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재 / 성신여대 한문학과 교수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화합하나 뇌동(雷同)하지 않고, 소인은 뇌동하나 화합하지 않는다.”(子曰 君子는 和而不同하고 小人은 同而不和니라. 「子路」23)
‘화(和)’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고, 다양한 의견을 청취하되 조율의 과정을 거쳐 조화로움을 추구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리고 ‘동(同)’은 문자 그대로 ‘같다’ ‘한가지로 하다’는 뜻이니 맹목적으로 남의 의견을 쫒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화이부동’은 ‘다른 사람과 조화를 이루되 뇌동(雷同)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좀 더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화합하되, 붙어 다니지는 않는다”는 의미이고, 논어에서는 이 ‘화이부동(和而不同)’을 ‘군자(君子)’에게로 국한시켜 놓았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의 정치패거리(꾼)들 가운데, 철새처럼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는 자들에겐 절대 ‘군자’의 호칭이 붙여질 수 없을 것이다. 기실, 그러한 철새들이 또 다른 새로운 둥지로 옮기는 상황을 살펴보자면 ‘화이부동’의 반대어인 ‘동이불화(同而不和)’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즉 “밖으로는 함께하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내부적으로는 조화롭고 화목하지 못한”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런데 무엇이 화(和)이고 무엇이 동(同)일까? 그 준거는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춘추시대 제(齊)나라 재상 ‘안영’은 “요리사가 고깃국을 끓일 때 싱거우면 소금을 넣고 짜면 물을 타듯이, 임금이 옳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도 자신만의 정의와 줏대[주관]을 내세워 ‘아니라’고 하며 바로 잡아주는 것이 화(和)의 원리이고, 임금이 옳다고 하면 옳다고 말하고 임금이 그르다고 하면 그르다고 말하는 것처럼 아무생각 없이, 짠 국에 소금을 더 넣고 싱거운 국에 물을 더 쏟는 것을 동(同)의 폐해”라고 했던 것처럼, ‘화’와 ‘동’ 사이에는 정의로움과 주관이 저변에 깔려 있음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화’는 타자와 나를 한 방향으로 조율하여 조화롭고 화목한 방향으로 이끌어낸다는 의미인데, 이때에는 반드시 ‘정의[義]’를 굽히면서까지 조화를 추구하지는 않는다는 뜻이 숨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주체성과 정체성을 잃지 않은 본질을 밑바닥에 간직하고서 조화를 추구하며, 줏대없이 맹목적으로 부화뇌동(附和雷同)하지 말라는 경고의 메시지도 함께 새겨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립하는 양쪽의 것을 하나로 합쳐 조화를 추구한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다. ‘정의로움[義]’을 잃지 않은 준거(準據)를 지키고자 하여도, 양쪽 모두 자신들의 논리가 의롭고 떳떳하다고 고집을 부린다면, ‘화’의 저점을 찾기는커녕 영원한 평행선을 달려야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에겐 독특한 화법이 하나 존재한다. 성리학에서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을 ‘무극이면서 태극이다’라 번역하기도 하고, ‘이기(理氣)’를 논할 때는 ‘이(理)이면서 기(氣)이고 기(氣)이면서 이(理)이다’라는 해석도 왕왕 등장한다. 불교에서는 ‘삶과 죽음을 윤회로 보아 둘이 아닌 하나와 같다’하여 ‘불이문(不二門)’이라 칭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화이부동’은 ‘조화로우면서도 다르다’는 뜻인데, 이것은 우리말에 ‘엇비슷하다’라는 말과 매우 유사하다. 모순(矛盾)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부족하고, 굳이 이를 표현하자면 ‘뫼비우스 띠’와 같다고나 할까? ‘엇비슷하다’, 즉 ‘둘이 서로 어긋났는데 비슷하다’라는 말은 분명 논리적으로 성립할 수 없다. 왜냐하면 ‘엇박자’라 하면 박자를 어긋난 것이니 박자를 제대로 못 맞춘 것처럼, ‘엇비슷’은 ‘비슷함이 어긋난 것’이니 비슷할 수가 없는데도, 왠지 어감 상으로 볼 때 ‘살짝 비슷해 보인다’는 의미가 숨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