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영 성균관 의례부장
근간에 유교신문 인터넷판에 <특별기고> ‘공자탄신일 국가기념일 지정의 환영과 유감’이라는 제하의 글이 올라왔다. 이 글을 읽고 몇 가지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필자는 석전과 공자탄신일을 혼동하고 있다.
석전에 관한 기록은 무수히 많은 전거를 가지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먼저 살펴보자. 『세종실록』 128권, 오례 길례 서례 시일조에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무릇 제사(祭祀)에 일정한 날이 있는 것이 있으니, 중춘(仲春)·중추(仲秋)의 상무(上戊)와 납일(臘日)에 사직(社稷)에 제사하고 삭망(朔望)과 세시(歲時)에 종묘(宗廟)·계성전(啓聖殿)·문소전(文昭殿)·건원릉(健元陵)·제릉(齊陵)에 제향(祭享)하고[凡祀有常日者 仲春仲秋上戊及臘日祭社稷 朔望歲時 享宗廟 啓聖殿 文昭殿 健元陵 齊陵] <中略> 중춘(仲春)·중추(仲秋)의 상정(上丁)에 문선왕에게 석전(釋奠)하고, 삭망(朔望)에 문선왕에게 전을 드리고[仲春仲秋上丁釋奠文宣王 朔望奠文宣王] <以下 省略>
『태학지』 권3에도 “석전(釋奠)은 중춘중추(仲春中秋) 상순(上旬) 정일(丁日)에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이러한 기록에 따르면 석전은 음력 2월과 8월 상정(上丁)일에 봉행하는 것이지 공자탄신일과는 관계가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필자는 마치 성균관과 향교에서 봉행하는 석전이 탄강일에 진행되었던 것처럼 주장하고 있다.
필자는 실제 조선왕조부터 현재까지 석전은 몇 차례 변동이 있었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①태조 7년 이래 매해 음력 2월과 8월 상정일에 석전을 봉행
②1937년부터 양력 4월과 10월의 15일에 봉행
③1953년부터 음력 8월27일 한 번만 봉행
④1956년에 다시 음력 2월과 8월 상정일으로 복원
⑤2007년 전국유림대회에서 공부자의 기신일을 양력으로 환산한 5월11일에 춘기석전, 탄강일을 양력으로 환산한 9월28일에 추기석전을 봉행하기로 의결하여 3년간 유예하여 시행하기로 함
⑥2013년 총회에서 석전 일자는 자율적으로 봉행하기로 의결
⑦2014년 추기석전부터 상정일로 환원
⑧2017년 성균관 총회에서 공부자탄강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하기 위해 춘기석전은 음력 2월 상정일, 추기석전은 양력 9월28일에 봉행하기로 의결
⑨2021년 성균관 총회에서 석전은 음력 2월과 8월 상정일으로 환원하기로 의결
이와 같이 성균관은 총회 등의 결의를 거쳐 변천을 거듭해 왔으며, 현재는 성균관과 향교에서는 2월, 8월 상정일에 지내는 곳이 많다.
둘째, 공자탄신일에 관한 문제다.
공자탄신을 기록하는 문헌은 매우 부족한 것이 사실이며, 공자탄신일을 학술적으로 고증한 자료도 마땅하지 않다.
중국 민속학자인 진연산(陳連山)은 “공자의 탄생일은 사실상 고증된 것이 아니며” “사마천의 『사기(史記)』 가운데 ‘공자세가(孔子世家)’ 부분에도 공자의 생일이 명확하게 기재돼 있지 않다.”고 했다.
주자는 『논어집주서설《論語集註序說)』에서 사마천의 『사기』 가운데 공자세가를 인용하여 ‘공자는 노나라 양공 22년(B.C551) 경술년 11월 경자일에 태어났다.[사기세가왈(史記世家曰) 공자명구(孔子名丘) 자중니(字仲尼) 기선송인(其先宋人) 부숙량흘(父叔梁紇) 모안씨(母顔氏) 이노양공이십이년(以魯襄公二十二年) 경술지세(庚戌之歲) 십일월경자(十一月庚子) 생공자어노창평향추읍(生孔子於魯昌平鄕陬邑)]’라고 기록했다.
『춘추좌씨전』에는 공자의 출생에 관한 기록이 처음부터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가장 빠른 것은 『춘추공양전』과 『춘추곡량전』이다. 우리는 이 두 책에서 관련 기록을 살펴보고 추론을 해보기로 하자.
①『춘추공양전』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노양공이십일년(魯襄公二十一年) 구월(九月) 경술삭(庚戌朔) 일유식지(日有食之) 동(冬) 시월(十月) 경진삭(庚辰朔) 일유식지(日有食之) 조백내조(曹伯來朝) 공회진후(公會晋侯) 제후(齊侯) 송공(宋公) 위후(衛侯) 정백(鄭伯) 조백(曹伯) 거자(莒子) 주루자어상임(邾婁子於商任) 십유일월(十有一月) 경자(庚子) 공자생(孔子生)”
②『춘추곡량전』을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노양공이십일년(魯襄公二十一年) 구월(九月) 경술삭(庚戌朔) 일유식지(日有食之) 동(冬) 시월(十月) 경진삭(庚辰朔) 일유식지(日有食之) 조백내조(曹伯來朝) 공회진후(公會晋侯) 제후(齊侯) 송공(宋公) 위후(衛侯) 정백(鄭伯) 조백(曹伯) 거자(莒子) 주자어상임(邾子於商任) 경자(庚子) 공자생(孔子生)”
『춘추공양전』에는 ‘십유일월’, 즉 11월의 ‘경자일’에 공자가 탄생했다고 말하고, 『춘추곡량전』에서는 10월의 경자일에 공자가 탄생했다고 말한다. 달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자세히 살펴보면 금방 발견할 수 있다. 공양전은 곡량전에 비하여 ‘시유일월(十有一月)’이라는 네 글자만 추가되어 있는 것이고, 다른 문자는 기본적으로 같다.
