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림시론

<특별기고> 도동서원은 세 번째다

김윤수(성균관 부관장, 성균관유도회총본부 부회장, 일두기념사업회 이사장, 지리산문학관장) 울산바위 필암이니 돈암이니 바위 따라 세운 서원 울산바위 쳐다보며 울암서원 구상하네 얼마나 큰 서원이라야 저 바위에 어울릴까 2019년에 한국의 9개 서원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한국유교의 자존감이다. 9개 서원의 주향 인물은 병산서원의 서애 유성룡 외에는 모두

오흥녕 2023. 8. 21.

 

김윤수(성균관 부관장, 성균관유도회총본부 부회장, 일두기념사업회 이사장, 지리산문학관장)

 


 

울산바위

 


필암이니 돈암이니

 

바위 따라 세운 서원

 

울산바위 쳐다보며

 

울암서원 구상하네

 

얼마나 큰 서원이라야

 

저 바위에 어울릴까

 


2019년에 한국의 9개 서원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한국유교의 자존감이다. 9개 서원의 주향 인물은 병산서원의 서애 유성룡 외에는 모두 문묘종사 유현이다. 병산서원 외에는 모두 사액서원으로,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에서 제외된 존속서원이다. 사액의 윤허는 받았으나 편액은 못 받고 문묘종사도 안 된 병산서원이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에 안 걸리고 존속서원에 포함된 것은 서애의 임진왜란 극복 공로, 탁월한 공훈이 인정되어 보존된 것이고 세계문화유산이 된 것이다.

 

성군 세종을 보좌한 탁월한 공훈이 있는 방촌 황희의 상주 옥동서원도 존속서원으로 지금도 고색창연한데 한국의 서원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동춘당 송준길의 대표서원 상주의 흥암서원도 고색창연한 존속서원인데 9개 서원에는 제외되었다. 구미의 고려말 충신 야은 길재의 금오서원도, 경주의 신라 대학자 문묘종사 홍유후 설총의 서악서원도 존속서원이지만 제외된 것이다. 동방오현의 존속서원이 세계문화유산에 미포함된 건 경기도의 정암 조광조의 심곡서원(1605)뿐이다. 서악서원(1560년), 금오서원(1572년), 옥동서원(1580년), 흥암서원(1702년)

 

대원군의 서원철폐 시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서원이 47개라고 하지만 실상 20개는 사당이고 27개만이 서원이다. 그러므로 존속서원은 27개뿐이다. 대원군 철폐시 문묘종사 유현은 16명이고 우암 송시열의 대표서원 화양동서원은 철거되고 강한사(대로사)라는 사당만 존속시켜 15개 서원에 공신 서원 2개 합 17개이고 나머지 10개 서원은 탁월한 충신서원이다. 향현사니 충렬사니 하는 사당의 일종에 불과하고 서원이라고 하기엔 미흡한 존재도 있다.

 

 

선산 금오서원(고려말 충신 야은 길재), 영월 창절서원(창절사-단종충신 사육신), 김포 우저서원(임진왜란 충신 중봉 조헌, 중봉은 1883년(고종20) 문묘종사), 북청 노덕서원(인목대비 충신 이항복), 포천 용연서원(인목대비 충신 이덕형), 김화 충렬서원(충렬사-병자호란 충신 홍명구), 노성 노강서원(병자호란 충신 윤황), 양성 덕봉서원(인현왕후 충신 오두인), 과천 노강서원(인현왕후 충신 박태보), 과천 사충서원(영조 충신 노론사대신)

 

9개 서원은 창건순으로 배치되었다. 소수서원(1543년), 남계서원(1552년), 옥산서원(1573년), 도산서원(1574년), 필암서원(1590년), 도동서원(1605년), 병산서원(1613년), 무성서원(1615년), 돈암서원(1634년)

 

9개 서원을 장소의 이동과 명칭의 변경 차원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옥산서원과 도산서원은 장소의 이동도 명칭의 변경도 없이 시종일관 그대로 존속하고 있다. 병산서원은 장소의 이동은 없고, 풍악서당을 이건하여 풍악서원이라 부르다가 병산서원으로 개칭하였다. 사당 존덕사를 1610년부터 지어 1614년 완공, 봉안하여 사당 강당 구비의 서원이 되었다. 남계서원, 필암서원, 돈암서원은 장소의 이동은 있으나 명칭의 변경은 없다. 소수서원은 백운동서원이 개칭된 뒤에, 무성서원은 태산서원이 개칭된 뒤에 사액서원으로선 명칭의 변경이 없고 장소의 이동도 없다. 장소의 이동과 명칭의 변경이 있는 것은 도동서원이 유일하다.

