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림시론

<특별기고> 한국문학관과 천년 우정의 서원

김윤수(성균관 부관장, 성균관유도회총본부 부회장, 일두기념사업회장, 지리산문학관장) 2024년 (사)한국문인협회 수필분과 국립대만문학관 심포지엄이 지난 5월24일부터 27일까지 대만 대남시에 있는 국립대만문학관에서 개최되었는데 주최는 권남희 수필분과 회장, 좌장은 최원현 한국수필가협회 명예이사장이었다. 필자는 전 한국시인협회장 김광림 시인의 아들 대만 수평

오흥녕 2024. 7. 30.

 

김윤수(성균관 부관장, 성균관유도회총본부 부회장, 일두기념사업회장, 지리산문학관장)

 

 

 

2024년 (사)한국문인협회 수필분과 국립대만문학관 심포지엄이 지난 5월24일부터 27일까지 대만 대남시에 있는 국립대만문학관에서 개최되었는데 주최는 권남희 수필분과 회장, 좌장은 최원현 한국수필가협회 명예이사장이었다. 필자는 전 한국시인협회장 김광림 시인의 아들 대만 수평과기대학 김상호(金尚浩) 교수, 대만 산문가 린원이(林文義), (사)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장호병 수필가와 함께 발표했다.

 

필자는 <임어당(林語堂:린위탕)과 이어령(李御寧:리위닝)>를 발표했는데 전통문화의 전도사에서 기독교의 선교사로 변신한 공통점이 있음을 밝혔다. 다 아는 이야기이지만 새삼 한·중 최고의 수필가를 쌍벽으로 손꼽아본 것이다. 발표하고 대북으로 가서 임어당고택박물관을 탐방한 것은 보람찬 일이다. 아산시의 이어령문학관은 어찌 되고 있는가.

 

국립대만문학관은 2003년 옛 시청사를 개편한 것이다. 대만문학은 국가문학인가, 지방문학인가? 전시물을 보니 대만성의 지방문학 같다. 그렇다면 국립중화문학관(國立中華文學館)은 없는가? 찾아보니 없었다.

 

대륙의 중국은 어떤가? 중국현대문학관이 1985년에 개관하였다. 대만은 왜 중국문학관이 없는가? 대만은 이제 지방의식을 못 벗어나 중국의 일개 성에 머무는 존재가 된 것 같다. 중화민국의 존심이 아직도 존재하는가? 대만공화국으로 독립하지도 못하는 존재이다.

 

심포지엄에 앞서 지난 5월20일에 2026년 개관을 목표로 국립한국문학관이 착공식을 거행하였다. 한국문학관은 이제 시작되었다.

 

그런데 그 비전에 한국문학의 과거, 현재, 미래를 보여준다고 하고 문학 분류나 문학 장르 이야기는 없다. 한국문학은 현대문학, 고전문학, 한문학의 3대 분야를 종합해야 하고 문학진흥법에 의한 갈래, 곧 시, 시조, 소설, 희곡, 수필, 아동문학, 평론의 7대 장르를 망라해야 한다. 의견 수렴 설문지에도 장르 항목은 없고 문학단체장 초청 간담회도 (사)한국수필가협회는 빠졌으니 공산당처럼 수필은 유한계급의 부르주아 반동문학이라고 배척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의성군 한국 최초의 문묘배향 최치원문학관, 강릉 생육신의 으뜸 매월당기념관, 오누이 천재문인 허균·허난설헌기념관, 증평 독서왕 김득신문학관, 영월 불우한 천재시인 김삿갓문학관, 나주 임종에 곡하지 말라고 한 천하제일호걸 백호문학관은 한문학의 문학관이니 고전문학과 근현대문학만 언급한 국립한국문학관의 계획은 재고되어야 한다.

 

문학관은 문인을 기념하는 것이다. 조선시대 서원은 유교인을 기념하는 것이다. 서원은 강당과 사당이 있어 교육과 제향을 병행한다. 문학관은 전시와 연구를 하는 것이다. 제향, 곧 신앙이 빠진 기념 시설이다.

