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림시론

<특별기고> 주공의 고향 호경(鎬京) 찾아 일만리(一萬里)

진화은 원주향교 장의 유생(儒生)으로 중국 산동성 곡부(曲阜)는 여러 차례 방문했지만 지난 6월4일부터 6월8일까지 원용묵 전교를 포함한 25명의 원주향교 동료들과 서안(西安) 역사탐방을 가게 되어 ‘어쩌면 공자님과 관련이 있는 주공(周公)의 흔적을 볼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을 안고 출발했다. 주나라 시대의 호경은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성도였다. 주나라

오흥녕 2025. 6. 19.

 

진화은 원주향교 장의

 


 

유생(儒生)으로 중국 산동성 곡부(曲阜)는 여러 차례 방문했지만 지난 6월4일부터 6월8일까지 원용묵 전교를 포함한 25명의 원주향교 동료들과 서안(西安) 역사탐방을 가게 되어 ‘어쩌면 공자님과 관련이 있는 주공(周公)의 흔적을 볼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을 안고 출발했다.

 

주나라 시대의 호경은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성도였다.

 

주나라 시절에는 호경으로 불렸으며, 그 후 서주(西周)·서경(西京)·함양(咸陽)·서도(西都)·상도(上都)·서안(西安)·장안(長安) 등으로 불렸다. 주공의 부친 문왕(文王)의 조부 고공단보(古公亶父)가 부친 계력(季歷)과 경수 북쪽 기산에서 융족(戎族)이 침략하자 전쟁을 하면 많은 백성들이 희생된다며 농토를 양보하고 위수를 건너 이곳에 자리 잡았다고 한다. 이후 진(秦), 한(漢), 수(隋), 당(唐), 북조(北朝)까지 합하면 북경보다도 오래된 1,500년의 고도(故都)이기도 하다. 서안은 진령산맥에서 흐르는 황하의 중류로 위수, 경수, 낙수의 풍부한 물이 유입되어 관중(關中)평야를 옥토로 만들었고, 지리적으로는 함곡관(函谷關)을 막으면 외부 침입을 방어할 수 있는 군사적 요새이기도 하다.

 

공자께서 “나는 다시 주공을 꿈에서조차 볼 수 없게 되었다”며 그토록 보고자 했던 주공이 형님 무왕이 세상을 떠나자 조카 성왕을 도와준 최초의 수도이다. 무왕이 은나라 주왕(紂王)을 무너트린 후 관중 지역을 차지하고 중원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된 것이다.

 

이 강은 다시 서쪽 황하로 합류하였고, 또 진령산맥 남으로 흐르는 강은 촉땅 한중평야에 농생용수가 되었고, 다시 양자강에 합류했다. 관중과 한중, 두 평야를 두고 삼국지에서 보듯 위, 촉 간 전쟁이 치열했던 곳이며, 진나라 때부터는 실크로드로 로마에서 유럽까지 가는 무역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서안 시내에서는 아파트를 제외한 전체를 박물관으로 봐도 된다고 한다. 서안의 인구는 1,300만이라 하고, 크기는 경기도 정도이며, 섬서성은 우리나라의 1.3배나 된다고 한다. 5일간 이 고도를 다 보았다면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지난 6월4일 오전 8시 50분 인천공항을 출발해 현지시각 11시 30분 함양국제공항 3청사에 도착했다. 수속 속도가 인천공항과 비교되었다. 사전에 서안 공항에서 장안 시내로 진입할 때 위수(渭水)를 지난다는 정보를 들었다. 틀림없이 3,200년 전 고공단보께서 백성들과 여기를 건너왔을 것이고, 당시는 물도 깊었을 것이다.

 

수속을 마치고 나오니 현지 가이드가 기다린다. ‘할아버지께서 일제강점기에 흑룡강성 하얼빈에 정착한 조선족 3세이다’라고 소개했다. 강 이름을 물어보니 위수라고 했는데, 순간 가슴이 뛰었다. 그렇다면 문왕이 만났다는 여상(呂尙) 강태공(姜太公)이 낚시하다 만났다는 위수가 아닌가? 강폭이 매우 넓은데 모래톱이 많이 쌓여 있으며, 군데군데 준설공사를 하는 장비들이 보이고, 제멋대로 자란 잡목 사이로 방초(芳草)만 무성하게 보였다.

