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재 / 성신여대 한문학과 교수
자공이 “사와 상은 누가 낫습니까?” 하고 묻자, 공자께서 “사는 지나치고, 상은 미치지 못한다.” 하셨다. 자공이 물었다. “그러면 사가 낫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다.”(子貢이 問 師與商也孰賢이니잇고 子曰 師也는 過하고 商也는 不及이니라 子曰 然則師愈與잇가 子曰 過猶不及이니라.「先秦」15)
공문십철(孔門十哲)의 제자들이 모두 훌륭하다지만, 저마다 장단점을 갖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공자가 제자들을 가르칠 때마다 제자들 간의 장단점을 감안하여 상대주의적 교육방법을 폈던 것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공의 나이는 안회와 1년 차이로, 어떻게 보면 동학(同學)의 위치이면서 또한 라이벌 관계였다.
그러나 자공은 스승 공자로부터는 언제나 안회보다 못한 녀석으로 평가절하되었던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공은 언제나 공자 곁에서 스승을 보필하며 최측근의 제자로서 자리했다.
그만큼 경제적인 여유도 있었던 제자였으니, 아마도 공자사단에서 비즈니스맨이었거나 아니면 경영학의 귀재였을 것으로도 보인다. 『사기』 「화식열전(貨殖列傳)」편을 보면, 자공이 어린 아동에게 돈을 버는 기술을 알려줄 정도로 묘사되어 있으니, 자공이 상술(商術)도 훌륭했고, 공자사단에서 가장 부유했던 것만큼은 사실인 듯하다. 그리고 공자가 주나라 도서관을 다녀오고 싶다고 말하면, 자공은 흔쾌히 스승님이 주나라 도서관에까지 가실 교통편도 마련해 드렸고, 여비도 챙겨드렸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스승 공자에게 어느 정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자공은 예상했다. 그래서 자공[賜]은 공자로부터 다른 제자들과 자신을 비교했을 때, 자신의 우월함을 스승님으로부터 직접 듣고 싶었다.
이때 자장[師]이라는 제자가 함께 있었는데, 자장은 공문(孔門)에서 최연소 제자였으며, 성격이 다소 급했고, 재주는 좋으나 늘 관심분야가 넓어서 중도(中道)를 지나치는 면이 있었던 활발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이에 반해 자하[商]는 문학으로 꼽히는 수준 높은 제자였으며, 그의 성명 ‘복상(卜商)’에서 말해주는 것처럼 무당 또는 점치는 부모의 슬하에서 공문에 들어온 사람으로서, 다소 성장환경이 다른 이질적인 제자였다.
그러나 자하가 공문에서 제일 먼저 하산하였다고 전해지지만, 기실 공자의 학문과 사상은 자하의 문인과 제자들에게서 꽃피울 수 있었으니, 그의 재능과 실력을 과소평가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자공이 공자에게 자장과 자하에 대한 비교 평가를 요청하였을 때, 공자는 ‘지나침’과 ‘모자람’으로 구분하여 주었다.
자칫 ‘지나침’이 ‘모자람’보다 조금 더 나은 것처럼 보여질 찰나에 공자는 ‘지나침과 모자람은 같다’라고 단정한다. 무엇이든 간에 ‘중용’의 미덕은 황금률인 것 같다. 그래서 또 중용의 덕을 지키기 어려운 것일지도 모른다.
항간에 양파가 피를 맑게 하여 건강에 좋다고 하니 양파를 과량 섭취하여 폐해를 입은 환자가 속출하는 모습을 보면, 우리네 삶 속에서 ‘과유불급’은 변할 수 없는 진리이자 교훈인 듯하다.
옛날에 ‘계영배(戒盈杯)’라는 잔이 있었다. ‘계영배’는 ‘넘치는 것을 경계하는 잔’이라는 의미로, 인간의 끝없는 욕심을 경계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술잔이라고 한다. 제나라 환공은 이 계영배를 늘 곁에 두고, 자신의 욕망을 경계하는 그릇이라 하여 ‘유좌지기(宥坐之器)’라고 불렀다.
그리고 ‘계영배’가 시사하는 가르침을 늘 마음속에 새기고 싶었다. 공자 역시 ‘계영배’를 항상 곁에 두고 과욕과 지나침을 경계했다고 전한다.
우리나라 조선시대 때 도공(陶工)이었던 ‘우명옥’이라는 사람은 자신의 스승도 이루지 못했던 설백자기(雪白磁器)를 만들어 명성을 얻은 후, 어마어마한 재물까지 취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방탕한 생활을 일삼다가 재물을 모두 탕진한 뒤, 잘못을 뉘우치고 스승에게 돌아와 ‘계영배’를 만들었다고 전한다.
‘과유불급’, ‘과’와 ‘불급’의 우열을 가늠할 수 없는 영역임에는 틀림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넘쳐나는 것보다 오리려 부족함이 조금이라도 더 나은 것은 아닐까? 아주 조금이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