 

조선시대는 우정이 돈독한 친구지간의 성리학자 쌍벽의 유교인이 많았다. 일두와 한훤당이 그렇고 율곡과 우계, 서애와 학봉, 한강과 동강, 오성과 한음, 우암과 동춘이 그러하다. 일두와 한훤당, 율곡과 우계, 우암과 동춘은 친구지간에 문묘에 나란히 배향되었고 다수의 서원에도 병향되었다. 일두와 한훤당은 서원에도 나란히 병향되어 살아서나 죽어서나 천년 우정이 돈독하다.

 

일두는 안음현감을 지냈고 한훤당은 현풍의 본가와 합천 가야산의 처향에 살았다. 안음에서 현풍 가는 사이에 일두와 한훤당의 강학과 유람처 거창 수포대, 합천 지동암, 소학당, 영귀정, 주학정, 고령 벽송정, 현풍 이노정이 동선에 있다. 거창 수포대에 도산서원(道山書院)이, 합천 주학정에 이연서원(伊淵書院)이 건립되어 일두와 한훤당이 나란히 병향되었다. 지금은 두 서원 다 훼철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경주의 동리목월문학관은 소설가 김동리와 시인 박목월을 기념하지만 친구지간의 우정이 빛나는 쌍벽 문인의 문학관이다. 일두와 한훤당이 병향된 서원처럼 천년 우정이 빛나는 친구지간의 문학관이 많이 건립되길 기원한다.

 

거창 도산서원은 한강 정구의 제자인 모계 문위가 오도산 북쪽 산제동(수포대)에 한훤당과 일두를 위하여 서원을 건립하자고 주창하여 논의가 무르익다가 중지되었으나 후학이 이어 완성하였다.

 

수포대에 서원을 건립하는 것은 너무 외지다는 이론도 제기되었으나 동계 정온은 그대로 추진하였고, 동계 정온의 제자인 팔송 정필달이 거창군수 이태영(李泰英,1612~?, 甲午1654,효종5來丙申1656,효종7去)에게 협조 요청하고<與李侯 泰英○丙申> 송천이 경상감사에게 역부와 경비 등을 보조 요청하는<道山書院營建時呈巡營文> 등 팔송과 팔송의 제자인 송천 김천일이 노력하여 1657년(정유년, 효종8) 가을에 착공하고 중단했다가 재개하여 완성하였다. 한훤당과 일두를 병향하고, 스승 동계를 배향하며 제향을 올렸다. 병향과 배향이 동시에 이루어진 것이다.

 

1659년(효종10년, 현종 즉위년)에 서원이 완공되고 팔송이 사액 신청 상소를 올리고, 1660년(현종1)에 사액 윤허가 내리고, 1662년(현종3)에 사액이 봉행되었다. 사당에 한훤당과 일두를 봉안할 때 봉안문은 남명학파의 종장 겸재 하홍도가 짓고 춘추향 축문은 송천이 지었다. 누가 지은 축문이 맘에 안 들었는지 모르나 송천이 지은 것은 개정 축문이다. <도산서원개정문헌공상향문>인데 <일두집>에는 <도산서원춘추향축문 김천일>이라고 하였다. 보통은 한훤당을 주자에, 일두를 장남헌에 비유했는데 이 글에선 일두를 여동래에 비유하였다.

 

<문헌공실기> 중간본(1743, 영조19) 제현찬술에는 <도산서원춘추축문> 김지평천일제라고 실려있는데 <일두선생집> 초간본에선 누락되었다. 동리 이은상의 <도산서원 현묘임인 사액제문>은 실렸다. 거창 선비들의 도산서원 자료 누락에 대한 항의가 있자 <일두선생집> 중간본에서 정필달의 <도산서원청액소>와 함께 수록하였다. 조선 말기에는 회재 이언적을 병향하여 4현 서원이 되었는데 연고가 없는 회재가 병향된 이유는 미상이다.

