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로 '서울 문묘 성균관'에 건립되어 존재했던 계성사의 일제강점기 모습이다.
서울 문묘 성균관의 계성사는 1701년(숙종 27)부터 1954년까지 명륜당 서쪽에 존재했다.
성균관의 계성사는 성균관대의 교내 확장으로 1954년 철거되어 오른쪽 안내판으로만 확인가능하다.
1774년 제주를 찾은 순무어사 홍상성에게 제주 유생들이 올린 계성사 설립 청원서이다.
1854년(철종 5) 창건 당시 기록된 제주향교 계성사 상량문이다.
성균관유교문화활성화사업단의 유튜브 영상 중 '제주향교 계성사'에 관한 장면이다.
'제주를 대표하는 유림'이었던 정헌(靜軒) 김용징(金龍徵, 1809-1890) 선생이 쓴 '계성사' 현판이다.
김용징 선생은 서울대 규장각 등이 보관중인 『숭정기원후사계묘식사마방목』에서도 확인된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운영하는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에서도 김용징 선생 내용을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인 1935년에 제주 유림들의 공의로 건립된 '성균진사정헌김선생비'도 보존되고 있다.
2023년 12월에 제주향교는 계성사 중건기념식을 열면서 일방적으로 현판의 위치를 바꿨다.
무단으로 위치를 바꾼 '계성사 현판'의 모습이 뚜렷이 확인된다.
석농 이종우가 쓴 것으로 알려진 (경남 밀양시의 탁삼재에 있는) 「대암(臺巖)」 글씨를 보면 제주향교 계성사 뒷부분에 있는 현판의 글씨와 형태가 확연이 다르다.
『철종실록』에 의하면, (제주향교 계성사 창건 1년전인) 1853년부터 이종우는 예방승지였다.
『철종실록』에 의하면, 1855년(철종 6) 6월 25일에 이종우는 이조참판에 임명되었다.
무단으로 현판의 위치를 바꿨던 제주향교 전교는 지역언론 인터뷰에서 근거없는 이야기를 주장했다.
제주향교 사무국장 재직시 '2019 전국유림지도자 제주 전진대회' 본행사에서 사회를 맡았다.
'2019 전국유림지도자 제주 전진대회'에서 기획총괄팀장으로 일했다.
사무국장 재직시 제주향교에 향교발전기금을 헌성한 사실이 <유교신문>에 보도됐다.
김익선 제주향교 전 부전교·사무국장, 김해김씨좌정승공파 정헌문중회장
1. 제주향교와 계성사 창건 경위
1392년(태조 1) (지금의 제주시) 관덕정(觀德亭) 동쪽 400m 떨어진 곳에 위치한 향교전(鄕校田)에서 창건된 제주향교(濟州鄕校)는 1581년(선조 14) 1월 21일 임명된(『선조실록』 권 15, 선조 14년 1월 21일) 김태정(金泰廷, 1541-1588) 목사가 부임해 ‘성묘(聖廟)는 오랫동안 우러러 보아야할 곳인데 민가(民家) 사이에 끼어있고, 사장(射場, ‘활터’라는 뜻으로 관덕정을 말함) 아래에 있으니 숭경(崇敬)하는 뜻을 이룰 곳이 못 된다’고 하여 다음 해인 1582년(선조 15)에 제주성 동남쪽 모퉁이인 가락천(嘉樂泉, 제주성 내의 최대 식수였던 가락쿳물을 말하며 위치는 지금의 제주시 이도1동에 있음) 동쪽에 위치한 고령전(高齡田)으로 처음 옮겼다.
그러나 1668년(현종 9) 이인(李𡐔, 1608-1669) 목사가 ‘터가 좁고 험하며 동·서무 간살의 얽이가 더욱 좁아서 위판을 병렬할 수가 없고, 묘정(廟庭)과 성첩(城堞)의 거리가 10보에 불과한 데다 큰 내가 가까워 허물어져 무너질 염려가 있다’고 하여 옛 가락천 서쪽으로 두 번째로 옮겼으나 1724년(경종 4) 제주성 안의 큰불로 향교도 불에 타 없어져 신유익(愼惟益, 1671-1733) 목사에 의해 두 번째 위치였던 고령전으로 옮겨 다시 지었다.