 

호경을 물어보니 잘 모르겠다고 하여 난감했다. 다행히 역사에 박식한 두 번째 나이든 여성 가이드에게 물으니 상세히 알려줬다. 위수 다리에서 상류로 17km쯤 올라가면 강태공이 낚시 한 마을에 표지판이 있다고 했다. 또 공항에서 20km 정도 시내로 가면 진나라 도읍 함양궁 터도 있는데, 건물이 없는 허허벌판이고 항우가 불살라 버렸다는 곳이며 지금은 유적지를 발굴 중이란다.

 

위수 다리에서 남쪽 시내로 들어오는 데 왼쪽으로 평평하고 드넓은 곳에 건물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진시황이 35년간 건설한 아방궁(阿房宮) 터로 완전히 불에 타버린 유적지이기에 누구도 들어가지 못하게 한단다. 간혹 작은 봉우리산이 보이는 데 그곳은 어김없는 왕릉이라고 알려준다. 고공단보께서 내려온 북서쪽 기산까지의 거리는 100km가 훨씬 넘을 것이라고 알려준다. 위수의 강태공이 낚시한 곳에서 문왕이 살던 곳까지 거리는 25km쯤 된다고 하니 충분히 말을 타고 강에 산책 나왔다가 여상을 만났다는 얘기는 허구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시내로 들어오는 도중에 산은 보이지 않고 넓은 관중 평야가 보이며 충분히 농토로 이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물어보니 대개가 고궁터이므로 개발제한구역이라고 한다. 제3공항 건설 중 유물들이 많이 나와 박물관을 만들고 있다고 한다. 능처럼 보이는 곳의 땅속은 도굴꾼들이 거미줄처럼 후비고 다녔다고 하여 다른 지역인들은 여기 사람들을 땅 잘 파는 ‘장안의 두더지’라고 부른단다. 서안하면 대표적 관광지로 진시황릉의 병마용갱(兵馬俑坑)은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기에 가장 비중 있게 다루어 보고자 한다.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한 병마용갱은 지난 1974년 7월21일 한 농부가 우물을 파다가 1호 갱을 발견했고 2, 3호 갱은 개발 중인 것을 이번에 보았다. 총 8천 명의 병마용이 묻혀 있다고 한다. 시황릉의 높이는 최초에 125m였으나 지금은 59m로, 현재도 계속 낮아지고 있다 한다.

 

능 위에는 어김없이 큰 나무들이 빽빽이 자라고 있다. 과거 도굴꾼들이 도굴하다가 얼마나 많이 죽었는지 파악도 안 되며, 지금은 능에 올라가지 못하게 통제하고, 만약에 오르다가 발견되면 무거운 벌을 받는단다.

 

병마용갱에는 관광객들이 얼마나 많은지 정신 차리지 못하면 길을 잃기가 쉽겠다. 1호 갱에서는 2천 명의 병용(兵俑)을 볼 수 있다. 능을 포함한 규모가 너무 커 개발은 반의반도 못 했다고 하며, 시황릉에서 병마용갱까지의 직선거리는 1.3Km 떨어졌으니 그 규모를 감히 짐작할 수 있다. 38년간 총 70만 명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능 주변에는 수은의 강을 흐르게 하여 만약 능에 손을 대면 자동화살발사 장치가 되어있다고 사마천의 『사기』에서 말한다. 또 은나라 때 시행하던 순장(殉葬)을 이곳에서는 3천 명에게 시행하고, 수은으로 방부처리했다고 하니 이사(李斯)와 조고(趙高)의 잔인함을 알겠다.

 

공자께서는 당시 기준으로 300년 전에 인간의 목숨을 중시하며 순장 제도를 한탄하셨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러한 연유로 중앙정부에서는 함부로 발굴하지 못하게 하고, 안전한 개발을 위한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고 한다. 단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유방(劉邦)은 먼저 함양에 입성하고도 궁을 훼손하지 않았는데, 뒤에 도착한 항우(項羽)는 궁궐을 모두 불태우고 시황릉까지 파손해 버렸다고 한다.

 

시황제(始皇帝)는 기원전 259년 2월 조나라 한단시에서 출생했다. 그때는 전국시대로, 칠웅(七雄)이 나라 간에 왕자를 교환해 전쟁을 막아보자는 것이 관례였다. 시황제는 210년 하북성 사구평대에서 49세의 나이로 마차 안에서 죽었다. 통일한 지 10년째, 수은 중독으로 고생하던 중 봄날에 자신의 땅이 얼마나 큰지 2년에 한 번꼴로 순행했고, 그 때는 다섯 번째였다.

