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先賢들의 멋이 깃든 亭子이야기 54利涉亭. 끝없는 바다 바라보며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길러 소요(逍遙)하는 즐거움 함께 하네

이섭정(利涉亭)은 고려 때 몽고와의 협상에서 우리 측이 이롭기를 염원하고 외교 사신들을 영접 환송하기 위해 지은 관문이었다. 옛 진해루 옆에 있었는데 무너져 강화군 강화읍 갑곳리에 강화부사 이성(李晟)이 조선 태조 7년(1398)에 건립했다. 기문은 쌍매당(雙梅堂) 이첨(李詹)이 지었다. 현재의 모습은 1976년에 다시 지었다. 강화(江華)는 고구려 때 혈

박광영 2018. 7. 14.

 

이섭정(利涉亭)은 고려 때 몽고와의 협상에서 우리 측이 이롭기를 염원하고 외교 사신들을 영접 환송하기 위해 지은 관문이었다. 옛 진해루 옆에 있었는데 무너져 강화군 강화읍 갑곳리에 강화부사 이성(李晟)이 조선 태조 7년(1398)에 건립했다. 기문은 쌍매당(雙梅堂) 이첨(李詹)이 지었다. 현재의 모습은 1976년에 다시 지었다.

 

강화(江華)는 고구려 때 혈구군(穴口郡)으로 갑비고차(甲比古次)라고도 했다.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해구(海口)라 고치고, 수지현(首知縣)은 수진(首鎭), 동음내현(冬音奈縣)은 강음현(江陰縣), 고목근현(高木根縣)은 교동(喬桐)으로 바뀌었다. 원성왕(元聖王) 때 혈구진(穴口鎭)을 설치하였고, 고려 초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현(縣)으로 만들었다. 고종(高宗)이 몽고병(蒙古兵)을 피해 강화로 들어가 도읍하고 군(郡)으로 승격시키고 강도(江都)라고 불렀으며, 원종(元宗) 원년(1259)에 다시 송도(松都: 開城)로 돌아왔다. 충렬왕(忠烈王) 때 인주(仁州: 仁川)에 합병하였다가 복구시켰다. 우왕(禑王) 3년(1377)에 부(府)로 승격시켰다가 조선 태종 13년(1413)에 도호부(都護府)로 고쳤다. 인조(仁祖) 5년(1627) 2월에 후금(後金)의 군사를 피하여 이곳에 거둥하여 4월에 환도하여 유수부(留守府)로 승격시켰다. 고종 32년(1895) 군(郡)으로 고치고, 1914년 교동(喬桐)을 강화군으로 편입하였으며, 1995년도에 인천광역시로 통합되었다.

강화는 제주도, 거제도, 진도, 남해도와 함께 다섯 번째 큰 섬으로 서해 바다를 끼고 있다. 강화군 하점면 장정리, 화도면 사기리와 동막리 등에서 선사시대의 유물이 출토되어 오래전부터 정착한 것을 알 수 있다. 동쪽은 김포(金浦), 남쪽은 인천(仁川), 북쪽은 북한의 개풍(開豊)과 배천(白川)이 위치해 있다. 고을의 별칭으로 혈구(穴口), 갑비고차(甲比古次), 해구(海口), 강도(江都), 심주(沁州)라 불렀다.

고려말 조선초 문신인 우곡(愚谷) 정이오(鄭以吾)는 “강화부는 기내(畿內)에 속하였는데, 사면이 바다로 둘러 싸여 있다. 토지는 기름지고 아름다워 언덕, 산, 갯벌, 평지가 크게 있고, 식물은 풍부해서 콩, 보리, 벼농사가 잘 된다.”라고 했다. 고을 서쪽 15리에 위치한 고려산(高麗山)은 진산(鎭山)이며, 고을 남쪽 35리에 마니산(摩尼山)이 있다. 마니산 정상에 참성단(塹城壇)이 있는데, 돌을 모아 쌓았는데, 위는 모가 나고 아래는 둥근 상방하원(上方下圓)의 형태로 고려 및 조선조 임금이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단군(檀君)이 하늘에 제사지내던 곳이다.’라고 하여 했다. 또한 전등산(傳燈山)에 삼랑성(三郞城)이 있는데,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 쌓았다라고 한다.

고려조 문신인 동산수(東山叟) 최자(崔滋)의 삼도부(三都賦)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동해 바다의 크기는 무릇 아홉 강과 여덟 하수(河水)를 겨자씨처럼 삼켜 구름과 해를 불락 삼킬락, 출렁 왈랑거리는데, 그 가운데 화산(花山: 江華의 산 이름)이 있어 금오(金鼇: 渤海 동쪽에 큰 구멍이 있고 그 가운데에 다섯 산이 있는데, 뿌리가 연착되지 않아 늘 물결 따라 아래위로 흔들리니, 上帝가 노하여 서극으로 귀양 보내 뭇 성인들이 살 곳을 잃었다. 이에 자라 15마리에게 시켜 머리를 들어 이도록 하였다. 성인들이 살 만한 산을 말함)가 우뚝 치받쳤다. 물가에 언덕들이 잎처럼 가지처럼 붙었는데, 그 가지와 잎에 붙어 올망졸망한 것들은 강상(江商), 해고(海賈), 어옹(漁翁), 소금구이의 집들이요, 꽃송이 같은 신악(神岳)과 꽃받침 같은 영구(靈丘), 그 꽃송이와 꽃받침을 걸쳐 날아가는 듯 솟아 있는 것은 황실의 궁궐과 공경(公卿)과 사서(士庶)들의 저택이다. 안으로는 마니산과 혈구(穴口: 穴窟山)의 첩첩한 산이 웅거하고, 밖으로는 동진(童津: 通津山)과 백마(白馬)의 사면 요새(要塞)를 한계로 출입을 단속함에는 동편의 갑화관(岬華關: 갑곶나루[甲串津]), 외빈(外賓)을 맞고 보냄엔 북쪽의 풍포관(楓浦館)이니, 두 화산의 봉우리가 문턱이 되고 두 효(崤)가 지도리[樞]가 되니, 참으로 천하에 중심이라.”