1754년(영조 30) 10월에 부임한 홍태두(洪泰斗, 1697-?) 목사는 ‘향교의 자리가 낮고, 습기가 많다’고 생각했던 김몽규(金夢煃) 전임 목사의 의견과 계획에 따라 이듬해인 1755년(영조 31) 제주성 남문 밖의 광양(廣壤, 지금의 삼성초등학교)으로 네 번째로 옮겼다.
1826년(순조 26) 임명된(『일성록』 순조 26년 5월 1일) 심영석(沈英錫, 1767-?) 목사는 부임 후 ‘광양에 위치한 향교 땅의 형세가 좋지 않고, 사나운 비바람으로 해마다 수리하게 되니 옮겨야 한다’고 판단하여 이설 계획을 세웠으나 다음 해인 1827년(순조 27) 파직되어(『순조실록』 권 29, 순조 27년 6월 15일) 실행하지 못했고, 이어서 부임한 이행교(李行敎, 1779-?) 목사가 제주성 서쪽인 용담동에 위치한 지금의 자리 4,639평을 고상신(高相信)이 기증하자 그 해 이곳으로 다섯 번째로 옮겨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제주향교 경내는 제주도 유형문화재 제2호(1971.8.16.)로 지정되고, 대성전은 지난 2016년 6월13일 대한민국 보물 제1902호로 지정되었다.
공부자의 부친 제국공 숙량흘(齊國公 叔樑紇), 안자의 부친 곡부후 안무유(曲阜侯 顔無繇), 증자의 부친 내무후 증점(萊蕪侯 曾點), 자사의 부친 사수후 공리(泗水侯 孔鯉), 맹자의 부친 주국공 맹격(邾國公 孟激) 등 유교 5성(五聖)의 부친 위패를 모시고 제향하는 공간인 계성사(啓聖祠)는 조선 중기인 1539년(중종 34)년부터 이미 명나라를 다녀온 사신에 의해 국왕에게 보고되기 시작하여(『중종실록』 권 92, 중종 34년 11월 8일) 조정에서 논의되다가 1701년(숙종 27)에야 서울 문묘 성균관에 처음 만들어진(『숙종실록』 권 35, 숙종 27년 4월 23일) 후 1739년(영조 15)에는 큰 읍(邑)과 주(州), 부(府)는 풍년을 기다렸다가 큰 고을마다 세우게 하였다(『영조실록』 권 49, 영조 15년 6월 15일/『일성록』 순조 31년(1831) 10월 13일).
‘탐라(耽羅, 제주의 옛 이름) 향교에서 계성(啓聖)의 위패를 양무(兩廡, 동무와 서무)에 설치하는 것은 계성사(啓聖祠)의 의도와는 다르다’는 진달(進達)이 올라와 묘당(廟堂, 의정부)에 내려졌으나 정지되고 시행되지 않았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정조실록』 권 2, 정조 즉위년(1776) 9월 28일)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제주지역에서도 계성의 위패를 모시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던 것으로 보이고, ‘그때(=1739년의 영조 어명) 즉시 하교를 따라 거행하지 못한 이유는 필시 사력(事力)이 부족한 데서 말미암았을 터이다’라는 장령 김영업(金英業, 1784-1835)의 사직 상소의 설명(『일성록』 순조 31년(1831) 10월 13일)으로 볼 때 육지에서 떨어진 섬의 특성상 건립에 필요한 재화들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장령 김영업은 1831년 당시에 이미 상소의 끝부분에서 ‘제주에 계성사를 세우도록 명해줄 것을 청하고(『일성록』 순조 31년(1831) 10월 13일), 신상흠(愼尙欽, 1794-1874)도 상소로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다가 1853년(철종 4)에 부임하여 1855년(철종 6) 8월까지 재임한 목인배(睦仁培, 1794-1877) 목사 시절인 1854년(철종 5)에 ‘제주향교에 계성사를 건립할 것을 건의’한 유생 고사징(高泗澄, 1806-1865), 김용징(金龍徵, 1809-1890) 등의 요청을 영의정 김좌근(金佐根, 1797-1869)이 국왕 철종(哲宗, 재위 1849-1863)에게 아뢰어 윤허를 받아 창건하고 10월8일 대성전에 고유제를 거행하였으며, 5위의 위판은 다음 날인 10월9일 낮에 계성사로 봉안하며 봉안제를 시행했다.
