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찬길 성균관청년유도회 전남도본부 교육부회장
하정(夏亭) 류관(柳寬, 1346-1433) 선생이 살았던 우산각은 여러 문헌에서 '동대문 밖'이라고만 하였을 뿐 그 이상의 기록이 없다. 다만 『지봉집(芝峰集)』에 실려 있는 「동원비우당기(東園庇雨堂記)」에 위치뿐만 아니라 종래 막연하게 '동대문 밖'이라고만 지칭되어 오던 하정(夏亭)의 구기(舊基, 옛 집터)를 지적하며 우산각골이라고 하였다.
우의정까지 지냈던 류관 선생은 선비의 조건인 청빈(淸貧)을 체질화했던 분으로, 평소 청렴(淸廉) 빈한(貧寒)하여 흥인지문(興仁之門, 지금의 서울 동대문) 밖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초가집에 울타리도 없는 곳이었다.
조선 제3대 임금 태종(太宗, 재위 1400-1418)께서 하루는 대궐 밖을 나갔다가 류관 선생의 집을 보시고 선공감(繕工監)에게 명하여 그가 야직(夜直)날 밤을 이용해 울타리를 설치해 주었던 바, 이는 주상께서 공이 청렴결백하여 만약 이 사실을 알면 반드시 사양할 것으로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이튿날 공이 이 사실을 알고 조정에 나가 사례(謝禮)를 하고 사양했으나 주상께서 허락하지 않으시고 또 어선(御膳, 임금에게 올렸던 음식)을 하사했으며, 집이 너무나 허술하여 장마철이면 지붕이 새어 방안에 빗물이 곧장 떨어지곤 하여 일찍이 장마가 한 달 남짓 계속되던 때에는 집에서 독서(讀書)를 할 수가 없었다.
이에 공은 대과(大科)의 급제했을 때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은 일산(日傘)을 꺼내어 방안에서 펴들고 비를 가리며 부인에게 말하기를, "우산 없는 집에서는 이 장마철을 어떻게 견디어내나" 하고 걱정하시니 이 말을 듣고 있던 부인은 너무나 어이가 없어 "우산 없는 집에서는 다른 대비책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므로 공이 빙그레 웃었다고 전해진다.
세상 사람들이 이것으로 이야기 거리를 삼아 공의 검소함을 찬양하는 동시에 세상 물정(物情)에 어둡다는 것을 비웃었다고 하는데, 나는 "이것으로 공(公)을 다 알겠느냐?"고 생각된다.
공의 이 말은 남보다 뛰어난 두 가지 점을 의미하는데, "비가 아직 다 내리지 않았다"는 것이 하나이고, "백성들을 아직 다 구제하지 못했다"는 것이 또 하나이니 그렇다면 오막살이 밑의 백성들이 어찌 흉금(胸襟)을 털어내어 감탄하지 않았겠는가?
자기의 괴로움으로 인하여 다시 남의 가난함을 염려하는 것이 곧 두공부(杜工部,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의 벼슬을 지낸 당나라의 대표적 시인 두보(杜甫, 712-770))의 이른바 '광하천만간(廣廈千萬間)'으로 더불어 일관되는 생각이니 우산 없는 걱정은 대개 온 천하의 백성들을 비호(庇護)하려는 뜻에서다.
무릇 물질로써 몸을 받드는 자가 만약 자기보다 나은 자를 취한다면 아무리 넓은 집과 부드러운 담요일지라도 부족함을 느끼게 마련이다. 이러한 자에게 비교하는데, 하물며 집에 비가 주룩주룩 새는 속에서 다만 우산 없는 집의 괴로움이 더할 것을 생각하였을 뿐이라면 자신은 얼마든지 스스로 위로될 수 있는 것이니 공이야말로 이름을 돌아보고 의를 생각하는 분인지라 이것이 얼마나 자수(自守)의 요령을 얻은 것이겠는가? 만약 나의 괴로움으로 인하여 남의 준비 있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이는 어리석은 사람 앞에서 꿈을 설명하는 격(格)일 것이다(이익(李瀷, 1681-1763), 『성호사설(星湖僿說)』).
