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수(성균관 부관장, 지리산문학관장, 일두기념사업회장)
역사란 승자의 기록이라고 한다. 승자는 나타나고 패자는 사라진다. 국사만 그런 것이 아니라 지방사 특히 서원도 마찬가지다. 함양 남계서원은 세계문화유산이다. 남계서원에 가면 승자의 역사만 볼 수 있다. 패자의 역사는 아무도 드러내지 않아 알 수 없다. 알지 못한다. 흔적을 볼 수 없다. 당대에는 패자였지만 후대에는 승자가 되기도 하니 승패는 병가지상사가 맞다. 일희일비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남계서원 승자의 역사는 개암파가 새기어 게시한, 개암 강익 명명의 현재 당재 명칭이다. 패자의 역사는 옥계파가 새기어 게시한, 옥계 노진 명명의 초기 당재 명칭이다.
남계서원은 남계오현이 건립을 주창하였고 불굴의 의지로 초지일관 노력하여 완성한 이는 개암 강익이다. 그러나 그는 너무 빨리 세상을 떠나, 사액서원 원장 1년 만에 별세하여 이후의 주도권은 옥계 노진과 풍천노씨가 장악하였다.
개암 사후 1567년에서 옥계 사후 1578년까지 10여년 간 남계서원은 제2대 원장 사암 노관, 제3대 운고 노사훈, 제4대 죽헌 정지, 제5대 홍와 노사예 등 원장이 따로 있었지만 옥계 노진이 실세로 지도한 것은 사실이다.
<천령지>의 광거당
일두 증손 춘수당 정수민(1577~1658)이 1643년(인조21) 경에 편찬한 <천령지> 서원 조에 남계서원에 대해 소개하였다.
“남계서원은 남계의 동쪽에 있다. 가정 31년 임자 명종 7년(1552)에 개암 강선생이 첫째로 동지들과 함께 서구연 군수에게 고하고 비로소 공역을 일으켜 가정 40년 명종 16년(1561)에 준공하였다. 사당이 높고 상쾌하였고 강당이 넓고 탁 트였다.
강당은 광거당(廣居堂)이라 하였다. 그 동쪽엔 의방재(義方齋)와 유예헌(遊藝軒)이 있고 서쪽엔 경직재(敬直齋)와 애련헌(愛蓮軒)이 있다. 문은 준도문(遵道門)이라 하였다. 안에 왼쪽, 오른쪽에 연못이 있고 길은 그 사이에 말미암는다. 당재의 명칭은 모두 문효공(옥계 노진)이 정한 것이다.
이해 2월 16일에 일두선생 위판을 봉안하였다.
명종 병인년 가정 45년 명종 21년(1566) 7월에 액호(額號)를 선사(宣賜)하였다.
정축년(1577,선조10) 9월에 신주(神主)의 제호를 시호로 개서하였다.
우리 동국은 서원의 설립은 죽계가 처음이고 이 서원이 그 다음이다. 만력 정유(1597,선조30)에 왜구에게 소실되었고 뒤에 구라마을에 이건하였다. 임자년(만력40,광해군4,1612)에 옛터에 중건하였다.
처음 사액하던 날에 옥계 노진(1518~1578.0823)과 청련 이후백(1520~1578.1007)이 주선한 공로가 있었다. 문효공이 춘추 축문을 지었다. (글 생략) 퇴계선생 시 (글 생략)
노홍재 경임안 서문
무인년(1578,선조11) 4월에 죽헌 정군이 병이 들어 원장직을 교체하려 하며 나를 후임으로 삼았다. 고을의 원로도 내가 서원 일을 잘 안다고 하여 그 후임을 찬성하였다. ”(이하 생략)
홍재 노사예(1538~1594)는 남계서원이 20년의 세월이 흘러 역대 원장들의 행적이 민멸되어 사적을 고찰하기 어려울까 염려하여 경임안을 지은 것이다. 서문을 쓴 해는 기묘년(1579,선조12) 8월이었고 쓴 곳은 남계서원 초기 당재 명칭의 서재 마루 애련헌(愛蓮軒)이었다. 지금의 애련헌은 동재 마루이다.
<개암집>의 명성당
개암 강익(1523~1567)은 <개암집>을 남겼다. <개암집>은 개암파라 할 수 있는 함양의 저술가 춘와 양천익(1638~1711)이 편찬하여 1686년(숙종 12)에 함양 남계서원에서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문집 상권에 개암이 지은 <남계서원기>가 실려 있다.
개암은 남계서원이 사액을 받고 한 달이 된 시점인 1566년(명종21) 8월에 <남계서원기>를 지었다. 거기에서 서원을 세운 뜻을 기록하여 강당을 명명하여 명성당이라 하였으니, <중용>의 명하면 성하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강당의 양쪽 방 협실 이름은 동쪽은 거경재, 서쪽은 집의재라 하였다. 정자의 거경궁리와 <맹자>의 집의하여 생한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기숙사 동재는 양정재라 하니 몽괘로써 바름을 키운다는 데서 뜻을 취한 것이고, 서재는 보인재라 하니 <논어>의 벗으로써 인을 돕는다는 데서 뜻을 취한 것이다. 동서재의 마루는 애련헌, 영매헌이라 하고, 앞 대문을 준도문이라 하니 이름은 각기 의미가 있다. 사액을 받아 남계서원이라 하였다.