 

성종 때의 도학자 한훤당 김굉필과 일두 정여창은 단짝이요 절친이다. 성종에서 연산군까지 살면서 비슷한 삶의 궤적을 남겼다. 살아서는 단짝이었고 같은 해에 죽었고 사후 증직과 증시도, 문묘종사도 같은 때에 이뤄졌다. 현대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도 같은 날이다.

 

그러나 서원은 차이가 많다. 고향 선비들이 서원을 세운 건 일두는 한국 최초의 서원 소수서원이 건립된 지 10년 뒤인 1552년(명종7)이고, 한훤당은 남계서원이 창건된 지 16년 뒤인 1568년(선조1)이다.

 

일두 고향 서원인 남계서원은 함양 선비 남계오현이 주축이 되어 건립하였다. 끝까지 불굴의 의지로 완공한 사람은 개암 강익이다. 그러나 한훤당 고향 서원인 쌍계서원 창건을 주도한 현풍 선비들은 누구인지 관련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쌍계삼현인지, 쌍계오현인지 알 길이 없다.

 

남계오현(灆溪五賢)

 

반계(潘溪) 박승원(朴承元)[1516?~1561?] 潘南

 

매촌(梅村) 정복현(鄭復顯)[1521~1591] 瑞山 / 영빈서원

 

사암(徙庵) 노관(盧祼)[1522~1574] 豊川

 

개암(介庵) 강익(姜翼)[1523~1567] 晋州 / 남계서원

 

남계(灆溪) 임희무(林希茂)[1527~1577] 羅州 / 화산서원

 


 

일두를 모시는 남계서원이 1566년(명종21)에 사액이 내리어 사액서원이 된 소식이 현풍 선비들에게 큰 자극을 주어 분발하여 쌍계서원 건립을 추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쌍계서원의 중건 서원인 도동서원을 완공한 사람은 한훤당 외증손 한강 정구이다. 개암이나 한강이나 둘 다 남명 조식의 제자이다.

 

한강은 묘하서원을 주장하여 한훤당 묘소 아래 지금의 도동서원을 건립하는데 강력히 주도하였고 그에 유추하면 원터를 버리고 새터를 잡은 남계서원을 묘소 아래 쪽으로 옮겨 중건하게 하여 묘하서원을 만든 주역은 한강이 아닌가 추정한다. 그 묘하서원 남계서원을 한강이 참배한 것이지 현재의 자리 남계서원을 참배한 것은 아니다.

 

한강은 쌍계서원 터가 도심과 가까워 시끄럽고 한훤당과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곳이라고 싫어하였다. 심지어 한강이 <한훤당김선생연보>를 편찬했는데 쌍계서원 창건 연대도 표기하지 않았다. 『경현록』에서 보로동서원을 표기하면서 언급했을 뿐이다. 한강 정구의 연보에,

 

한강연보 제1권 / [연보(年譜)] / 32년 우리나라 선조 37년 갑진(1604) 선생 62세

 

○ 현풍(玄風) 사류들과 의논하여 송림(松林)에 서원을 세웠다. - 현풍현 동쪽에 지난날 쌍계서원(雙溪書院)이 있었다. 이곳은 한훤당 김 선생을 향사하는 곳이었는데 임진년 전란에 불타 버렸다. 이때에 이르러 선생이 김 선생의 무덤 밑(墓下)에 터를 잡아 서원을 옮겨 세웠다. 방백(方伯)이 계청(啓請)하여 도동서원(道東書院)이라 사액(賜額)하였다. -

 

묘하서원 도동서원도 초건 쌍계서원을 계승하여 중건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새로운 창건이 아닌 것이다. 현풍 쌍계서원은 <선조실록> 선조 6년 계유(1573) 11월 28일(갑진)에 경주 옥산서원, 영주 이산서원과 함께 사액된 사액서원이다. 사액서원인데도 창건기나 사액상소나 사액제문이나 관련기록이 전혀 없다.

 

쌍계서원은 한강의 주장에 따라 현재의 자리인 오설리, 송림, 보로동 묘하에 중건하였고, 보로동서원으로 불리다가 다시 도동서원으로 사액 받아 도동서원이 되었다. 장소의 이동이 있었고 명칭의 변경이 있었으나 역사는 계승된다. 쌍계서원의 강당명이 중정당이고 문이 환주문으로 도동서원과 같다. 계승한 것이다.