이때 정헌(靜軒) 김용징(납읍 출신)이 제액(題額)했고, 목인배 목사가 직접 쓴 상량문(上樑文)이 지금도 보존되어 있으며, 계성사 창건을 기념하는 별시(別試)가 열려 문과에 김명악(金命岳, 납읍 출신), 오승현(吳承鉉, 정의 출신), 박수룡(朴秀龍, 곽지 출신) 등 3명, 무과에 이언길(李彦吉·일명 友植, 옹포 출신) 등 9명을 급제시켰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계성사 건물도 손상되어 1875년(고종 12) 제주목사 이희충(李熙忠)의 첩보에서 ‘본주의 계성사(啓聖祠)를 고쳐 짓는 일은 거의 연기(年紀)가 지나고 동우(棟宇)가 헐어 장마만 지났다 하면 새는 곳이 많아 부득이 때에 맞추어 개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안제(移安祭)와 환안제(還安祭)의 향축을 계품하여 내려보내 주소서’라고 했던 기록(『승정원일기』 고종 12년(1875) 10월 3일)과 이병휘(李秉輝, 1851-?) 제주부 관찰사·제주목사가 중수(重修)했다는 내용이 전하고 있으며, 1974년 김경석 제14대 전교(재임 1973-1975) 재임 시에 국고보조와 유림 헌성금으로 중수하였으나 흰개미가 건물에 칩입하는 등 건물이 급격히 노후됨에 따라 제주특별자치도 세계유산본부에서 원형 복원을 전제로 지난 2021년 5월10일부터 2022년 9월 말까지 건물를 완전 해체하고, 정밀실측 용역을 거친 후 「계성사 중건공사」를 진행해 2023년 12월 중순에 완공했다.
2. 제주향교 계성사 현판의 역사
‘검은 바탕에 흰 글씨로 적힌’ 제주향교 계성사의 현판은 1854년(철종 5) 계성사 창건 당시 국왕 철종이 하사한 붓으로 당시 제주향교 교수로 있던 정헌(靜軒) 김용징(金龍徵, 1809-1890) 선생이 직접 제액(題額, 액자에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씀)하여 게시한 후 171년 동안 보전되어 왔다.
한국인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포털사이트인 네이버(www.naver.com)에서 ‘金龍徵’이라는 단어를 넣어 검색하면 수백 개의 관련 자료를 안내하는 정보가 쏟아질 정도로 제주지역을 대표하는 유림으로 알려져 있는 김용징 선생은 ‘6세에 이미 글을 깨우치기 시작하여 1832년(순조 32) 전주(全州)에서 열린 승보시(陞補試, 소과(小科) 초시의 하나로 시험에 합격하면 복시(覆試)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짐)와 1838년(헌종 4) 제주의 승보시(陞補試)에 합격하였다. 1843년(헌종 9)에는 계묘 식년 진사시 3등에 58위로 합격하여 성균진사(成均進士)가 되었고, 제주향교·정의향교(旌義鄕校)·대정향교(大靜鄕校) 3곳의 교수직을 역임하며 제주의 교육 발전에 기여하였다. 1854년(철종 5)에는 제주목사(濟州牧使) 목인배(睦仁培)가 제주향교 내에 계성사(啓聖祠)를 창건하자 그는 제액(題額)을 써서 사당에 걸어두었다. 당대 제주 최고의 학자로 많은 문하생들을 배출시켰으며, 학식이 매우 풍부하고 글씨 또한 잘 써서 ’사림(士林)의 영수‘라는 칭송을 들었다.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1833-1907)의 『면암집(勉菴集)』 부록(附錄)의 연보(年譜)에 의하면, 유배당한 최익현이 1873년(고종 10) 12월3일 70리 뱃길을 거쳐 전라남도 완도군(莞島郡) 소안도(所安島)에 도착하여 교유한 문사(文士)들 중의 한 명으로 언급되고 있다’는 내용이 우리나라의 대표적 학술기관인 한국학중앙연구원(원장 김낙년)이 운영하는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http://people.aks.ac.kr/front/dirSer/ppl/pplView.aks?pplId=PPL_6JOc_A1809_1_0020529)에 게재되어 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등이 소장하고 있는 『숭정기원후사계묘식사마방목(崇禎紀元後四癸卯式司馬榜目, 1843년(헌종 9) 설행된 식년시의 사마방목)』에서도 뚜렷하게 확인되는 김용징 선생이 제주향교 계성사의 현판을 썼다는 것은 제주지역 향토사와 제주향교의 역사를 공부하고 알던 이들에게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상식으로 전해왔고, 일제강점기인 지난 1935년 제주시 애월읍 남읍리 2787에 건립된 「성균진사정헌김선생비(成均進士靜軒金先生碑)」를 비롯한 여러 기록에도 분명하게 남아 있다.