 

당시는 도가사상을 신봉하던 때로, 신선의 술법을 믿는 방사들은 궁궐에서 어의(御醫)로 활동했으므로 전국에서 이름있는 방사들은 궁에 다 모였다. 산동성 청도에 가면 도가인 노자(老子)의 큰 동상이 있다.

 

47세에 병세가 심해지자 불로초를 구하려 전설 속의 삼신산(三神山)이 발해만 건너 남쪽에 있다며 어린 남녀 500인이 배 열 척으로 출발한 곳이 청도인데 한반도로 향했다. 청도는 사설질음시조창(辭說叱音時調唱)에 약수삼천리(弱水三千里)라는 내용의 배가 떠났던 장소이다.

 

삼신산은 조선의 영주산(瀛洲山)이고, 서불(徐市) 일행은 서귀포 정방폭포에 닻을 내리고 한라산에서 불로초를 구해 서쪽으로 떠났는데 ‘서불과지(徐市過之, 서불이 지나다)’라는 소전서(小篆書)체의 흔적을 남겼다. 지난 2005년 7월22일 중국의 시진핑 주석이 서귀포의 서불전시관을 방문하고, 방명록에 서명한 곳이기도 하다.

 

봉래산(蓬萊山)은 금강산이고, 방장산(方丈山)은 정읍, 장성, 고창으로 노령산맥 줄기다. 제가 어렸을 적 놀았던 곳이며, 고창쪽 방장산 가평 용추폭포에 가면 불로초가 있다고 들었다. 그 폭포 밑에서 땔감나무도 했다.

 

진시황은 누구인가? 진나라에는 안국군(安國君)이라는 대를 이을 왕자가 있었지만 정실부인 화양에게는 불행히도 왕을 이을 자식이 없었다. 후궁들에게는 자식들이 여럿 있었다. 안국군과 후궁 사이에 낳은 안국공 조이인이란 왕자가 있었는데 볼모로 조나라에 보냈다. 조나라에는 최고의 거상 여불위(呂不韋)가 있었고, 그의 눈에 들어왔다. 여불위는 ‘하늘이 내게 준, 두 번 다시 없는 천운이다’며 왕자를 상품인 물건으로 본 것이다.

 

때마침 진나라가 조나라를 침략하니 볼모 안국공을 죽이려고 하자 여불위는 금품을 주고 자기 집에 피신시켰다. 그리고 임신 중인 애첩 무녀(舞女) 조희를 조이인에게 소개하였고, 그가 아들을 낳았는데 영정(嬴政)이며 훗날의 시황제다. 실재로는 여불위의 아들이다. 여불위와 조희는 비밀로 하자고 했다.

 

여불위는 화양 부인의 친족들에게 금품을 주고 부인을 만나는 데 성공한다. 부인은 초(楚)나라 사람이다. 여불위는 조이인에게 초나라 옷을 입혀 화양 부인을 만났는데 ‘고향 사람을 보니 반갑다’며 이름을 자초라 지어 주었고, 양자로 들어간 것이다. 부인은 ‘나를 이렇게 알아주는 자초가 있다니’ 하며 크게 기뻐했다.

 

마침 증조부 소양왕이 죽자 자초의 아버지며 화양 부인의 남편이 왕에 오르니 조부 효문왕인데 무슨 이유인지 즉위 3일 만에 죽었다. 어김없이 안국공인 영정의 아버지 자초가 장양왕에 올랐으나 3년 만에 죽는다. 14세에 영정(嬴政)이 왕을 승계하니 시황제다.

 

어머니 조희는 태후가 된다. 여불위는 자신의 계획이 잘 진행되자 천하의 권력을 손에 쥔다. 영정이 20살이 되자 직접 정치에 관여하면서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하였고, 여불위를 비밀리에 조사한다. 여불위는 큰 고민이 생겼다. 젊은 태후가 남자를 너무 밝히니 몸은 늙어 따라주지 않자 큰 걱정이었다. 고민 끝에 장안에서 젊고 정력이 센 노애의 형제를 찾아 벼슬을 주니 거침없이 내실을 출입했다. 노애 형제와 태후 사이에 아들 둘이 생겼고 누구 자식인지도 모른다. 노애는 세력을 키워 혁명을 일으킨 후 영정을 죽이고 자기 아들에게 왕위를 계승시키면 상왕이 된다며 힘센 병사들을 모아 거사하려고 입궁했다. 영정은 첩자를 두고 미리 궁에 매복시켰고 병사들이 잠입하자 궁문을 닫고 노애의 일당을 다 죽이고, 그의 삼족을 처형했다. 그리고 여불위는 낙양으로 귀양보냈다. 영정의 치밀한 계획은 여불위를 닮아선지 감쪽같이 해치웠다. 모든 사건에는 여불위가 관여했다는 사실도 알았고, 조사에 들어가자 여불위는 아들을 위해 스스로 자결했다. 어머니는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게 감금했다.