비오는 날 방안에서 우산을 펴고 주고받은 대화가 연유가 되어 류 정승이 살았던 집이 우산각(雨傘閣)이 또는 우산정(雨傘亭)되고, 우산각이 있던 마을 이름을 우산각골이나 속칭 우산동(雨傘洞)이라고 하였다.
그 후 이 집에는 그의 외5대손녀서(外五代孫女壻)이요, 태종(太宗)의 다섯째 아들 경녕군(敬寧君)의 현손(玄孫)인 이희검(李希儉, 4조(曹) 판서(判書))이 그곳에 서린 청빈의 전통을 이어 받아 청빈한 여생을 살았다. 이 판서(이희검)의 청빈 정신은 "옷은 몸을 가리는 것으로 족하고(衣足以蔽身), 음식은 창자를 채우는 것으로 족하다(食足以充腸)"를 신조로 살았으며, 이 판서가 세상을 떠났을 때 친지들이 돈과 곡식을 추렴해 겨우 장사(葬事)를 치를 수 있었을 정도로 청빈하게 살다갔으니 이 판서는 우산각의 정신적 전통을 이었던 것이다. 그의 아들 지봉(芝峰) 이수광(李睟光, 1563-1629)은 선조(宣祖)때 유명한 학자이며, 저서인 『지봉유설(芝峰類說)』에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뒤에 우리 아버지께서 공(公=柳寬)의 집에 사시면서 짚으로 지붕을 하였더니 손님(客)들이 이것을 보고 웃으면서 너무 초라하고 누추(陋醜)하다고 하였다. 이에 아버지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역시 우산에 비하면 사치스럽지 않은가?' 하니 듣는 이들이 기뻐하고 탄복(歎服)하였다."
임진왜란 때 폐허(廢墟)가 된 집터에 이희검(4조 판서)의 아들 지봉(芝峰) 이수광(李睟光)이 아버지의 청빈사상을 기르고자 주춧돌만 남은 곳에 하정 구기(舊基)를 복원하여 "우산을 펴고 비를 근근이 가린다"는 뜻의 비우당(庇雨堂)이란 당호(堂號)를 지어 살았다.
후세인들은 우산각 정신을 청백리 정신의 표상(表象)으로 삼고자 옛 지명인 우산각골(지금의 신설동 일대와 보문동(창신동 포함))에 대해 지난 1984년 4월에 서울특별시에서 우산각어린이공원(동대문구 신설동 동대문도서관 앞)을 명명(命名)하고, 우산각 정신의 청빈 사상을 귀감(龜鑑)으로 삼고자 조성했다.
우산각의 유래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한경지략(漢京識略)』,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에서도 "하정(夏亭) 류관(柳寬)의 집은 동대문 밖(東門外) 숭인문(崇仁門) 밖 수간(數間)의 집으로 울(欄)과 담(垣)이 없었다"라고만 되어 있는데, 유독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집(芝峰集)』 안의 「동원비우당기(東園庇雨堂記)」에서는 하정의 구지(舊址)까지도 여실히 지적해 주고 있다.
그 전에 살던 흥인문(興仁門, 동대문) 밖에서 바로 보이는 낙봉(駱峯)의 동쪽에 산이 있는데 산 이름은 상산(商山)이며, 그 산줄기가 남쪽으로 내려가서 흡사 읍(揖)을 하고 있는 형상의 산이 지봉(芝峯)인데, 산봉우리에는 십여 명이 앉아 놀만한 널따란 반석(盤石)이 있고 옆에는 큰 소나무 십여 그루가 울창이 있고 서봉정(棲鳳亭) 그 아래 평탄하고 도원경(桃源境)을 이룬 절승처(絶勝處)에 처음으로 하정(夏亭) 류정승(柳政丞)께서 터를 잡아 두어 간 초가집에서 비 오는 날이면 우산을 받치고 독서하고 청빈하게 지낸 어른이 나의 외오대조(外五代祖)다. 나의 선고(先考)께서 옛 살던 터에 조그마한 집을 짓고 거처하면서 그 소박(素朴)하고 청렴(淸廉)함을 본받고져 하였는데, 불행하게 임신(壬申)년 병란(兵亂)에 집이 불타 버리고 형태가 없자 나는 옛날 그 터에 집을 짓고 집 이름을 '비우당(庇雨堂)'이라 편명(扁名)하고 언식(偃息, 걱정 없이 없어 편안하게 누워서 쉼)하며 지난날 비바람을 피하는 이곳을 잊지 않고 알리어 우산(雨傘)의 유풍(遺風)을 기록함이라.
