에서는 마을이든 국가이든 그것은 모두 사적 개인들의 합의에 의해 탄생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 전통 사회에서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거스르지 않는 것을 이상(理想)이라 여겼다. 자연적이고 혈연유대적인 가족[家, clan]을 사회의 기체(基體)로 생각했던 까닭이다. 그래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향촌 사회의 모습은 언제나 아름다운 세계의 롤-모델(role-model)이 되었다.
그것이 바로 규각(圭角)이 없는 제자로 소문난 유약(有若)이 그렸던 세계가 아닐까? “근본이 서면 세상은 절로 평안해진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어른을 잘 모시는 것이야말로 사람다움을 행하는 근본이니라.”[本立而道生. 孝悌也者, 其爲仁之本與]
그러한 세계의 모습을 보고 싶다면 전통 사회의 마을 모습을 연상하면 된다.
사람다움[大道]이 행해지는 세상에서는 천하를 공적인 것[公器]으로 여긴다. 어진 이와 재능 있는 이들에게 나라의 경영을 맡기며 모든 사람이 믿음과 화목을 닦는다. 그래서 자기 어버이만을 어버이로써 존경하지 않으며, 자기 자식만을 자식으로써 사랑하지 않는다.
그런 까닭으로 늙은이와 젊은이, 홀아비와 과부, 자식 없는 이와 부모 없는 아이들이 버려지는 바 없이 바라는 바를 이루며, 남자와 여자가 각자 입장을 갖고 행복한 삶을 영위한다.
그런 사회에서는 재물이 길바닥에 허투루 버려지는 예가 없으며, 혼자만 잘 먹고 잘 살겠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없다. 자신의 재주가 함부로 쓰이는 것을 미워하며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쓰이는 것은 더더욱 미워한다.
삿된 생각은 가려져서 나오지 않으며, 감언이설로 혹세무민하는 사람, 몽둥이를 들고 남의 것을 강제로 취하는 사람, 법과 질서를 문란하게 하는 사람, 요컨대 남을 해치는 짓 따위를 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
나와 남의 구별도 없고, 덩달아 나의 것과 남의 것에도 차별을 두지 않는다. 남의 어려움은 나의 어려움이 되고 남의 즐거움은 나의 줄거움이 된다.[大道之行也, 天下為公. 選賢與能, 講信脩睦, 故人不獨親其親, 不獨子其子, 使老有所終, 壯有所用, 幼有所長, 矜寡孤獨廢疾者, 皆有所養. 男有分, 女有歸. 貨惡其弃於地也, 不必藏於己, 力惡其不出於身也, 不必為己. 是故謀閉而不興, 盗竊亂賊而不作, 故外戶而不閉, 是謂大同.]
공자는 출사를 하게 되면 무엇을 하고 싶으냐는 제자의 질문에 “늙은이에게는 편안한 삶을, 친구 동료들에게는 신뢰의 정을, 어린아이에게는 포근함”을 주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老者安之, 朋友信之, 少者懷之] 그런 사회라면 굳이 정치의 도를 고민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미 옳다고 믿는 바가 잘 조정되고 배분되어 이익이 두루 펼쳐진 사회가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나는 생애 두 번째로 안의(安義)에 다녀왔다. 첫 번째 갔을 때는 자문단 일행에 끼여 있어서 임무를 수행하기에도 시간이 빠듯했다. 그래서 “고향”(M. Heidegger)의 이모저모를 살필 기회가 없었다. 이번에는 여름 휴가를 겸하여 작정하고 찾아갔다. 8월 4일에서부터 8월 8일까지 닷새 동안 머물렀다.
신왕용 전교님, 김경두 유도회장님, 그리고 여러 동도제현(同道諸賢)께서 반갑게 맞아 주셨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을 꾀한다는 안의농협 전인배 조합장과는 이번에 처음 인사를 나눴다.
소신이 궁금하다 하였더니 “정기제가(正己齊家), 앙천불괴(仰天不愧)”라 한다. 광오한 말이라며 놀라워하자 자세를 바로잡고 “언감생심(焉敢生心) 무항산(無恒産) 유항심(有恒心)이겠습니까? 유항산(有恒産) 유항심(有恒心)이올시다”라 한다. 그러면서 “사람다운 사람은 자신이 서고자 하면 남도 서게 하고 자신이 통달하고자 하면 남도 통달하게 한다”[仁者, 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고 한다. 군자(君子)의 이언(俚諺)이다. 그래서 “기왕이면 유상(儒商)이 되시라” 하였다.