 

영정은 22세가 되자 진나라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고 사후영생을 위하여 능 공사도 시작했다. 소양왕과 효문왕이 그토록 바랐던 전국 통일의 꿈을 이루고야 말겠다는 야심을 가진다. 영정은 기세를 몰아 스스로 중국 최초의 시황제라 칭했다. 한(韓), 위(魏), 조(趙)를 시작으로 연(燕), 초(楚), 제(齊), 진(陳)을 차례로 무너트려 전쟁 시작 7년 만에 전국을 통일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희생이 따랐다. 북쪽에서 흉노족들의 침략이 계속되자 12년간 백만 명을 동원하여 만리장성을 쌓았고, 난공사로 1m에 한 명꼴로 사망한다. 전국을 쉽게 순행코자 큰 도로도 만들었다. 화려한 아방궁을 신축하였고, 촉땅 한중지역에서는 운하공사도 했다.

 

초한지에 보면 아방궁이 얼마나 큰지 항우가 불을 놓자 백일 간 불에 탔다고 전한다. 시황제는 신경쇠약으로 자주 아프니 죽어서도 영생하고자 일찍부터 아방궁 공사에 무려 38년이 걸렸다. 시황제는 정적들도 다 죽였고, 통일도 했으니 불로장생에만 신경 썼다. 전국에서 방사들을 동원하여 불로초를 구해오게 하였으며, 말을 잘 듣는 이사, 조고 두 충신은 큰 힘이 되었다.

 

이슬람의 회족(回族)들과 무역을 하자 서구에는 진(秦)나라가 ‘차이나(China)’로 알려진다. 그때 상인으로 온 후손들은 지금까지도 회족 상인거리로 왕성한 활동을 볼 수 있다. 당시의 출발지에는 말과 낙타를 탄 상인들의 동상도 보았다.

 

46세가 된 시황제에게 ‘더 이상 폭정을 볼 수 없다’며 학자들은 공자의 정치철학인 위정이덕(爲政以德)으로 정치를 해야 한다고 하자 이사는 유생들의 책이 문제라며 불살랐으니 분서(焚書)이고, 의서(醫書)나 방사(方士)와 천문(天文)의 책은 불사르지 않았다. 460여 명의 유생들을 생매장하니 갱유(坑儒)이다.

 

또 어의로 있는 두 명의 방사에게 속히 약을 구해오라 불호령을 하자 그들은 두려워 궁을 나와 도주한다. 49세 봄에 강서성 난징과 상해 안휘성 절강성 해안을 따라 산동성을 지나 하북성 사구평대에 이르러서 몸이 쇠약해지자 더는 순행할 수 없었다. 많은 사람을 죽였으므로 적들이 많아 이동도 마차 5대로 숨어 이용했고, 잠자는 곳도 수십 군데로 옮겨 다녔다. 제나라 방사인 서불(徐市)은 다른 방사들을 대동하고 전설 속 삼신산에 속히 가 불사약을 급히 구해오겠다고 황제께 보고하고 출발했다.

 

“어딜 그리 급히 가시오?” “약수 삼천리 거지 둥둥 떠가는 배야, 거기 잠깐 닻 주어라 말 물어보자. 동남동녀 오백 인으로 영주, 봉래, 방장산에 불사약을 구하러 가는 서불의 배이올런가? 우리도 사구평대에 위중한 줄 아옵기로 바삐 바삐 가옵네요” 추송(秋松)이 시조창을 부르고 분위기를 띄우자 인생무상이런가. 숙연해진다.

 

서불은 영주산에서 시황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어차피 가서 죽느니 동해 쪽으로 숨어 들어간 곳이 일본이며,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일본 어디엔가 정착하여 비밀리에 살았다고 전해온다.

