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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지역 문화재를 소개합니다〕선비의 고장 논산의 문화유산 효암서원

효암서원 논산시 가야곡면 산로리 22-5번지에 있는 효암서원은 본래 은진현 동20리 갈마동(현 가야곡면 두월리)에 갈산사(葛山祠)로 중화재 강응정 선생을 모셨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우암 송시열 선생의 제의로 1713년(숙종39년) 현 위치에 다시 세웠다. 서원 이건 후 만죽헌 서익, 도곡 양응춘, 백촌 김문기, 오강 김성휘, 둔암 김필태, 매개 남준을

이기채 기자 2014. 9. 2.


 

효암서원

 


 

논산시 가야곡면 산로리 22-5번지에 있는 효암서원은 본래 은진현 동20리 갈마동(현 가야곡면 두월리)에 갈산사(葛山祠)로 중화재 강응정 선생을 모셨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우암 송시열 선생의 제의로 1713년(숙종39년) 현 위치에 다시 세웠다.

 

서원 이건 후 만죽헌 서익, 도곡 양응춘, 백촌 김문기, 오강 김성휘, 둔암 김필태, 매개 남준을 배향했었는데 1867년(고종4년)에 서익 선생이 퇴위되어 6위만을 모시고 있었다. 1868년(고종5년)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에 의해 폐철되었다가 1925년에 다시 복원되었다.

 

서원 외삼문 앞에는 중화재 강응정의 정려(旌閭)가 있으며 성종의 친필사액현판이 보존되어 있다.

 

효암서원은 1984년 5월17일 문화재 자료 제87호로 지정되었다. 매년 음력 3월10일과 9월10일에 유림들이 향사를 거행하고 있으며 김경중 원장이 대표로 있다.

 

배향된 인물 강응정은 조선의 학자로 자는 공직이고 호는 중화재이며 본관은 진주 사람이다. 그는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1470년(성종1년) 효행으로 관직에 천거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1483년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유생으로 김용석, 신종호, 박연 등과 향약을 만들고 소학을 강론하였다. 효행이 지극하여 어머님이 3년여 동안 병에 걸리니 정성을 다하여 간호해 천수를 다하였고 돌아가신 후에는 5년간이나 시묘하였다. 이러한 소문이 조정까지 알려지자 성종이 친필로 정문 현판을 써서 하사하고 정려를 세워 후세에 효의 귀감이 되게 하였다. 지금도 “효자 성균생원 강응정지려(孝子 成均生員 姜應貞之閭)”라는 어필현판과 함께 효자정려가 가야곡면 산로리에 있고 효암서원에 주향하였다.

 

김문기는 조선시대 문신으로 초명은 효기이며 자는 여공이고 호는 백촌으로 금령 사람이다. 1426년(세종8년)에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함길도 관찰사를 거쳐 이조판서까지 올랐다. 1456년(세조2년) 단종복위 모의에 가담하였다가 붙잡혀 고문에 굴복하지 않다가 이개 등과 함께 살해되었다. 영조 때 그의 9대손 정구의 소원으로 복관되었으며 충의란 시호를 받았다.

 

김성휘 자는 입부이고 호는 오강이며 본관은 광산 사람이다.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고 임진왜란에 고제봉을 따라 의병을 일으킬 때 사재를 털어 의병을 모집하였고 사노들을 시켜 군량을 운반하게 하였다. 체찰사와 순찰사가 조정에 보고하여 선조가 여러 번 상을 내렸으나 겸손하여 사양하였다.

 

양응춘은 조선의 의병으로 자는 인견이고 호는 도곡이며 본관은 청주 사람이다. 회덕 현감을 지내다가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조헌을 따라 청주에서 적을 무찌르고 금산싸움에 참가하여 용전 끝에 전사했다. 후에 이조참의에 추증되었다.

 

남준의 호는 매개이고 본관은 의령사람이다. 문열 조헌과는 가까운 벗이었으며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헌과 함께 왜적을 막을 때 선전관으로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을 운반하는 책임을 맡았다. 금산전투에서 용전하다가 전사하였다.

 

김필태 자는 대래이고 호는 둔암이며 본관은 광산 사람이다. 부친상에 효성이 지극하였고 후학 양성에 힘을 기울이던 중 경술년에 도백이 조정에 천거하여 참봉을 제수받았고 을사년에 사헌부감찰 영능령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