③주자는 사마천의 『사기』 가운데 공자세가를 인용하여 ‘공자는 노나라 양공 22년(B.C551) 경술년 11월 경자일에 태어났다’라고 했다. 이 외에도 『공총자』와 『공자가어』에는 공자탄신에 대한 기록이 없다. 다른 문헌은 더욱 늦게 나왔으므로 설득력이 없다.
공자의 탄생년도에 대해서 『춘추좌씨전』에서는 기록하지 않고 있다. 다만 애공 16년 여름 4월 기축일에 돌아가셨다고만 기록하고 있다. 두예(杜預, 진(晉)나라 때의 학자이자 정치가로 저서 『춘추좌씨경전집해』는 춘추학으로서의 좌씨학을 집대성하였고 『좌씨전』을 춘추학의 정통적 위치로 올려놓았다고 평가된다. 이 책은 현재에도 가장 기본적인 주석으로 꼽힌다) 공자는 노나라 양공 22년에 태어나 73세를 살았다고 하고, 공양전(公羊傳)과 곡량전(穀梁傳)은 모두 양공 21년 기해(己酉)에 태어났다고 한다. 오늘날 공자의 생몰년대는 사마천의 『사기』에 의거하고 있다.
이렇게 복잡한 공자의 탄신일에 대한 기록을 어느 것이 맞는지 따지기는 어려운 형편이다. 다만 최근에 알려진 바로는 공자의 탄신일은 양력으로는 기원전 10월9일로 보는 학자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의 생일을 기념하려면, 양력이라면 10월9일로 해야 하고, 음력이라면 8월21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의 의견이 있다.
그렇다면 지금의 8월27일은 어디 나온 것일까?
『산동성지(山東省志)‧공자고리지(孔子故里志)』에 하력(夏曆) 8월 27일로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필보괴(畢寶魁) 요녕대학(遼寧大學) 교수는 이런 논란이 일자 「공자 생년생일 상고」라는 글을 통해 “10월9일에 태어난 것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현재 중국과 대만은 양력 9월28일, 홍콩은 음력 8월27일을 공자탄신일로 지정하고 있다. 곡부공씨대종회에서 간행한 『공부자성적도(孔夫子聖蹟圖)』에 공자탄신일은 음력 8월27일이며, 양력 9월28일이라고 했다.
이렇게 공자탄신일에 대한 날짜는 매우 복잡하고 문헌적 근거도 서로 다르기 때문에 쉽게 결론 지을 수 없다. 그런데 필자는 음력 8월27일만이 옳다고 주장하고 있다.
셋째, 글을 쓰는 태도에 대한 문제다.
본인이 알고 있는 것만 옳고 남은 그르다고 평가하는 오류는 지양해야 한다. 예를 들어 “성균관과 일부 향교의 꼼수”, “유림이라는 긍지를 엿 바꿔 먹은 것인가?” “그 저항이 결코 만만치 않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등등 이런 표현은 적어도 유림총회의 의결을 통해서 진행하고 있는 유림들에 대한 정면 반박이고 모욕이다. 개인의 의견을 말하는 것은 자유이다. 그러나 위에서 논한 것처럼 정확하지도 않고 문헌적 근거도 박약한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유림을 비난하는 것은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다.
넷째, 민주주의 원칙은 다수결에 있다.
필자가 아무리 반대해도 유림총회에서 결의하고 전국 유림이 동의한 사안은 모두 따르는 것이 맞다. 이것이 진정한 유림이요 민주시민의 태도일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전국유림총회의 결의에 따른 것이라고 해도 이에 대한 이론이 없을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물론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개인의 의견은 얼마든지 피력해도 좋으나 그것을 진리처럼 주장하고 유림을 선동하는 말은 결코 옳지 못한 것이다.
다섯째, 음력만 옳고 양력은 그르다는 것도 문제이다.
요즘은 달력도 음력 표기를 생략하고 양력만 명기된 것이 많다. 종묘제례도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전통제례의식으로 대제를 봉행하고 있다.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며, 가치의 문제도 아니다. 음력을 지키는 것이 유림의 자존심과 긍지일까?
민주사회에서 의사결정은 어쩔 수 없는 다수결에 의해서 해야 한다. 그리고 결정이 되었으면 따라주는 것이 올바른 도리다.
이것을 두고 ‘반협박조’로 말을 하는 것은 유림답지 못한 처사임에 틀림없다. 가뜩이나 유림의 의견을 통일하기가 어려운 형편에 잘못된 정보를 흘리고 자기만 옳다고 주장하는 행위는 자제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