 

210년 9월10일 사구는 가을이라지만 무척 덥다. 황제는 죽음을 예지하고 이사와 조고에게 ‘만리장성에 몽염 장군과 함께 있는 태자 부사를 불러와 황제 자리를 이어 달라’고 유언한다. 조고는 무서워 유언장을 위조하자고 한다. “어차피 우리 둘은 죽습니다” “우리가 황제를 부추겨 전선에 보낸 것을 부사는 알고 있습니다” 이사도 처음에는 무서워 반대하다가 시황제가 죽자 동조했고, 부사는 사약을 받고 자결했다.

 

좀 모자란 호해(胡亥)는 2세 황제가 된다. 황제가 죽자 부패되는 냄새가 진동하니 생선으로 위장하고 소금에 몸을 절여 이곳 능에 매장했다. 그는 폭군이기도 하지만 호평도 많다. 최초의 통일국가 건설, 분봉제 폐지 후 군현제 실시, 문자를 소전서(小篆書)체로 통일, 도량형 통일, 법치국가 시행, 화폐 통일, 소수민족도 인재 등용, 꼼꼼한 성품으로 하루에 죽간(竹簡) 100근 이상을 보고 결제했다.

 

통일한 지 14년, 농민 봉기가 일어났고 반군 출신인 항우와 유방이 싸웠지만 힘센 항우보다는 인재 등용을 잘한 유방이 승리하여 한나라를 세웠고, 유방은 촉나라 성도에서 잔도(棧道)를 이용해 함양에 먼저 입궁하였으니 초한지(楚漢志) 얘기다.

 

서안에 공자 사당이 있다기에 기대를 했다. 비림(碑林) 박물관 입구에 공묘(孔廟)라는 큰 글자가 보인다. 당나라 시절에는 곡부까지 제사를 모시러 가기가 멀어 임시 사당을 만들어 놓았는데 언제부턴지 지금은 다 없어졌고, 모시지 않은 지 오래되었단다. 좁은 통로로 비석에 공자님의 영정(影幀)이 보인다. 단체 분향도 못 하고 각자 마음속에 예로 마무리했다.

 

참고로 중국의 각 성(省)에는 공자님을 모신 공묘(孔廟)가 다 있다고 한다. 이 외에도 대당 불야성공원, 현장법사기념탑, 서안박물관, 진나라 2대 호해 황제릉, 현종과 양귀비가 노닐던 화청지, 오악(五岳)을 전시한 공항의 웅장한 벽화, 가이드의 강력한 추천으로 당락궁 쇼는 중국인의 위대함을 알린다. 연출자와 관객, 동물과 무대까지 하나다. 낙타 여우 회전무대 장엄한 폭포수, 참으로 대국스럽다.

 

대당(大唐) 곡강(曲江) 남호공원의 호수 위에 한가로이 쪽배 하나가 저녁 햇살을 뒤로하고 물길에 맡긴다. 일행 중 김진성 선생이 두보의 곡강 칠언절구시에 감흥했나 보다. ‘일편화비감각춘(一片花飛減却春, 꽃잎 하나 날려도 봄이 가는데)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 인생 칠십 년은 옛날부터 드문 일이 아닌가!)’

 

아마도 70년을 넘겼으니 이 어찌 만족하지 않을 소냐! 스스로 취해 흥분한다. “가이드 선생님! 여기가 시성(詩聖) 두보가 지은 곡강시의 배경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기쁨에 못 이겨 박수로 화답하고 “감사합니다” 하니 가이드가 팔로군(八路軍) 기념관을 둘러보라고 안내한다.

 

모택동 주석을 중심으로 한 회의 장소와 침실이 있다. 팔로군이면 6·25 전쟁 때 북한을 도와 한국통일에 영향력을 미친 군대가 아닌가! 누군가가 “이 군대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분단은 없었을 것이요”라고 즉각 반응했다. “미군이 아니었으면 북한이 통일했을 것이요”라고 하는데, 우리의 사고와는 다른 입장이다. 충분히 이해가 간다. 해외에서는 말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북 삼성에는 많은 교민 2, 3세들이 살고 있다. 그들은 이미 한족화(漢族化)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겠다. 유아 때부터 그 나라 풍습으로 교육받는다는 것도 알아야겠다.

 

지구촌의 우리는 이미 하나다. 이일분수(理一分殊) 월인만천(月印萬川)이라. 어차피 한 곳에서 파생하지 않았는가? 평균나이 70대 중반인 우리 일행은 무사히 귀원(歸原)하게 된 것에 감사드렸다.

 


 

 

공묘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진시황병마용박물관에서 일행들이 함께하고 있다.

 


 

 

장락문(長樂門) 앞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