개암이 설명하지 않았는데 애련은 연꽃을 사랑한 주렴계의 <애련설>에서 취한 것이고 영매는 매화를 읊은 송나라 항주 서호 은자, 매화를 사랑하여 아내로 삼은 매처학자(梅妻鶴子)의 화정 임포의 아취를 취한 것이다. 애련헌은 동재의 마루, 영매헌은 서재의 마루이다.
<개암집>에 실린 <남계서원기>는 보이지 않는 오류가 있다. 본문에 개암이 일두를 지칭하여 우리 문헌공(文獻公)이라고 하였다. 개암 생전에는 일두에게 시호가 내리지 않았다. 이 글을 지은 당시에는 시호가 없었다. 개암 사후 8년 뒤인 1575년(선조8)에야 문헌공이란 시호가 윤허되고, 그 2년 뒤에야 이조좌랑 운강 조원이 시호를 가지고 와서 선포하였다.
개암은 문헌공이라고 하지 않았는데 후인이 소급 적용한 것으로 문집을 간행하며 고쳐 새긴 것이거나 만약에 이 글을 위조한 거라면 시호가 당시에 이미 내린 것인 줄 알고 그냥 쓴 것이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개암이 이 기문을 짓고 나서 바로 현판으로 새기어 게시했을까? 개암연보에는 개암 42세(1564,명종19) 때 김우홍이 군수로 부임하자 부탁하여 기숙사 동서재를 짓게 하고 강당 등 각 건물의 이름을 붙이고 함양 명필 매암 조식에게 큰 글씨로 써서 걸게 하였다고 하였다. 각 건물의 명명과 게판 이후 2년 뒤에 <남계서원기>를 지은 것이다.
방위는 틀려도 명칭은 같은 것은 애련헌(愛蓮軒)이고 똑같은 것은 준도문(遵道門)이다. 1918년 <일두집>의 중간시 여러 선비들이 <애련헌연구(愛蓮軒聯句)>를 지은 곳은 남계서원 현재 당재 명칭의 동재 마루 애련헌(愛蓮軒)이다. 홍재가 <경임안서>를 쓴 애련헌과는 반대 방향이다.
<1552~1687년 남계서원경임안(蘫溪書院經任案)>과 <낙남집>
개암이 명명했다는 강당과 재사의 편액은 지금 그대로 걸려 있으니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눈으로 보아 증명되는 것이다. 그런데 옥계가 명명했다는 강당과 재사의 편액은 지금 걸려 있지도 않고 유물도 남아 있지 않으니 그런 사실을 어찌 증명하겠는가. 기록을 통해서 고찰할 수밖에 없다.
남계서원 소장 고문서 책자인 <1552~1687년 남계서원경임안(蘫溪書院經任案)>에 보면 남계서원 제4대 원장 죽헌 정지가 1573년(선조6) 11월에 취임하고 1574년(선조7) 6월에 옥계선생의 뜻을 받들어 처음으로 강당과 동서재 당재의 명칭을 정했다고 하였다. 처음으로란 말이 중요하니 개암이 이미 명명해 게시했다면 처음으로란 말을 쓰지 않을 것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0여년 전에는 남계서원에 오면 강당인 광거당, 동서재인 의방재와 경직재의 편액을 보았을 것이다.
죽헌 정지 원장은 또 1577년(정축,선조10) 9월에 일두의 문헌공 시호 선포식을 치르고 생원 입재 노흠을 초청하여 신주의 명호를 고치는 작업도 하였다. 위패에 문헌공 일두 정선생이라고 다시 썼을 것이다.
숙종 때 남계서원 유사, 나중에 원장이 된 춘와 양천익(1638~1711)이 1684년(갑자,숙종10) 봄에 개암 강익이 제향된 남계서원 별묘를 중수하고 이듬해(을축,1685,숙종11) 봄에는 남계서원 강당에 국기판, 분정기판, 남계서원기판, 소시판(小詩板-칠언절구제영)을 현판하였다. <주자대전>도 구비하였다.
현재 지금 보는 남계서원 강당 명성당에 게시되어 있는 현판들-국기판, 분정기판, 남계서원기판 등이 1685년(숙종11)에 제작, 게시된 것이다. 이때부터 개암이 명명한 당재 명칭이 현판, 게시된 것이다. 이전까지는 옥계가 명명한 당재 명칭이 현판, 게시된 것이 존재했던 것이다. 싹 다 뜯어고친 것이다.
