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재 / 성신여대 한문학과 교수
안연이 인을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자기의 사욕을 이겨 예에 돌아감이 인을 하는 것이니, 하루 동안이라도 사욕을 이겨 예에 돌아가면 천하가 인을 허여 하는 것이다. 인을 하는 것은 자기 몸에 달려 있으니, 남에게 달려있는 것이겠는가?” 안연이 “그 조목을 묻겠습니다.” 하고 말하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예가 아니면 보지 말며,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며, 예가 아니면 동하지 마는 것이다.” 안연이 말하였다. “제가 비록 불민하오나 청컨대 이 말씀을 종사하겠습니다.”(顔淵問仁한대 子曰 克己復禮爲仁이니 一日克己復禮면 天下歸仁焉하리니 爲仁由己니 而由人乎哉아 顔淵曰 請問其目하노이다 子曰 非禮勿視하며 非禮勿聽하며 非禮勿言하며 非禮勿動이니라 顔淵曰 回雖不敏이나 請事斯語矣리이다. 「顔淵」1)
이 경문은 매우 유명하여 중고교 교과서에 ‘극기복례’라는 성어로까지 실려 있기도 하다. 공자의 애제자 ‘안회’와의 문답이었기 때문이라기보다, 그 내용이 이 천 여년이 지난 지금의 우리에게도 심금을 울려주는 메시지를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사사로운 욕심을 버리고 이를 이겨내어 사회적 질서와 규범이었던 ‘예’로 회귀할 수 있다는 것은, 말만큼 쉬운 일은 아님에 분명해 보인다. 반인륜적 행위가 들끓고 파렴치한 범죄가 뉴스를 도배할 때마다 우리나라는 경제성장보다 극기복례가 더 절실하고 필요한 때가 아닌지를 조심스럽게 되묻곤 한다. 사리사욕과 탐욕, 충동과 감정을 절제하여 극복해내지 못하고 파국으로 치닫는 작금의 현실은 ‘극기복례’라는 말이 생활지표가 되어야하지 않겠는가 하는 자성어린 발언까지 나오게 만든다. 최소한의 배려와 믿음, 존중과 공경이 없는 한, 이 사회는 모두가 패배자요 불행해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풍요로워 보여도 개개인은 고통에 신음하고 있고, 설사 경쟁에 이긴 사람들조차도 우울증에 시달리는 것이 우리네 씁쓸한 현실이다. 정신적 ‘예’의 풍요로움보다는 물질적 ‘돈’의 가치만을 앞세워 왔던 이유있는 결과물로도 볼 수 있다.
때맞춰 우리네 과거를 잠깐 돌이켜보자.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 ‘보릿고개’란 용어는 처음 듣는 용어일 것이다. 필자 역시 보릿고개를 경험하지는 않은 세대이다. 그러나 그때에는 먹여주고 재워만 주어도 남의 집 식모살이나 허드렛일을 도맡아가며 생을 유지했었다. 목이 말라 물을 청하면 시원한 냉수에 먹을거리까지 먼저 주며 서로의 정을 나누는 시대가 있었다. 넘쳐서 나누는 것이 아니라, 없지만 나눌 줄 아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서로 간의 정(情)과 예(禮)는 잊혀져간 옛말이 되었다. 인간이 아닌 동식물에게도 있는 禮가 인간사회에서는 왠지 낯선 느낌마저 든다. 강인한 생명력을 자랑하는 민들레는 뿌리를 난도질하여 다시 심어도 싹이 돋고 또 꽃을 피운다. 그런데 이렇게 거칠게 자라나는 민들레에게도 선순환되는 일면이 있다. 뿌리 하나에서 여러 꽃이 피지만 한 꽃대가 피고 진후에 다른 꽃대에서 꽃망울이 맺혀주기 때문이다. 인간에게서 없어진 장유유서의 예를 민들레가 경고해주는 듯하는 것은 아닐까? 오상고절(傲霜孤節)의 기개를 가진 국화는 늦가을 서릿발을 맞으면서 불굴의 기백으로 고결함을 자랑하는 것 같지만, 사실 모든 화초들이 만개하여 자신의 자태를 자랑할 때까지 차례를 양보하여 기다렸다가 뒤늦게 피어난다. 국화의 겸양지덕은 군자의 모습으로 추앙받기에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동물에게는 예가 없을까? ‘피라미’는 동종(同種)의 ‘갈겨니’를 보자. 피라미는 먹성이 좋아 떼를 지어 다니면서 이것저것을 몽땅 먹는다. 그러나 친구 ‘갈겨니’는 입이 짧아 깨끗한 식물성 플랑크톤만 먹으며 1급수에서만 서식할 수 있는 희귀종이다. 피라미는 몇 안 되는 친구 갈겨니가 찾아오면 식물성 플랑크톤을 먹지 않고 내버려둔 채, 그곳을 떠난다. 내 친구 갈겨니가 먹어야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비둘기는 어미 새와 나란히 앉지 않고 그보다 낮은 가지에 가서 앉는다. 사자는 배부르면 더 이상 무모한 사냥을 하지 않는다. 그만큼 탐닉과 탐욕으로 배를 채우지 않으며, 새끼를 보호하고픈 짐승의 마음이 엿보인다.
그러나 우리네 인간사회는 어떠한가? 적절한 욕심은 없다. 아흔 아홉 칸을 가진 부자가 한 칸을 마저 채우려 달려든다. 동식물조차 모두 예와 배려의 마음을 지키며 공존하고자 하는데, 유독 인간만이 지칠 줄 모르는 탐욕으로 일관한다. 배불러도 사냥을 계속하려는 탐욕은 오히려 인간에게만 있어 보인다. ‘극기복례’, 이 말은 동식물만도 못한 인간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경계의 문구는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