한편 서울 문묘 성균관의 명륜당을 비롯한 전국의 여러 문화재에 똑같은 이름의 현판이 있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듯이 제주향교 계성사에도 또 다른 현판이 안쪽에 존재한다.
‘흰 바탕에 검은 글씨로 적힌’ 현판으로 석농(石農) 이종우(李鍾愚, 1801-?)가 쓴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국조보감』 등에서 강원감사, 형조판서, 공조판서, 이조판서, 예조판서, 병조판서, 함경도 관찰사 등을 두루 지낸 것으로 확인되고 시문과 서화에 뛰어나 석농체(石農體)라는 서체를 이룬 것으로 알려졌지만 제주지역에서 근무했다거나 제주향교를 방문했다거나 제주향교 계성사의 현판을 썼다는 어떠한 기록도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경남 밀양시에 위치한 탁삼재(卓三齋, 김녕김씨종중이 관리함)에 있는 「대암(臺巖)」이라는 현판이 석농 이종우의 글씨로 전해지고 있는데, 지금의 제주향교 계성사 뒤편에 있는 현판 글씨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힘이 넘치는 모양이라 같은 사람이 썼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최근에는 제주향교 전교의 일방적 주장을 담은 내용이 지역 언론에 기사로 보도되면서 ‘1854년 제주향교 계성사 창건 당시의 현판을 철종의 왕명으로 예조 좌랑 석농 이종우가 직접 썼다’면서 사액 현판임을 강조하고 있는데, 조선 왕조의 가장 철저한 기록유산으로 국왕조차 마음대로 볼 수 없을 정도로 엄격하게 관리되었던 『철종실록』에서의 이종우의 관직 기록들을 확인하면 예조 좌랑이었다는 사실은 전혀 없고 제주향교 계성사가 세워진 1854년을 전후한 시기인 1853년(철종 4)에는 예방승지(禮房承旨, 『철종실록』 권 5, 철종 4년 10월 10일), 1855년(철종 6)에는 이조참판(吏曹參判, 『철종실록』 권 7, 철종 6년 6월 25일)으로 재임 또는 임명되었던 사실이 적혀 있다. 만약 예조좌랑으로 재임하면서 국왕의 명으로 사액 현판을 썼다면 『조선왕조실록』 등의 중앙기관 관찬(官撰) 기록은 물론 제주지역 고문헌, 관찬 기록에 관련 내용이 단 한 건도 기재되지 않았을 리가 없다.
3. 제주향교의 납득할 수 없는 ‘계성사 현판’ 무단교체와 재교체 추진
지난 2023년 12월27일 오전 10시 제주향교에서 개최된 「계성사 중건 기념식」에서 처음으로 안쪽에 있던 ‘흰 바탕에 검은 글씨로 적힌’ 석농 이종우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현판이 전면에 게시되고, 정헌 김용징 선생의 ‘검은 바탕에 흰 글씨로 적힌’ 현판이 뒤로 밀려서 안쪽에 게시된 것이 확인되었다.