지금 남계서원에는 남계서원의 학칙이라고 할 수 있는 원규판이 더 걸려 있고 국기판도 고종홍휴황제까지 기록되어 있으니 일제 시대에 다시 만들어 게시한 것이다. 시판은 하나도 없다. 있던 것이 분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춘와는 기축명현 수우당 최영경의 증손서로 남인 인사와 교유하니 남인이다. 남계서원 현판을 정비하고 이듬해(병인, 1686, 숙종12)에 남계서원에서 <개암집>을 간행하였다. <개암집> 편찬 작업도 춘와가 주편한 것이다. 개암연보도 춘와가 편찬한 것이다.
춘와는 <개암집> 보각 사업으로도 바쁜 와중에도 남계서원 별묘에 제향되던 개암을 문헌공묘에 승격, 추향하는 것을 1689년(기사,숙종15) 9월에 상소하여 윤허받았다. 상소문은 개암 방손 소치재 강명세가 지은 것이다. 그리하여 그토록 갈망하던 문헌공묘 개암 배향 숙원사업이 우암 송시열이 사사되고 석 달 뒤, 기사환국의 남인 집권 때 이루어진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도 마찬가지로 통틀어 1574년(선조7)부터 1685년(숙종11) 이전까지는 남계서원의 현판은 옥계 명명의 당재 명칭인 광거당, 의방재, 경직재 등이 게시되어 있었고 숙종 중기 이후에야 개암 명명의 당재 명칭인 명성당, 양정재, 보인재 등이 게시되어 현재까지 건재하다.
경남 함양군은 인조 때 양경홍의 난으로 인해 함양현으로 강등되었다. 이것을 읍호강등이라고 하는데 한 10년 지나면 원상복구시켜주는 게 관례이다. 1629년(인조7) 읍호강등 때의 함양군수는 파직되고 새 함양현감으로 부임한 이가 낙남 최산휘(1585~1637)이다. 낙남은 함양현감 시절에 역대 군수의 관례에 따라 남계서원에 백미 1석을 기부하였다. 1년밖에 안 다스렸는데도 선정비가 세워졌다.
낙남보다 20년 연하인 지인 함양출신 운제 노형필(1605~1644)이 있는데 그는 여헌 장현광(1554~1637)의 제자이다. 운제가 낙남의 죽음에 만사를 지어 보냈다. 그 소서에 옛날 기사년(1629,인조7) 가을에 남계의 광거당에서 공을 해후하였다고 하였는데 그 광거당이 바로 남계서원의 강당 광거당이다. 그 시점이 바로 낙남이 함양현감으로 부임하고 남계서원에 참배한 해이다.
조선 후기에 바뀐 남계서원 명성당에선 많은 선비들이 모여 강학하고 음영하며 시를 지어 남기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게 함양 지곡 외조부댁(노릉盧稜) 출생 산청 선비 회정 민재남(1802~1873)의 <차남계서원명성당운(次灆溪書院明誠堂韻)>이다. 원문 생략.
1956년(병신,단기4289)에 함양향교에서 편찬한 <함양군지> 단묘 남계서원 조에 <천령지>와 <남계서원지>를 인용해 옥계와 개암이 명명한 광거당과 명성당 당재 명칭을 둘다 소개하였다.
마무리
함양 남계서원에 가서 승자와 패자의 역사의 부침을 볼 수 있어야 역사를 안다고 할 수 있다. 승자는 친근하여 주도권을 쥐고 패자는 소원하여 주도권을 상실한 것이다. 옥계 노진을 남계서원에 배향하자고 갈천 임훈이 주장했는데 당시 경상감사가 따로 모셔라 해서 당주서원을 세워 떨어져나갔다. 당주서원에서 병향하던 옥계와 개암이 못마땅한 옥계파에 의해 개암이 밀려나 남계서원에 정착하고, 개암파가 득세한 뒤론 옥계의 자취는 남계서원에서 지워졌다.
남계서원 창건 초기에 서원부지를 옥계의 조카 강재 노사준(1536~1566)이 기부하였고 옥계 노진이 남계서원 교수로서 학생을 지도하였고 노씨들이 대대로 금품을 기부하였고 초기 원장과 임원을 역임하면서 남계서원 발전에 공헌하였다. 주 근거지를 옥계 제향의 당주서원 건립 이후 종손의 남원 이주 및 남원 창주서원으로 변경함으로써 남계서원에서의 영향력은 사라졌다.
패자인 옥계 명명의 당재 명칭 현판은 철거되고 승자인 개암 명명의 당재 명칭 현판이 당당히 게시되었다. 그 이후 패자의 자취는 찾아볼 수 없다. 기록만 남아 은밀히 전해질 뿐이다. 패자부활전을 벌일 일은 없는 것이고 패자의 역사를 되돌릴 수도 없는 것이다. 남계서원의 연혁에 이러한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주면 되는 것이다. 남계서원 설명문에 호기심 차원에서 한줄 보태주는 것으로 족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