 

도산서원이 있던 곳은 모현정이 세워져 있다. 한훤당의 동서인 흥해최씨 평촌 최숙량이 한훤당과 일두와 함께 강학하였다고 하여 삼현을 기념하여 평촌 후손 삼어 최경한(1875-?)이 1898년(광무2)에 건립한 것이다. 그렇지만 도산서원 역사에는 평촌이 등장한 적이 없다.

 

합천 이연서원은 한사 강대수(1591-1658)가 처향이 합천인 한훤당을 위하여 주도하여 세운 서원이다. 한훤당의 절친이며 왕래한 일두를 병향하는 서원으로 건립하였다. <한사선생연보>에 의하면 병술년 한사 56세 때 이연서원을 창건했다고 하였다. 이 병술년을 근거로 일두 정여창의 <일두집>에서 1586년(병술, 선조16)에 창건했다고 하였다. 이 병술년은 한사가 태어나기 5년 전이니 한사가 창건했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연대를 잘못 소급한 것이다.

 

<한사선생연보>는 <한사집>과 한 질인데 그것만 떼어 따로 유통하면 문집만 보게 되는 사람들은 한사의 행적을 제대로 알 수 없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 단행본 연보를 사부 전기류로 분리시키는 작업은 잘못이다. 편리하고 합리적인 연구를 방해하는 행위이다. 문집을 연구하는 것은 시문과 인물을 동시에 탐구하는 것이다. 한국문집총간에 수록할 때 단행본 연보를 부록이나 전집으로 합편시키는 정책 전환이 중요하다.

 

한사가 56세 때인 병술년(1646, 인조24)에 이연서원을 창건한 것이다. 창건 때 <이연서원상량문>을 지었다. 창건하고 <이연서원한훤당김선생봉안제문>, <이연서원일두정선생봉안제문>, <한훤당선생춘추향사축문>, <일두선생춘추향사축문>을 지었다. 창건시 강당은 남계서원과 같은 명성당, 동재는 존양재, 서재는 진수재, 대문은 조도문(造道門)이라고 하였다. 사당은 명칭이 없었다.

 

<문헌공실기> 중간본(1743, 영조19) 제현찬술에는 <이연서원춘추축문>은 작자미상으로 표기하였고 <일두집>에서 강대수라고 표기했으나 그의 생몰연대를 파악하지 못해 60주년을 뛰어넘어 계산하여 오류가 발생한 것이다. 그 오류는 <남계서원지> 제서원액호에서도 시정되지 않고 선조 정해년(1587, 선조20) 건립, 현종 경자년(1660, 현종1) 사액이라고 기재되었다.

 

서원의 역사로 널리 참고하는 기록으론 <연려실기술>과 <대동지지>의 서원조가 유명한데 둘다 합천 이연서원에 대해 선조병술, 만력병술이라고 <일두집>의 오류와 같으니 <일두집>이 이런 기록을 참고하고 고증하지 않은 채 오류를 답습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조선왕조 국가기록에도 오류가 기재되어 전승되었다. <증보문헌비고> 학교고 경상도 서원조에는 합천 이연서원이 있는데 연혁은 <남계서원지>의 오류와 같다. <춘관통고> 길례 경상도 원사조에는 이연서원이 선조 병술 창건이라고 <일두집>과 오류가 같다. 사람의 생몰을 파악하지 않고 역사를 기술하니 오류가 발생하는 것이다.

 

한사는 <이연서원상량문>을 지었는데 한사의 친구인 기옹 박공구(朴羾衢, 1587-1658)도 <이연서원상량문>을 지었다. 내용상 한사는 강당의 상량문이고 기옹은 사당의 상량문인 듯하다. 한사 친구 학포 정훤(鄭暄, 1588-1647)은 59세 때인 병술년(1646, 인조24)에 이연서원 창건 일로 해인사로 들어가며 정인홍 유적을 지나면서 오언율시<過仁弘故居 伊淵書院創建會議事入海印寺時過此>를 지어 풍자하였다. 이 율시<過倻鄭破宅 幷序>는 같은 글로 그대로 <한사집>에도 실려 있으니, 한 사람은 작자가 아니다. 남의 글을 원고만 보고 잘못 편입한 것인데 누가 원작자가 아닌지, 누구 잘못인지 미상이다. 학포는 <이연서원이안축문>도 지었는데 사당을 고쳐 세우며 신주를 이안할 때 지은 것인데 그 내막은 알 수 없다.