이날 행사에서 제주향교 전교는 인사말에서 ‘현판은 석농체로서 이름을 날렸던 예조좌랑 이종우의 글씨다’라고 했고, 안내 팜플렛 12쪽 각주 1번에서는 ‘계성사에는 현판이 2개 걸려 있다. 하나는 이종우 글씨이고, 다른 하나는 작자를 확정할 수 없는 현판이 있다’라고 적어서 계성사가 세워진 이후 171년 동안 한 번도 시도되지 않은 불법적이고, 임의적인 무단 현상 변경이 단순한 실수로 이뤄진 것이 아님을 드러냈다.
제주향교에서 김익선 전 사무국장과 같이 수석장의, 부전교로 활동했던 현재의 전교는 지역 유림들과 마찬가지로 ‘제주향교 계성사 현판 글씨는 정헌 김용징 선생이 썼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는데 하루 아침에 ‘작자를 확정할 수 없다’고 태도를 돌변한 것이다.
올해 1월20일 모 지역 언론에 보도된 「“왜 임금님의 사액 현판을 내세우지 못하나”」 라는 기사에서 제주향교 전교는 어떤 문헌이나 자료에서도 관련 내용이 확인되지 않는 일방적인 주장인 ‘제주향교 계성사 현판은 우리나라 계성사 중 유일한 사액 현판이다’ ‘사액 현판을 누가 썼는지 정확하게 판명이 가능하다’ ‘앞의 현판을 쓴 인물로는 두 명의 인물(오점과 김용징)이 거론되는 등 제작자를 알 수 없다’ ‘제주 도내 유림들도 사액 현판이 제대로 걸리기를 희망하고 있다’ ‘제주향교에 오래 다닌 원로분들은 사액 현판이 뒤에 걸린 건 잘못됐다고 말씀들을 하고 있다’는 등을 언급하며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것은 물론 자신과 극소수 인물들만의 의견을 마치 제주 유림의 공론인 것처럼 거짓을 전했다.
정헌 김용징 선생의 후손으로 구성된 ‘김해김씨좌정승공파 정헌문중회(회장 김익선)’는 지난 2023년 12월27일 제주향교에서 열린 「계성사 중건 기념식」에서 계성사의 현판이 근거나 공식 절차를 통해 교체된 것이 아님을 파악한 후 지난 2024년 8월21일 제주특별자치도 세계유산본부와 제주특별자치도의회 문화관광체육위원회 위원장에게 ‘계성사 현판 교체 게시 건 시정 요청서’를 제출하였고, 제주특별자치도 세계유산본부는 제주향교와 협의해 그해 8월29일에 이를 원상복구했다.
그해 9월19일자로 발송된 제주특별자치도 세계유산본부장의 공문에 의하면, ‘제주향교측 요청에 따라 (계성사 중건) 공사 시공사가 외부 현판과 내부 현판의 위치를 변경하였고, 이는 도지정 문화재인 계성사 현판에 대해 사전에 제주도지사에게 현상변경 허가를 받아야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이행하지 않아 ‘문화유산의 보존 및 활용에 관한 법령’을 위반한 것임이 확인’됐다.
즉, 전국의 향교·서원 관계자들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인 ‘지정문화재는 아무리 답답하고 못마땅한 부분이 있더라도 허가 없이는 아무것도 손대지 못한다’는 기본적인 내용조차도 제주향교 관계자들은 아무도 몰랐거나 알았으나 무시하고 마음대로 했다는 의미이다.
제주특별자치도 세계유산본부의 조치가 불편했는지 제주향교는 지난 2024년 9월19일 ‘계성사 현판 위치 변경에 따른 도지정문화재 현상변경 신청서’를 제출했으나 그해 10월25일 열린 제주도문화유산위원회 심의 결과 부결되었는데, 당시의 부결 사유는 「현판이 현재와 같이 걸린 연유에 대해서 명확히 밝혀진 바 없으므로 문화재 지정 당시의 원형을 유지하는 것으로 함. 그리고 『증보 탐라지』 등으로 보아 김용징이 제액(題額)한 것으로 보이며, 사액이라 하더라도 어필이 아니고, 오히려 제주인의 건의로 창건된 계성사에 제주인의 글씨로 쓴 현판이 독자성에 더 의미를 부여하고 위치 변경은 바람직하지 않다』라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현판의 위치를 바꾸려는 뜻이 강했던’ 제주향교는 ‘향교 유림의 총의’라는 등의 이유를 들며 올해 2025년 1월24일 ‘추가 현상변경 2차 신청서’를 제출했고, 이에 따라 오는 2월28일에 제주도문화유산위원회 현상변경 허가심의(2차)를 받을 예정이다.