강화군 강화읍에 강화향교(江華鄕校)가 있고, 교동면 읍내리에 교동향교(喬桐鄕校)가 있다. 강화향교 동쪽 4여리 강화읍 갑곳리에 유서 깊은 정자가 있으니 이섭정(利涉亭)이다. 조선 태조 7년(1398)에 강화부사 이성(李晟)이 세웠다고 기문에 기록되어 있다. 기문은 여말 선초의 문신인 쌍매당(雙梅堂) 이첨(李詹)이 지었다. “한강(漢江)과 임진(臨陣)이 합류하여 조강(祖江)이 되고, 서쪽으로 잇달아 바다로 들어가는데 따로 흘러 갑곶이 되었다. 전조(前朝)의 고왕(高王: 高宗)이 여기 와서 피난하는데, 원(元) 나라 군사들이 쫓아와 말하기를, ‘갑옷만 쌓아 놓아도 건너갈 수 있다.’고 하였기 때문에 갑곶이라 이름 하였다. 강화부는 거진(巨鎭)으로 해문(海門)에 있어서 육지와 연접하지 않았다. 부의 북저(北渚)는 물길이 다 통했으나 다만 물이 너무 넓어서 어쩌다 풍랑을 만나 막히면 때때로 건널 수 없다. 만일 배로 조강을 건너거나 육지로 가면 30여 리 만에 갑곶에 이르는데, 건널목이 조금 좁아서 건너기 쉽기 때문에 부사와 감사(監司)가 순찰 할 때나 조정의 명령을 전달하는 신하도 모두 이 길을 거쳐 부로 가고, 그 밖에 왕래하는 나그네들도 이 길에 늘어서니 진실로 의당 여기에 정자를 지어서 보내고 맞이하는 장소로 삼아야 한다. 조선 태조 7년(1398, 洪武 戊寅年) 가을 9월에 나와 한 고을에 사는 이성(李晟)이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이 곳 부사가 되어 병마 단련의 임무를 겸하였다. 부임해서는 군민(軍民)의 모든 정무가 이미 모두 잘 진행되었다. 이듬해 봄에 관리와 백성을 모아놓고 이르기를, ‘고을의 치소(治所)에 놀이 구경하는 장소를 두는 것은 진실로 논의할 일이 못 된다. 그러나 기운이 번거롭고 정신이 산란하며 보는 것이 막히고 뜻이 걸릴 때를 당하면 군자는 반드시 놀고 쉴 만한 물건과 높고 상쾌한 도구가 있어서, 군자로 하여금 이리저리 바라보고 거닐며 정신을 맑히도록 한 뒤에야 번거로운 것이 간단해지고 산란한 것이 안정되며 막힌 것이 소통되고 걸린 것이 트이게 되는 법이다. 또 더구나 끝없는 바다를 바라보고 하늘과 물이 아득한 데를 엿보아 만물의 처음과 기운의 시초에 마음을 노닐어 나의 호연(浩然)한 기운을 기르고, 또 그것을 사람들과 같이 하면 즐겁지 않겠는가.’ 하니 관리와 백성이 모두 함께 ‘그렇다.’라고 했다. 이에 정자를 지을 계획을 세웠다. 마침 김영렬(金英烈)이 해도(海道)를 절제(節制)하게 되어서 섬에서 재목을 취해서 실어다 공사를 도와준 만큼 노는 사람을 부르니, 그 역사에 드는 물품은 공금(公金)을 낭비하지 않고도 여유가 있었다. 이에 옛터를 이용해 거듭 새롭게 지어 난간 창문으로 사신(使臣)이 올라와 놀게 하고, 담을 돌려 쌓아서 나그네가 유숙할 수 있게 만들었다.”

또한 기문에 이섭정이라 명명한 뜻을 이렇게 기록했다. “서늘하면서도 따뜻하고 견고하면서도 치밀하며, 돌을 쌓아 높이고 낮은 담을 돌려쳐서 기한을 정하여 완성하니, 관리와 백성들은 깜짝 놀라서 말하기를, ‘하늘에서 떨어졌나, 땅에서 솟았나.’ 하며 신기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부사가 나에게 편지를 보내 정자 이름과 기문을 지어달라고 청하였다. 나는 물은 건너기 쉬운데 정자가 마침 나루터에 있기 때문에 이섭정(利涉亭)이라 이름하고, 또한 부사는 중후하고 기개가 있어서 그가 정사할 때에는 사람들과 더불어 소요(逍遙)하는 즐거움을 함께 하고, 그가 떠남에는 백성들이 오랫동안 생각하게 하였기 때문에 이 정자에 또한 기꺼이 기문을 짓는 것이다.”

박광영 / 성균관 의례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