弊居在興仁門外, 直駱峯之東, 有山曰, 商山. 山之一麓, 逶迤而南, 若栱揖之狀者曰, 芝峯. 峯之上有盤石, 可坐十數人, 又有大松十餘株, 如偃盖形者曰, 棲鳳亭. 其下地, 更平衍周百許畝. 畵以爲園, 深邃夷曠, 有幽石之勝, 初夏亭柳相公, 以淸白名世, 卜宅于玆, 爲草屋數棟, 雨則以傘承其漏, 至今誦之, 卽余外五代祖也. 至余先考, 仍其舊而小加拓焉. 客有言其朴素者輒曰, 庇雨傘則 亦已侈矣. 聞者無不悅服. 余以不肖, 不克保有先業自經, 壬申兵燹短礎喬木, 無復餘者, 余爲是惧, 卽其古址搆一堂, 扁曰 庇雨. 以爲偃息之所. 盖取避風雨之義而, 乃其所志則, 亦欲不忘嗣續, 以窃付於雨傘之遺風焉. 景有入記于左. (『동원비우당기(東園庇雨堂記)』)
그러나 600년간의 세월이 흐르고, 세태와 자연환경이 모두 변한 오늘날에 와서는 어느 곳에서조차 그 유지(遺址)를 찾을 길이 없어 안타까운 일이지만 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창신동 네거리에서 안양암(安養庵)쪽 구(舊) 동덕여자중고 뒤편(현재 두산아파트로 변하였음)으로 돌아들면 신설동 일원과 보문동(종로구 창신동 포함)을 옛 지명으로 우산각골이라 했다. 지봉 이수광은 이곳에서 아버지(4조판서 이희검)의 유지(有志)를 계승하고자 임진왜란의 전란으로 불에 타 버려 주춧돌만 남은 동고(東皐) 이희검(李希儉)이 살았던 하정(夏亭)의 구기(舊基)에 초라한 집을 짓고 우산을 펴고 비를 근근이 가렸다는 뜻의 비우당(庇雨堂)이라는 당호(堂號)를 지어 살았다. 지봉 이수광은 하정(夏亭) 류관을 기리는 다음과 같은 시(詩) 한 수(首)를 남기고 있다.
하정유지낙성우(夏亭遺址洛城隅)
청백가전야도오(淸白家傳也到吾)
안득산주천만리(安得傘周千萬里)
진차천하불점유(盡遮天下不霑濡)
하정(夏亭)의 끼친 터 서울 모퉁이에 있으니
청백(淸白)한 집이 전하여 나에게 이르렀네
어떻게 우산으로 천만리를 덮어
천하를 다 가리어 젖지 않게 하랴?
이 시(詩)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이 청빈의 집은 이희검으로부터 지봉 이수광에게로 물려졌음을 알 수가 있으며, 그 청백정신의 법통을 이어 내리고 우산각 정신을 비우사상(庇雨思想)으로 승화시킨 것을 지적할 수 있다.
후에 비우사상을 다음과 같이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집에 향(香)을 피우지 않으며 초를 밝히지 않고 잔치를 베풀지 않으며 성악(聲樂)을 듣지 않고 무색(舞色)옷을 입지 않으며 가재(家財)에 칠이나 조각을 하지 않고 베옷을 입고 소식(小食)을 하는 것으로 생활 기본으로 삼았다"고 했다.
하정 류관의 구기(舊基)는 현재 두산아파트 단지로 변했지만 서울특별시의 낙산종합개발로 비우당(庇雨堂)은 청룡사(靑龍寺) 뒤 원각사 옆에 새로이 건립하였는데, 단종(端宗)의 왕비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께서 비단을 빨면 자주색 물감이 들었다는 슬픈 전설이 있는 우물터인 자주동천(紫芝洞泉)과 함께 있다.
※1996년부터 서울특별시에서 주관한 낙산복원사업을 통해 자연환경과 역사적 문화 환경을 복원함으로써 쾌적한 공원경관을 제공하고 자연 탐방을 통해 역사와 문화교육의 장(場)을 제공할 목적으로 조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