제주향교의 납득할 수 없는 몰역사적(沒歷史的)인 시도에 대해 김해김씨좌정승공파 정헌문중회는 지난 2월7일 현재의 (정헌 김용징 선생이 쓴) 외부 현판에 대한 내용을 담은 『증보 탐라지(제주문화원, 淡水契, 1954)』, 성균진사정헌김선생비(成均進士靜軒金先生碑, 1935년 김익수(金翊洙) 제주향교·강철호(姜哲鎬) 대정향교·강학서(姜鶴瑞) 정의향교 직원(直員, 지금의 전교(典校)에 해당하는 당시의 직위) 및 문하생들이 건립하고, 비문은 장성흠(張聖欽) 제주향교 교원이 씀), 『제주의 편액(홍기표)』, 『제주유맥육백년사(濟州儒脈六百年史編纂委員會)』, 『제주 인물 대사전(김찬흡)』, 『제주서예 형성의 사적 연구(이용훈)』, 『조선시대 제주지역 편액 현판 연구(오창림)』, <한라일보> 기사, <제주환경일보> 기사 ‘[향토문화] 사림(士林)의 영수라는 칭송... 납읍리 김용징(金龍徵)비’(https://www.newsje.com/news/articleView.html?idxno=274446) 등 각종 입증자료를 추가 제출하며 ‘정헌 김용징이 쓴 것으로 다수의 자료에서 확인되고, (제주향교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작자 미상이 아니며, 계성사 창건 후 171년간 걸려 있던 편액 현판이자 도 지정 문화재를 현상 변경하는 것은 불법·부당하다. 문화유산의 보존 및 활용에 관한 법률 제3조(문화재 보호의 기본원칙) 규정인 ’문화재의 보존·관리 및 활용은 원형 유지를 기본원칙으로 한다‘를 준수하여 원형을 유지해야 하며, 역사 왜곡은 있을 수 없다’라는 내용을 제주도문화유산위원회 측에 전달하고, 근거 없는 일방적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지역민과 언론에 알리고 있다.
4. 유교문화유산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는 제주향교의 움직임은 즉각 중단되어야 한다
우리나라 전통문화유산은 대부분 유교 및 불교관련 내용들을 담고 있고, 특히 유교는 여러 기록을 통해 볼 때 삼국시대 이전부터 중국에서부터 전래되어 1392년 조선 왕조가 건국된 후 1910년 대한제국이 문을 닫을 때까지 최소한 518년 동안 국가 및 사회의 가장 중요한 이념으로 존재하면서 다양한 형태로 기록되고, 생활 및 문화유산에 녹아들었다.
이런 모습들은 국왕조차 함부로 볼 수 없을 정도로 엄격하게 관리되고 정확하게 기록되었던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국조보감』 등에 남아 전하고 있으나 모두가 알고 있듯이 1592년부터 1598년까지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1636년의 병자호란, 1910년부터 1945년의 일제강점기, 1950년부터 1953년까지의 한국전쟁 등 수많은 전란의 와중에 소실되거나 가난했던 시절에 자료의 중요성을 미처 인식하지 못한 채 불쏘시개 등으로 함부로 다뤄지면서 상당량이 없어졌으나 오히려 한국 유교문화유산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한 외국인들이 앞다퉈 자국으로 가져가거나 유통시키면서 지금도 환수운동을 벌이고 있으나 얼마나 많은 해당 자료들이 외국에 존재하는지조차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한국의 유교문화유산은 단순하게 개인의 창작품이나 유흥거리가 아니라 국가적 차원의 계획과 사회적인 흐름, 공동체의 단합과 발전에 기여하는 분위기 속에서 형성되었음이 밝혀지고 있으며, 예전의 마음대로 특정 개인이 가져가 버리거나 임의로 처분, 변경하는 모습 대신 반드시 국가 기관에 등록하고 관리를 받으며 허가나 승인 없이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시스템으로 전환된 지 오래이다.
