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四字論語> ‘文質彬彬’ 문(외)과 질(내)이 빛나고 빛나도다

김용재 / 성신여대 한문학과 교수 극자성이 말하였다. “군자는 질(質) 뿐이니, 문(文)을 어디에 쓰겠는가?” 자공이 말하였다. “애석하다! 당신(극자성)의 말씀이 군자다우나, 사마도 (당신의) 혓바닥을 따라잡지는 못하는 듯하다.” 문(文)이 질(質)과 같으며, 질(質)이 문(文)과 같은 것이니, 호랑이나 표범의 가죽에서 털을 벗기고 나면, 털 없는 개 가

김용재 2019. 7. 14.


 

 

김용재 / 성신여대 한문학과 교수

 


 

극자성이 말하였다. “군자는 질(質) 뿐이니, 문(文)을 어디에 쓰겠는가?” 자공이 말하였다. “애석하다! 당신(극자성)의 말씀이 군자다우나, 사마도 (당신의) 혓바닥을 따라잡지는 못하는 듯하다.” 문(文)이 질(質)과 같으며, 질(質)이 문(文)과 같은 것이니, 호랑이나 표범의 가죽에서 털을 벗기고 나면, 털 없는 개 가죽이나 양 가죽과 무엇이 다르냐? 같은 것이다.”(棘子成曰 君子는 質而已矣니 何以文爲리오 子貢曰 惜乎라 夫子之說이 君子也나 駟不及舌이로다 質猶文也니 虎豹之鞹이 猶犬羊之鞹이니라.「顔淵」 8)

 

사실 이 문장의 내용을 유심히 살펴보면 매우 비유적이며 코믹하다. 위나라 대부인 ‘극자성’이 공자의 제자 ‘자공’에게 ‘군자의 모습은 질(質)로써 충분한데 文까지 갖출 필요까지 있냐며 왜 그렇게 야단법석을 떠느냐?’고 묻는다. 이때 자공의 첫 답문이 매우 인상적이다. “애석합니다만, 당신의 말씀이 혹 군자답긴 하나, 마차를 끄는 네 마리의 말도 당신의 혓바닥에서 떨어진 실언을 따라잡지는 못할 지경입니다.” 라며 핀잔주었기 때문이다. 자공에게 있어 극자성의 말은 실언을 떠나 망언의 경지로까지 받아들였나 보다. 어찌 군자의 모습에서 ‘문(文)’과 ‘질(質)’을 나누어 볼 수 있냐는 반문인 셈이다.

 

아마도 이 경문으로부터 추론해 본다면 극자성은 공문의 제자들이 한결같이 ‘문’에만 집착하는 모습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문’보다는 ‘질’을 내세우며 공문의 제자들을 폄하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지하다시피 ‘문질빈빈’은 앞서 「옹야(雍也)」편에 처음 출현한다. 사실 ‘문’이 형식적인 꾸밈의 미학이라면, ‘질’은 내용적인 본바탕의 아름다움을 뜻하는 용어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바탕(質)이 꾸밈(文)을 이기면 야(野)해지고, 꾸밈(文)이 바탕(質)을 이기면 史해진다. 따라서 꾸밈(文)과 바탕(質)이 조화를 이룬 뒤에야 군자라고 할 수 있다.”는 경문에서 문질에 대한 견해가 엿보인다.(子曰 質勝文則野 文勝質則史 文質彬彬 然後君子)"

 

군자의 말씀이나 혹은 군자의 모습에 대해 정의내린 부분을 보면, 문과 질의 어느 한 쪽으로 치우쳐서는 안 된다는 뉘앙스가 짙다. 위 공자의 표현대로 군자가 글을 쓸 때 ‘질승문(質勝文)’이면 문채가 부족하여 글이 투박하고 거칠어짐을 보이며, 반대로 ‘문승질(文勝質)’이면 언사만 번드러지고 화려할 뿐 글의 본뜻은 공허해진다는 난제에 봉착하게 된다는 것이다. 오직 ‘문(文)과 질(質)이 (함께) 빈빈(彬彬)’한 경우에만 꾸밈과 바탕이 조화를 이루어 풍성해져서, 내용과 형식이 통일을 이루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군자가 글을 쓸 때 지켜야 할 준칙이다.

 

한편 ‘문질빈빈’은 군자의 글쓰기뿐만 아니라, ‘군자다움’을 나타내는 데에도 자주 인용되곤 한다. 이때 문질빈빈은 “덕을 빛내는 예악(禮樂)과 덕의 본질인 도의(道義)가 서로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어 갖추어야 함”을 나타내는 뜻으로도 사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