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경영

삼성 노사 잠정 합의가 남긴 물음…상하상보(上下相補)의 예(禮)를 회복할 때다 [유교경영리포트]

삼성전자 노사가 2026년 5월 20일 임금 및 단체협약 잠정 합의에 이르렀다. 창사 이래 두 번째 총파업 가능성이 거론되던 상황에서 나온 합의다. 이번 잠정 합의는 단순한 임금 협상 타결을 넘어, 한국 최대 기업의 노사 관계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묻는 장면으로 남게 됐다. 유교경영의 관점에서 보면 이번 합의의 핵심은 숫자가 아니다. 신뢰다.

김정기 기자 2026. 5. 21.

 

삼성전자 노사가 2026년 5월 20일 임금 및 단체협약 잠정 합의에 이르렀다. 창사 이래 두 번째 총파업 가능성이 거론되던 상황에서 나온 합의다. 이번 잠정 합의는 단순한 임금 협상 타결을 넘어, 한국 최대 기업의 노사 관계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묻는 장면으로 남게 됐다.

 

유교경영의 관점에서 보면 이번 합의의 핵심은 숫자가 아니다. 신뢰다. 임금 인상률과 성과급 기준은 협상 결과일 수 있지만, 그 바탕에는 오랜 불신(不信)을 어떻게 풀 것인가라는 더 근본적인 문제가 놓여 있다.

 

공자는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예를 좋아하면 백성들이 감히 공경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으로 상호례 즉민막감불경(上好禮 則民莫敢不敬)을 말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해외 출장을 중단하고 귀국해 “매서운 비바람은 제가 맞겠다. 다 제 탓으로 돌리겠다”고 고개를 숙인 장면은 이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사과는 패배가 아니다. 책임 있는 자리가 먼저 예(禮)를 보이는 것이 공동체 회복의 출발점이다.

 

삼성의 무노조 경영은 길고 깊은 그림자를 남겼다. 고(故) 이병철 창업주의 '무노조 원칙은 오랫동안 삼성식 경영의 상징'처럼 작동했다. 이후 삼성 내부에서는 노조 활동을 둘러싼 갈등과 법적 논란이 이어졌고, 이재용 회장은 2020년 대국민 사과를 통해 무노조 경영 폐기를 공식 선언했다. 그리고 2026년 봄, 과반 노조가 총파업 카드를 꺼내 들면서 삼성 노사 관계는 다시 중대한 갈림길에 섰다.

 

다만 사측만 돌아볼 일은 아니다. 노조 역시 과반의 힘을 얻은 만큼 그에 맞는 책임을 져야 한다. 맹자는 “군자는 자신에게서 구하고, 소인은 남에게서 구한다”는 뜻으로 군자구저기 소인구저인(君子求諸己 小人求諸人)을 말했다. 사측은 수십 년간 쌓인 불신의 뿌리를 인정해야 한다. 노조도 조합원 전체와 회사 공동체를 함께 바라보는 균형 감각을 보여야 한다.

 

성과급 요구와 부문별 이해관계 차이를 둘러싸고 내부 이견이 불거진 것은 과반 노조가 안고 있는 숙제를 드러낸다. DS 부문과 DX 부문의 현실은 다르고, 조합원의 기대도 같지 않다. 힘이 커졌을 때 더 조심해야 한다. 이것이 유교가 말하는 위기지학(爲己之學), 곧 자신을 닦는 공부다.

 

삼성전자는 잠정 합의 입장문에서 “겸허한 자세로 보다 성숙하고 건설적인 노사관계를 구축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겸허라는 말은 가볍지 않다. 유교경영에서 겸허는 체면을 낮추는 말이 아니라, 책임을 실천으로 증명하겠다는 태도다. 말만 앞서고 이행이 뒤따르지 않으면 신뢰는 다시 무너진다.

 

논어에는 “먼저 행하고 그 말은 뒤따르게 한다”는 뜻의 선행기언 이후종지(先行其言 而後從之)가 나온다. 삼성 노사 합의도 마찬가지다. 합의문보다 중요한 것은 이행이다. 성과 배분 기준, 현장 의견 수렴, 조합원 간 형평성, 경영진의 책임 있는 소통이 뒤따라야 한다. 노사 모두 이번 합의를 ‘위기 모면’으로 소비한다면 다음 갈등은 더 거칠게 돌아올 수 있다.

 

상하상보(上下相補)는 위와 아래가 서로 부족함을 채워주는 관계를 뜻한다. 경영진은 노동자의 신뢰 없이 지속 가능한 혁신을 말할 수 없다. 노동자는 기업의 생존 기반 없이 권익의 확장을 말하기 어렵다. 어느 한쪽만 이기는 구조는 오래가지 못한다.

 

한국 반도체 산업은 지금 거센 경쟁의 한복판에 있다. 기술 패권, 글로벌 공급망, 인공지능 반도체 시장 재편, 중국과 미국의 압박이 동시에 몰려오고 있다. 이런 시기일수록 내부 공동체의 신뢰는 전략 자산이다. 노사 갈등이 길어질수록 기업 경쟁력은 흔들리고, 그 부담은 결국 구성원과 협력사, 국가 경제로 번진다.

 

이번 잠정 합의가 봉합에 그쳐서는 안 된다. 전환의 출발점이어야 한다. 논어(論語) 자로편(子路篇)은 “명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순조롭지 않고, 말이 순조롭지 않으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뜻으로 명불정 즉언불순 언불순 즉사불성(名不正 則言不順 言不順 則事不成)을 말한다. 삼성 노사가 서로에게 붙여야 할 이름은 적(敵)이 아니다. 같은 배를 탄 동인(同人)이다.

 

삼성의 새 노사 관계는 이제부터가 본시험이다. 사측은 예로써 책임을 보여야 하고, 노조는 의로써 힘을 절제해야 한다. 예와 의가 함께 설 때 상하상보(上下相補)의 길도 열린다. 삼성 노사 잠정 합의가 한국 기업사에 남겨야 할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