예전의 기록이나 출입을 한 지 오래된 어른들의 기억 속 이야기들을 들어보면 성균관, 향교, 서원 등에 무수히 존재했던 엄청난 양의 자료들도 불과 몇 십년 사이에 대부분 없어져 비록 지금 존재하지 않는 바이더라도 성균관, 향교, 서원 등이 최근에 생긴 것이 아니라 오래 전에 창건되고 수많은 유림 선현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보존되어온 만큼 지역 사회에서 상식으로 통용되고, 지금 계신 어른들이 생전의 어른들에게 들었던 바가 전해온 것이라면 그것을 존중해온 것이 우리나라 전통문화를 대하는 관계 당국과 지역사회 및 유림의 기본 자세였다.
그런데 국가의 중요한 연구기관에서도 인정하고, 제주지역에서 발간된 주요 서적에도 명시되었으며, 일제강점기의 그 어려운 환경에서도 다수 유림의 공의(公議)를 모아 제작된 비석 등도 엄연히 존재하고, 우리나라 국민들이 가장 많이 애용하는 포털 사이트에서도 수백 건 이상의 관련 기사가 검색되는 분이 쓴 ‘계성사 현판’ 대신 어떠한 기록이나 자료에서도 관련 사실이 전혀 확인되지 않는 분이 쓴 것으로 추정되는 ‘또 다른 계성사 현판’을 무도하고, 무리하게 바꾸려는 모습이 지금처럼 계속된다면 결과적으로 유교문화유산에 대한 국가 기관과 지역사회, 관련 전문가들의 신뢰도를 떨어뜨려서 ‘유교기관에서는 근거 대신 주장만으로 뭐든 해달라고 조른다’라는 인식을 확산시켜 지금도 어려운 조건에서 사문진작과 유교 이념 수호를 위해 애쓰는 전국의 수많은 유림들에게 더 큰 피해를 만들 것이다.
정헌 김용징 선생의 4대 후손인 고(故) 김훈석님은 제주향교 도훈장, 성균관유도회 제주지부 제3대 회장을 역임(1977-1978년)하는 등 유림 원로로 활동하셨고, 5대 후손인 김익선 제주향교 전 사무국장은 제주도를 대표하는 유림 가문에서 어려서부터 선친과 집안 어른들로부터 ‘올바른 유교인, 제 역할을 하는 유림이 되라’는 가르침을 들으며 자라서 국립 제주대학교 총무과장(서기관) 등을 역임하는 등 40년간 국가공무원으로 봉직하다가 정년퇴직 후 자연스럽게 제주향교에 입문하여 관임장의, 수석장의, 사무국장, 부전교, 성균관 전인 등을 역임하면서 15여 년 동안 유림으로 봉사해왔다.
지난 2019년 7월7일부터 7월9일까지 제주도에서 성대하게 개최된 「도덕성회복 전국유림지도자 제주대회」를 총괄기획 및 추진하고, 주요 행사의 사회를 맡아 당시부터 유림활동을 하고 계신 전국의 어른들께서는 여전히 미천한 이 사람의 존재를 기억하실 것인데, 훌륭하신 선조의 뜻에 미력이나마 보태기 위해 2019년 8월에는 제주향교 유림들이 계신 삭분향례 후 조회 자리에서 당시 부성종 제32대 전교께 향교발전기금 1천만 원을 헌성했고, 그 내용들은 ‘창간 56년의 역사를 가진, 유교권 유일의 전국신문’ <유교신문>에 「제주향교 김익선 사무국장, 향교발전기금 1천만원 헌성」(/coding/news.aspx/1/1/23365) 기사로 보도되었을 뿐만 아니라 <삼다일보> 등 지역 언론에도 관련 사실이 알려지며 정헌 김용징 어른을 기억하는 많은 분들의 격려도 받았다.
유림의 집안에서 태어나서 유림으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유림으로 살아갈 입장에서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당연히 유림으로서의 자세일 것이며, 앞으로도 중앙뿐만 아니라 지역에서 유교전통문화와 유림의 존재 근거를 흔드는 시도들에 대해서는 오랜 세월을 함께 해온 어른들을 모시며 함께해 나가겠다.
뜻있는 전국 유림들의 지지와 도움을 요청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