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예천군 호명면 백송리에 위치한 선몽대(仙夢臺)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누각이다. 예천(醴泉)은 예로부터 산 좋고 물 맑은 충효의 고을로 이름났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종손(從孫)이자 제자인 우암(遇巖) 이열도(李閱道)가 명종 18년(癸亥,1563)에 누대(樓臺)를 짓고 퇴계가 선몽대(仙夢臺) 편액과 시를 보냈다. 그후 퇴계의 제자인 약포(藥圃) 정탁(鄭琢),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등의 차운시가 있다.
예천(醴泉)은 신라의 수주현(水酒縣)으로, 경덕왕(景德王) 때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군(郡)으로 삼았다. 고려 초에 보주(甫州)로 고쳤고, 현종(顯宗) 때에는 안동부에 예속시켰으며, 명종(明宗) 2년에는 태자(太子)의 태(胎)를 이 고을에 장치(藏置)하고 기양(基陽)으로 고쳐서 승격시켜 현령(縣令)으로 하였으며, 신종(神宗) 때 지보주사(知甫州事)로 승격시켰다. 조선 태종(太宗) 13년에 보천군(甫川郡)으로 고쳤고, 16년에는 다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고을의 별칭으로 수주(水酒), 보주(甫州), 기양(基陽)라 불렀다. 고을 동쪽은 안동(安東), 서쪽은 문경(聞慶), 남쪽은 상주(尙州)와 의성(義城군), 북쪽은 영주(榮州)와 충북 단양(丹陽)과 인접해 있다. 고을의 풍속은 평이(平易)한 것을 숭상하며 여염(閭閻)에 야박함이 없다고 알려져 있다. 16년간 성균관 대사성을 맡은 윤상(尹祥)은 “예천은 동쪽과 서쪽에서 죽령(竹嶺)과 초령(草嶺) 두 재[嶺] 사이에 끼어 있다. 죽령으로부터 상주 낙동(洛東)으로 가는 자, 초령으로부터 화산(花山)에 가는 자는 반드시 이 고을을 경유하게 된다”라고 했다.
예천향교(醴泉鄕校) 남쪽 12여리 내성천 남쪽에 유서 깊은 누각이 있으니 선몽대(仙夢臺)이다. 선몽대는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종손(從孫)이자 제자인 우암(遇巖) 이열도(李閱道)가 명종 18년(癸亥,1563)에 창건하였다. 퇴계는 ‘우암산(遇巖山)의 절경은 내가 나쁜 일이 많아서 구경하지 못했다. 지금껏 꿈속에서나 상상을 마지 않았다. 그리하여 절구(絶句)로 내 뜻을 부치고 또 이로써 그 대(臺)를 명명(命名)한다’라며 시를 보냈다. “노송 속 높은 누대 푸른 하늘에 꽃혀있고[松老高臺揷翠虛] 흰 모래 푸른 절벽 그려내기 어렵노라[白沙靑壁畫難如] 내 지금 밤마다 선몽에 의지하여 구경하리니[吾今夜夜憑仙夢] 지난번 진즉 감상 못한 소홀함 여한이 없노라[莫恨前時趁賞疎]”
예천군 용문면 하금곡리에서 출생한 약포(藥圃) 정탁(鄭琢)은 퇴계의 제자이며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을 사지(死地)에서 구원한 명신이다. 예천 출신인 매호(梅湖) 조여익(曺汝益)이 향시(鄕試)에 합격하여 약포의 집으로 찾아왔다. 매호가 퇴계의 칠언절구를 베껴서 보여 주자 약포는 옷깃을 여미고 세 번이나 되풀이하여 읽으면서 경탄하고 느낀 바가 있어 5수의 절구를 차운했다. “선생의 선몽대는 이미 옛 낡았지만[先生仙夢已成虛] 남긴 시를 되새겨 외우니 배알하는 듯하네[追誦遺詩拜謁如] 서법은 지금도 응당 어제 쓴 것 같으니[書法至今應似昨] 조밀한 글자에 성긴 행간 분명하구나[分明字密又行疎] 주인께서 스스로 청허한 곳에 터를 잡으니[主人自能卜淸虛] 신선이 산다는 낭원과 현도도 이곳보다 못하리[閬苑玄都此不如] 꿈을 깬 후 몇 번이나 선몽대 위에 누워서[夢罷幾回臺上臥] 하늘 가득 밝은 달빛에 성긴 별을 보았던가[滿天明月看星疎] 바위 가의 높은 대가 온 허공을 끌어당기고[巖畔孤臺控八虛] 적송은 구불구불 늙은 교룡 같구나[赤松蟠屈老虯如] 새벽바람의 산 신기루(蜃氣樓)는 시끄럽다 조용해지고[曉風山市喧還靜] 강가의 저녁 비 세차다가 다시 성글어지네[暮雨江郊密復疎] 백년의 세월이 눈길 돌리듯 짧은데[百歲光陰轉眄虛] 선몽대의 맑은 흥취 끝없이 넓다네[一臺淸興浩難如] 늘그막에야 속세의 꿈이 헛됨을 깨달았으니[晩來始覺塵寰夢] 전원으로 돌아가려는 계획 서툴지 않겠지[歸去田園計未疎] 높은 벼슬 사절하고 세상 생각 비웠으니[謝卻簪纓世慮虛] 선몽대의 한바탕 꿈 어떠한지 묻노라[仙臺一夢問何如] 봄바람, 가을 달, 시냇가의 오솔길에[春風秋月溪郊路] 구장(鳩杖: 비둘기를 새긴 원로의 지팡이)을 따를 때 절로 서툴 뿐이겠지[鳩杖相隨只自疎]”