 

서원은 지명 명칭이 원칙이나 사액과정에서 소수서원, 소현서원, 도동서원, 도남서원, 경현서원, 상현서원, 충현서원, 숭현서원, 흥현서원, 인현서원, 역동서원, 연경서원, 문헌서원, 문회서원, 충렬서원, 의열서원, 창절서원, 사충서원처럼 의미명 명칭도 가끔 존재한다. 도동서원은 사액서원으로 지명 명칭에서 의미명 명칭으로 변경된 사례로는 9개 서원에서 유일하다.

 

쌍계서원터는 달성군 유가읍 쌍계리 산16번지인데 다리 건너 입구에 작은 표지석이 있을 뿐이다. 현풍향교와 쌍계서원터 사이에 대구경북과학기술원이 존재하니 공부하는 학생들의 학교 자리 배움터임을 먼저 증명한 것이다.

 

<선조실록> 선조 39년 병오(1606) 12월 26일(경신)에, 경상 감사 유영순(柳永詢)의 치계로 인하여, 임란에 불타버린 네 서원의 사액을 다시 내려주도록 하였다. 천곡(川谷)·금오(金烏)·쌍계(雙溪)·남계(藍溪) 등 네 서원은 옛 편액 이름은 그것으로 쓰되, 본도로 하여금 고증해 계문하게 한 뒤에 특별히 거듭 하사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지명의 이동이 있어 쌍계 자리가 아닌데 명칭이 같을 수 없다고 논란이 되고 명칭의 변경이 있어 유독 여기만 도동서원으로 새 명칭의 사액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 예가 생길 뻔한 것이 선산의 금오서원이다. 금오산 자락에 있어 금오서원으로 사액되었는데 현재의 남산(藍山) 자락에 이건하여 장소의 이동이 있었다. 한때 남산서원이라고 하였다. 다시 사액을 신청할 때 무심코 옛 사액명칭으로 신청하여 받았다. 받고 보니 장소의 이동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라서 논란이 있었다. 한강 정구에게 문의하니 장소의 이동은 명칭의 변경이 불가피하다고 답하였다.<寒岡先生文集 答金烏院生> 명칭 변경 사액 신청을 다시 해야 하는데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흐지부지하다가 금오서원 그대로 유지되었다.

 

남명과 퇴계의 제자 이조정랑 덕계 오건이 정미사화 순교유현 충재 권벌의 시호 사시관이 되어 1571년(선조4)에 창녕현감으로 있는 충재의 아들 권동보에게 가서 시호 선포식을 하고 선물로 받은 비단을 쌍계서원에 기증하였다. 영조 때 『덕계집』을 만들 때 쌍계서원이라고 놔둬야 하는데 당시 명칭인 도동서원으로 고쳐 판각하였다. 같은 것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德溪集 有與道東書院儒生書> 산청 사람 덕계가 고향 근처인 일두의 남계서원에 기증했으면 좋았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학봉 김성일도 1576년(선조9)에 이조좌랑으로 김굉필의 시호 사시관이 되어 현풍 본가에 가서 시호 선포식을 하고 기념으로 받은 예물 비단을 쌍계서원에 기증하였다. 학봉은 일두의 시호도 받들고 함양 본가에 가서 시호 선포식을 하고 받은 예물 비단을 똑같이 남계서원에 기증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일두의 시호는 1577년(선조10) 9월 9일에 이조좌랑 운강 조원이 사시관으로 와서 선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시호의 수여가 윤허되고 1년 뒤에 한훤당은 받고 2년 뒤에 일두가 받은 것은 후손들의 접수 준비상황에 좌우되는 것이다. 현장 접수가 완료되어야 시호가 내렸다고 하는 것이다. 사액도 마찬가지다.

 

아무튼 도동서원은 쌍계서원을 계승한 것이다. 장소의 이동과 명칭의 변경이 있었으나 그 역사는 계승된 것이다. 도동서원의 역사는 쌍계서원의 창건 역사를 계승해야 한다. 한 뿌리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금오서원이 장소의 이동을 고려해 남산서원으로 다시 사액되어 명칭의 변경이 있었다면 금오서원의 창건 역사는 빼고 남산서원의 중건 역사만으로 서술했을까. 아닐 것이다. 마찬가지로 도동서원도 쌍계서원 창건 역사는 외면하고 도동서원 중건 역사를 창건 역사처럼 서술하면 부당한 것이다. 쌍계서원 창건 역사가 바로 도동서원 창건 역사다. 도동서원은 1568년(선조1)에 창건되었다.

 

9개 서원을 창건순으로 다시 배치하면 다음과 같다.

 

소수서원(1543년), 남계서원(1552년), 도동서원(1568년), 옥산서원(1573년), 도산서원(1574년), 필암서원(1590년), 병산서원(1613년), 무성서원(1615년), 돈암서원(163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