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봉 조헌 선생은 성균관과 전국 234개 향교의 문묘 대성전에 배향된 아국 18현의 한 분으로, 매년 춘·추기 석전과 삭·망분향례를 올리는 우리나라 유교의 선현이다. 그러니 그분과 관련된 일이라면 유림으로서 남다를 수밖에 없다.
최근 중봉 선생의 위패를 모신 칠백의총 종용사(從容祠) 순의제향과 관련해 일부 불교 언론과 인사들의 왜곡 주장이 도를 넘고 있다.
칠백의총 정비사업서 800여 의승 순국을 외면했다며 조선시대 내내 의승은 외면하고 중봉 선생 등 700 의사만 추모했다거나 430년간 차별이 지속됐다는 등의 주장을 하더니 심지어는 제2차 금산전투 패배 원인은 충정심만으로 무모하게 돌진한 중봉 선생의 전략 부족 때문이었다며 폄훼까지 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왜 이런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는 걸까. 이유야 짐작이 가지만 결코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는다.
칠백의총이 아니라 천오백의총? 금산의총?
일부 불교 언론에서는 관계자의 발언을 인용하며 같은 장소에서 왜군에 맞서 싸우다 1500명이 모두 전사했지만 중봉 선생의 친지와 유생들은 800명의 스님을 뺀 채 700명만 의사라며 ‘칠백의총’으로 명명하고 조선시대 내내 이들만 추모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도대체 이 800명이라는 숫자는 어디서 나왔을까.
금산전투와 관련한 각종 사료에서는 중봉 선생이 이끄는 의병과 영규대사가 이끄는 승병의 싸움터를 달리 기록하고 있다.
중봉 선생과 700 의사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곳은 연곤평(延昆坪)이고, 영규대사와 의승이 왜적을 토벌하기 위해 전투를 벌인 곳은 와여평(瓦余坪, 금성면 대암리)으로 약 4~5㎞ 떨어져 있다.
게다가 영규대사는 금산전투에서 사망한 것이 아니라 부상을 입고 공주로 돌아와 순국했다. 중봉 선생과 같은 장소에서 전투를 벌이다 같은 장소에서 순국한 것은 아니다.
800명이라는 숫자도 금산전투에서 사망한 의승의 숫자가 아니라 굳이 따진다면 선조실록에 기록된 청주성 전투 참가 의승의 숫자가 아닌가.
금산전투에서 사망한 의승의 숫자는 정확히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금산전투에서 사망한 의승의 숫자는 선조수정실록에서는 수백 명, 중봉집에서는 300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칠백의총이라는 명칭은 중봉 선생과 아들 조완기 휘하 의병 700 의사가 순절하자 중봉 선생의 제자들과 고을 사람들이 그들의 뼈를 묻고 붙인 이름이다.
금산전투에 참전한 중봉 선생과 700 의사에 관한 모든 사료의 기록은 일치한다. 반면 의승이 묻힌 근거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사정이 이러한데 처음에는 이름을 천오백의총이라 바꿔야 한다고 하더니 이제는 금산의총이라고 하자고 한다. 도무지 사리에 맞지 않는다.
종용사는 이름 그대로 유교 사당이다
종용사는 중봉 선생과 700 의사가 순절한 곳에 유림들이 세운 유교 사당이다.
1603년(선조 36) 충청도와 전라도의 유림들이 중봉 선생과 700 의사가 순절한 곳에 순의비를 세웠고, 1647년(인조 25) 사당을 건립해 중봉 선생과 700 의사의 위패를 모셨으며, 1663년(현종 4) 종용사로 사액을 받았다. 그러니 순의제향에 유교 제례를 올리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일제에 의해 훼손된 종용사 재건도 유림이 중심이 되어 금산군민이 기념사업회를 조직하고 성금을 모아 이뤄진 것이다.
그럼에도 의승 차별 운운하며 불교 제향을 하겠다고 하는 것은 교회에서 불교 의식을 하겠다는 것과 다름없으니 그야말로 억지 주장이다. 불교 사찰에서 교회 의식을 하겠다면 과연 용납하겠는가.
유교 사당에서는 유교 의례, 불교 사찰에서는 불교 의례, 교회에서는 기독교 의례를 하는 게 당연하다.
영규대사를 홀대했다?
각종 사료들을 보면 영규대사를 기리는 기록들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다. 게다가 영규대사의 충절과 순국을 칭송한 유림도 한둘이 아니다.
1738년(영조 14)에는 영규대사가 불도를 닦던 갑사에 표충원을 세웠고 지금은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52호로 지정돼 있다. 1813년(순조 13)에는 영규대사 정려를 세웠고, 현재 충청남도 문화재 제56호로 지정돼 있다.
조정은 영규대사를 정2품 지중추부사에 추증했고, 선무원종공신 1등에 녹훈했다. 영규대사의 영정을 안치한 진락산 진영각이 세워졌으며 의선이란 편액이 하사됐다.
게다가 종용사가 사액된 1636년(현종 4)부터 영규대사를 모시는 승장사란 별묘가 함께 있었다고 전해진다. 칠백의총 관리사무소에 따르면 종용사에 영규대사 위패를 봉안한 것은 1951년이다.
하지만 별묘가 있었다고 해도 그 역시 유교 의례를 행했음이 분명하다.
이들 논란은 의병의 날은 있는데 의승의 날은 없다며 이는 의승에 대한 차별이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의병의 날이 있으면 의승의 날도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의승은 의병이 아니라는 말인가.
의병이란 외적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해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군대, 또는 그 군대의 병사를 가리키는 말로서 창의군이라 불리기도 했다. 임진왜란이나 대한제국 시기 왜적과 일본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싸운 각지의 민병을 말한다.
의병은 농민이 주축을 이루었고 그들을 지도한 관료와 사림, 승려들이 참여해 신분 구성이 다양했다. 의병은 이들 모두를 아우르는 말이다.
그들 주장대로라면 의병에 참여한 각 신분별로 그 기념일을 따로 정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 역시 사리에 맞지 않는다.
숭유억불하며 불교 차별이니 의도적인 홀대니 운운하는 건 이제 그만 할 때도 됐다. 지금이 불교를 차별하는 시대인가. 칠백의총 종용사 순의제향 논란은 해당 문중만의 문제가 아니다. 일부 문중 운운하면서 사실을 호도해서는 안 된다. 우리나라 유교 전체와 관련된 문제임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