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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지역 문화재를 소개합니다]울산인의 400년 염원 태화루가 재건되다

태화루의 위치는 울산의 젖줄 태화강이 울주군 내와리 백운산에서 발원하여 120여리를 굽이쳐 흘러오다 울산만을 목전에 두고 마지막 용틀임하는 곳으로 남구 남산의 은월봉을 S자로 휘돌아 중구 태화동에 용금소를 만들고 그 위 절벽에 세워졌으니 수려한 자연경관을 가진 곳이라 하겠다. 태화루의 문헌상 최초의 기록은 삼국유사이다. 신라의 고승 자장이 643년 선덕여왕

이성호 기자 2014. 8. 13.

 

 

태화루의 위치는 울산의 젖줄 태화강이 울주군 내와리 백운산에서 발원하여 120여리를 굽이쳐 흘러오다 울산만을 목전에 두고 마지막 용틀임하는 곳으로 남구 남산의 은월봉을 S자로 휘돌아 중구 태화동에 용금소를 만들고 그 위 절벽에 세워졌으니 수려한 자연경관을 가진 곳이라 하겠다.

태화루의 문헌상 최초의 기록은 삼국유사이다. 신라의 고승 자장이 643년 선덕여왕 때 창건한 태화사(대화사 大和寺)의 부속 건물로 지어졌으며 고려시대에는 성종(成宗)이 이곳에 행차하여 신하들과 잔치를 열었다 전한다. 이후 태화루는 퇴락과 수리를 거듭하여 조선 전기에만 해도 두 번의 중수가 있었고 권근의 기문과 서거정의 중건기를 통해서 누각의 규모와 의미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렇듯 무려 약 900여 년간 명성을 이어온 태화루가 임진왜란의 전란에 소실되었으니 이보다 뼈아픈 일은 없을 것이다. 이후에도 중건이 반복되었으나 번번이 소실 또는 멸실되는 아픔을 겪고 1667년경 울산도호부 객사 학성관이 건립되면서 없어진 태화루의 염원을 담아 객사 남문루에 태화루 현판을 걸어 그 명성을 간직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마저 일제강점기의 민족혼 말살정책으로 인해 울산도호부 객사 학성관 자리를 초등학교 부지로 내어주고 이 남문루(태화루)마저 보존하지 못한 채 80여 년이 흘렀으니 그 역사성과 상징성으로 볼 때 태화루의 염원이 절실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남문루가 팔려 울산의 향토성인 학성이씨의 월진파 소문중의 정자(이휴정)로 이축되면서 그 당시의 보존이 잘 된 태화루 현판을 2010년 울산박물관에 기증함으로써 2005년부터 추진된 태화루 재건 계획에 기폭제 역할을 하였고 2011년에 공사 착공하여 2014년 5월14일에 준공식을 하게 되었으며 특히 태화루 남쪽 정면의 현판은 당시 현판의 글자를 확대모사 하였고 북편 정면의 현판은 울산 출신 외솔 최현배 선생의 한글사랑을 상징하여 한글로 소헌 정도준 선생이 쓴 글의 현판을 달았다.

과거의 태화루는 고을수령이나 관원들과 지역 유림들의 만남의 장소이자 고을의 정사를 논했던 장소였으며 또한 전국의 시인묵객들의 마음을 머물게 하며 당시 선비들의 절제와 인의를 덕목으로 한 문학을 논하던 장소이기도 하였으니 태화루 관련 시문이 무려 107편이나 되며 글을 쓴 사람이나 다녀갔을 것으로 추정되는 그 대표적인 인물이 고려시대의 김극기, 정포, 이곡, 이색, 정몽주, 이숭인, 안등, 이원, 유등이며 조선시대는 유관, 정지담, 홍경손, 김시습, 서거정, 박연, 김종직, 양휘지, 이덕현 등등 당대 최고의 문장가들인만큼 태화루는 영남의 랜드마크였다. 400여 년 만에 120만 울산시민들의 품에 돌아온 태화루는 이제 아름다운 태화강과 연계한 시민정서를 함양하고 각종 문화행사와 체험놀이마당으로 시민 모두가 함께 하는 공간으로 거듭 태어나 과거의 명성과 영광을 뛰어 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