퇴계의 제자인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은 스승의 시에 차운했다. “반 이랑 솔 그늘이 푸른 허공 가렸는데[半畝松陰倒碧虛] 술 마시는 오늘의 그 흥취가 어떠한가[玉壺今日興何如] 그대 인해 신선의 풍취 있는 유학자의 글귀 다시 들으니[憑君更聽儒仙句] 어느새 세속 인연 즉석에서 멀어지네[便覺塵緣立地疏]”
퇴계의 제자인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도 스승의 시에 차운했다. “높은 누대 올라보니 허공에 의지한 듯[高臺登眺若憑虛] 고기 낚아 생계 꾸리는 생활 나는 그만 못하네[漁釣生涯我不如] 뜰에 반 가득 꽃이 지니 농사가 늦어져[花落半庭春事晩] 푸른 처마에 소나무 그림자 다시 쓸쓸하구나[碧簷松影更蕭疎]”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은 “푸른 절벽 가로질러 허공에 뜬 대지(臺地)로세[山橫蒼壁地凌虛] 물고기 잡고 산전(山田) 갈아 모두 천연스럽구나[水釣林耕盡自如] 이 누대에 와 보지 않았지만 이름 아주 좋으니[未到此臺名已好] 구경하고 싶은 마음에 속세 생각 멀어지네[實情飜動世情疎]”라고 차운했다. 순조 31년(辛卯, 1831)한음의 9세손인 이의익(李宜翼)이 용궁(龍宮)의 수령으로 부임하여 선조의 시판을 새로 걸었다.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은 선몽대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모래는 희고 냇물이 맑아 텅 빈 것 같으나[沙白川明澹若虛] 옥산과 옥구슬 가득한 정원에 비교함이 어떠할까[玉山瓊圃較何如] 신선의 땅이 하도 멀어 오기가 어렵다 하나[仙區萬里應難到] 이 정자에 오고 감을 소홀히 하지 말자[來往斯亭且莫疎]”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5대조부인 동원(東園) 정호선(丁好善)은 “물 속에 드리운 아름다운 누대 보배로운 거울을 무색케 하고[一水瑤臺寶鑑虛] 주인이 품은 마음씨 또한 담백하기 이를 데 없네[主人襟抱淡相如] 이틀간을 오르내리면서 선몽대와 함께 하니[登臨兩日同仙夢] 천길 위에서 세상 티끌이 내 생각으로부터 멀어지는구나[千尺紅塵念己疏]”라고 노래했다. 다산의 선몽대기(仙夢臺記)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아버지를 따라 약포의 유상(遺像)을 배알(拜謁)하고, 길을 바꾸어 선몽대에 올랐다. 배회(徘徊)하며 바라보다가 이윽고 벽 위에 여러 시가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중의 하나는 관찰사(觀察使)를 지내신 나의 선대 할아버지께서 일찍이 지으신 것이었다. 시판(詩板)이 깨어져 글자는 갈라지고 한쪽 구석이 떨어져 나가기도 했으나, 자구(字句)는 빠진 것이 없었다. 아버지께서 손으로 먼지를 털어내고 나에게 읽으라 하고서 말씀하시기를, ‘공(公)이 일찍이 영남(嶺南)에 관찰사로 내려왔을 때 이 누대에 오르신 것이다. 공이 지금부터 2백여 년 전에 사셨던 분인데 나와 네가 또 이 누대에 올라와서 즐기니, 어찌 기이한 일이 아니겠느냐.’하셨다. 그리고는 나에게 그 시판의 시를 옮겨 본떠서 공장(工匠)에게 번각(翻刻)하고 다시 단청(丹靑)을 입혀 걸어놓게 하시고, 이윽고 나를 불러 기(記)를 쓰라고 하셨다.”
또한 다산이 쓴 선몽대기에 이곳의 아름다운 풍광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예천에서 동쪽으로 10여 리(里) 되는 곳에 가면 한 냇가에 닿는다. 그 시내는 넘실대며 구불구불 이어져 흐르는데, 깊은 곳은 매우 푸르고 낮은 곳은 맑은 파란색이었다. 시냇가는 모두 깨끗한 모래와 흰 돌로 되어 있었으며, 바람에 흩어지는 노을의 아름다운 모습이 사람의 눈에 비쳐 들어온다. 시냇물을 따라 몇 리쯤 되는 곳에 이르면, 높은 절벽이 깎아 세운 듯이 서 있는데, 다시 그 벼랑을 따라 올라가면 한 정자를 볼 수 있으며 그 정자에는 ‘선몽대(仙夢臺)’라는 방(榜)이 붙어 있다. 선몽대의 좌우에는 우거진 수풀과 긴 대나무가 있는데, 시냇물에 비치는 햇빛과 돌의 색이 숲 그늘에 가리어 보일락 말락 하니, 참으로 이색적인 풍경이었다. 대개 태백산(太白山) 남쪽에서 시내와 산의 경치가 뛰어난 곳은 오로지 내성(柰城: 지금의 奉化), 영천(榮川: 지금의 榮州) 그리고 예천이 최고인데, 선몽대는 유독 그 기괴한 모양 때문에 여러 군에 이름이 났다.”
박광영 / 성균관 의례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