 

이연서원을 낙성하고 기옹은 원생들과 역양 문경호의 서재인 우곡재를 방문하고 칠언절구 시<伊淵書院落成後 與諸生 往尋尤谷齋>를 읊었다. 굳이 낙성 기념 우곡재 탐방을 왜 했을까. 경치 때문이었을까. 이연서원에 대한 역양의 무언가를 추념하기 위한 것이었을까. 기옹은 또 이연서원을 세우기 위해 터를 닦을 때 고유한 글인 <이연서원개기고유문>을 지었다. 우곡재는 정인홍과 정구의 제자인 역양이 33세 때(1588, 선조21) 세워 강학한 곳인데 경치도 좋다고 이름났다. 이 글들을 통해서 보면 이연서원 건립에 한사 강대수, 기옹 박공구, 학포 정훤이 공헌한 것이다.

 

우암 송시열의 제자인 손암 조근(趙根, 1631-1680)은 가야산을 유람했는데 고령에서 출발하여 우곡서재를 탐방하고 이연서원을 참배하고 서원 옆의 주학정(住鶴亭, 고운이 학을 타고 왔다가 머물렀던 곳)에 오르고 정인홍의 고택 터를 지나고 해인사 승려가 메는 가마를 타고 절을 관람하였다.

 

소론학파의 종장 해은 강필효(姜必孝, 1764-1848)의 족형인 안동 선비 백록 강시환(姜始煥, 1761-?)은 함양 출신 일두 10대 종손 전 청하현감 종암 정덕제의 호인 쇠북바위 종암에 대한 기문을 지어주기도 하였는데, 합천의 이연서원 유생을 대신하여 서원에 우암선생을 병향시켜달라는 상소를 짓기도 하였다. 우암 송시열은 합천 함벽루(함벽루 친필 석각, 함벽루기 현판)와 홍류동을 탐방하고 고운 최치원의 <제가야산독서당> 시를 써서 새겨놓게 하였고, 일두의 안의 광풍루에 기문을 써주기도 하였다. 우암의 유적에 있는 이연서원에 같은 문묘성현으로 병향하게 하자는 뜻을 담은 것이다.

 

대원군의 서원훼철령 때 이연서원도 철거되었는데 선비들이 강당을 보존하여 학업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군수에게 요청하여 받아들여져 강당은 보존되고 육영당이라고 명명하였다. 성재 허전이 그 기문을 지었다.

 

현재 일두와 한훤당을 병향하는 친구지간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에 건립한 서원으론 거창 도산서원과 합천 이연서원이 저명한데 둘 다 헐리고 복원하지 못하였다. 나머지 일두와 한훤당이 병향된 서원으로 상주 도남서원-영남오현 병향, 나주 경현서원-동방오현 병향, 화순 해망서원-점필재사제오현 병향, 하동 악양정덕은사-주자 주향 일두한훤당탁영돈재 배향, 아산 인산서원-동방오현 병향 미복원, 연안 오현서원-동방오현 병향 미상 등이 있다.

 

거창 도산서원과 합천 이연서원은 복원 기미가 없는데 그래도 합천은 소학당에 숭현사가 건립되어 일두와 한훤당이 병향되고 있다. 이것도 하동 악양정과 덕은사처럼 사당과 강당 구비의 시설이니 하동을 영계서원으로 복원하여 서원 기능을 활성화시킴이 좋을 듯이 소학당과 숭현사를 사당과 강당 구비 이연서원으로 복원하고 서원으로 활성화시킴이 좋을 듯하다. 그리하여 천년 우정의 서원을 계속 존속시켜 주자와 장남헌 같은 한훤당과 일두의 아름다운 성리학자의 천년 우정을 기리며 기념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