김경두 유도회장, 전인배 조합장과는 종일 붙어 다녔다. 전 조합장은 내가 사는 홍주(洪州)에도 연(緣)이 있다 한다. 삼한(三韓)의 현재(賢才)로 이름난 선조를 여럿 모신 까닭이다. 두 분 모두 내게는 귀한 스승이다. 유학(儒學)으로 입신(立身)하였으니 이제 안의(安義)를 “리인위미(里仁爲美)” “사람 냄새 그득한 곳”으로 만들려 한다는 말을 듣고 절로 고개를 숙였다.
용추(龍湫) 계곡에서는 연이틀을 보내며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의 아늑함에 푹 빠졌다. 이백(李白)에게 별천지(別天地) 벽산(碧山)이 있다면 안의(安義)에는 용추산방(龍湫山房)이 있다. 동출서류(東出西流)하는 계곡의 고즈넉한 정취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근처 미술관 한 켠에서 주말 밤마다 펼쳐지는 음악회는 그 어떤 오케스트라의 화려한 공연보다도 아름답고 감동적이다. 여민동락(與民同樂)이라 했던가? 마음씨 착한 아티스트가 빚어내는 “메아리 소리”를 들으며 그토록 동경(憧憬)했던 “리인위미(里仁爲美)”의 정경(情景)을 그제야 만끽했다. 미술관의 전시물도 정경화(情景畵)[風景畵] 일색이다. 사람다움은 역시 시, 음악, 예술이 함께 해야 제맛이다.
향교가 있다면 서원도 있으리라. 남계서원과 청계서원. 그날 남계서원에서는 존경하는 김윤수[성균관 부관장 겸 유도회 부회장] 형의 문집 강독이 있었다. 오랜 만에 접하는 형의 강독은 정갈해서 맛이 개운하다. 옛 선비들의 의경(意境)을 접한 것은 오로지 형 덕분이다.
나는 아름다움이 ‘우리 밖에 있다’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생활 속에 있다. 바로 사람다움이 아름다움이다. 사람다움을 떠난 것은 아름답지 않다. 가치를 매기기 어려운 것에는 어디에나 사람다움이 있다. 비단 이번에만 그런 게 아니다.
“아침 나절에 도(道)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다”(朝聞道夕死可矣)고 했던가? 그 도가 ‘사람다움’이고 그것이 이루어진 세상이 ‘사람다운 사회’라면 그렇게 되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다운 사람이 사는 이유라는 게 사람다움의 구현 외에 달리 또 뭐가 있겠는가? 황석산성(黃石山城) 곳곳에 서린 유림 처사들의 수명취의(授命取義)가 그렇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니 용추계곡 가는 길에도 아녀자들이 내려놓은 숭엄(崇嚴)한 돌무덤이 있다.
안의(安義)의 고요하면서도 아늑한 정경, 서로 돕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사람들, 기다림과 외로움과 그리움 중에 무엇이 가장 절실한 것이냐고 묻는 묘령의 시인, 자신의 고운 몸을 산산이 부서뜨리며 내려와서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재잘거리는 용추계곡의 명경(明鏡) 같은 시냇물. 아! 그러고 보니 안의(安義)는 연암 박지원 선생이 백성을 사랑하며 물레방아를 처음 만들어 선보인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더 아름다운 것일까?
“선비는 도량이 넓고 뜻이 굳세지 않으면 안 된다. 책임이 무겁고 갈 길이 멀기 때문이다. 인(仁)으로써 자신의 임무를 삼으니 무겁지 않은가? 죽은 뒤에야 끝나니 멀지 않은가?”[士 不可以不弘毅, 任重而道遠. 仁以爲己任, 不亦重乎! 死而後已, 不亦遠乎!]
그날 범죄예방 함양지구 위원들과 소록도 다녀오는 길에 버스노래방이 열렸다. 노래 하나 부르라 하기에 박상규 선생의 “조약돌”을 불렀다. 그랬더니 여기가 바로 그분 선친의 고향이란다. ‘비바람에 시달려도, 아무도 모르게, 둥글게 살고자 했던’ 함양 선비들의 모습이 아른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