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사자논어> ‘剛毅木訥’ 강하고 굳세고 질박하고 어눌하다

김용재 / 성신여대 한문학과 교수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강하고 굳세며 질박하고 어눌한 것이 인에 가깝다.”(子曰 剛毅木訥이 近仁이니라. 「子路」27) ‘강의목눌(剛毅木訥)’이란 ①강직하여 욕심에 사로잡히지 않고[剛], ②의지가 강하여서 어려운 것을 떳떳이[毅] 해내며, ③무뚝뚝하여 질박할[木] 정도로 순박하고, ④입으로 내뱉는 말수가 별로 없는데다가 어눌

김용재 2019. 12. 29.

 

김용재 / 성신여대 한문학과 교수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강하고 굳세며 질박하고 어눌한 것이 인에 가깝다.”(子曰 剛毅木訥이 近仁이니라. 「子路」27)

 

‘강의목눌(剛毅木訥)’이란 ①강직하여 욕심에 사로잡히지 않고[剛], ②의지가 강하여서 어려운 것을 떳떳이[毅] 해내며, ③무뚝뚝하여 질박할[木] 정도로 순박하고, ④입으로 내뱉는 말수가 별로 없는데다가 어눌하기까지[訥]하지만 묵중하다는 의미를 가지는 ‘사자성어’이다.

 

이 4개의 한자가 주는 무게감은 웬만한 책의 두께보다 훨씬 더 무거움을 느끼게 하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논어󰡕 경문에 보면 공자는 이러한 4개의 성품을 가진 사람이라야 ‘인(仁)’에 근접한 인물이라고 칭하였다.

 

‘강(剛)’은 ‘굳세다’ ‘강하다’라는 뜻이지만, 육체적인 강인함[强]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흔들리지 않은 꼿꼿함에 가깝다. 그래서 우리는 강직하다고 할 때 ‘강직(剛直)’으로 표기하지 강직(强直)이라고 잘 쓰지 않는다.

 

‘의(毅)’도 역시 ‘굳세다’라는 뜻도 있지만 ‘함부로 버럭 화를 내다’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의’의 자형 속에는 ‘맷돼지가 바늘에 찔려 뻣뻣한 털을 곧추세우며 성내고 있는 모습’으로부터 유래되었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의’가 상징하는 뜻은 타인으로부터 부정한 해를 입었거나 불의의 화를 당했을 때 불굴의 의지를 표출해내는 힘이다.

 

‘목(木)’의 뜻을 자전에서 찾아보면 약 15여 개의 뜻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질박하다’라는 훈(訓)이 있다. ‘눌(訥)’은 언(言)과 내(內)가 합쳐진 글자로 ‘말이 안에 있다’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어눌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사실 말은 혀[舌]의 작용으로부터 나온다. ‘설(舌)’은 입[口]에 방패[干]를 올려놓은 꼴이니, 함부로 혀놀림[舌]하지 않도록 단속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이 ‘눌’은 말을 자꾸 입안 속으로 들여보내는 형상을 띠고 있으니, 말을 하고 싶어도 인내하며 참아내는 글꼴이다. 󰡔논어󰡕에 “군자 욕눌어언이민어행(君子 欲訥於言而敏於行)”이라 했다. “군자는 말을 어눌하고 둔하게 하고자 하며, (그 대신) 행동을 민첩하게 하고자 한다”는 뜻이다. 또 옛말에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라 했고, “소에게 했던 말은 지켜져도 사람에게 한 말은 지켜지지 않는다”라 했으니 말의 중요성을 새삼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이렇게 어려운 4개의 ‘강의목눌’을 가진 사람만이 ‘인’에 근접했다고 공자는 칭한다. 그러면 ‘인’은 과연 무엇일까?

 

『논어』에 ‘인’을 언급하는 부분은 무려 70여 차례가 넘지만, 단언컨대 ‘이것이 인이다’라고 정의내릴 수 있는 글감은 흔치 않다. 그만큼 ‘인’의 개념을 정의내리기가 쉽지 않다는 뜻이다. 그러나 공자도 여러 사람들을 칭송하거나 폄훼(貶毁)하는 경우에 있어서, “그 사람이 ‘인’한지는 아직 모르겠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어느 한 인물을 꼭 가려내어 인자(仁者)로 지칭한 바도 없었다. 물론 본인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여기에 언급된 ‘강의목눌’은 ‘인’에 근접한 성품을 가진 사람으로 볼 수 있지만, 이와 대비되는 인물로 ‘교언영색(巧言令色)’이 순간 떠오른다. ‘교언영색’은 「학이」편에 나오는데, 주의해야 할 부분이 있다. 「학이」편에는 “교언영색 선의인(巧言令色 鮮矣仁)”이라 되어 있다. 즉, “다른 사람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아첨에 가까운 교묘한 말과 번지르르하게 얼굴빛을 꾸미는 사람치고 ‘인’한 사람은 드물다”는 뜻이다. 교언영색이 100% 불인(不仁)한 것이 아니라, 교언영색을 취하는 사람 중에 인자가 드물 뿐이지, 교언영색 중에 ‘인’한 사람도 있을 수 있다는 의미다. 즉 ‘인’을 중심으로 놓고 볼 때, 교언영색은 부분부정에 해당된다. 실제 『춘추전(春秋傳)』에 의하면 “사광(師曠)이 간(諫)하기를 잘하자 숙향(叔向)이 󰡔시경󰡕의 ‘교언여류(巧言如流, 말을 물 흐르듯 잘하다)’ 구문을 인용하여 그를 칭찬”한 바도 있고, 『시경』 「대아」편에서는 “산보(山甫)의 덕을 칭찬하여 영의영색(令儀令色)하다” 하였으니, ‘교언’과 ‘영색’이 때에 따라서는 착하고 온화한 사람을 지칭할 때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교언영색’이 모두 죄악이며 잘못된 것은 분명 아님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공자 생존 당시, 교언영색을 하는 자들을 보면 거의 대부분이 어질지 못하였기 때문에, 성인이 사람을 살펴보고 평가할 때 교언영색 하는 사람치고 어진 성품을 가진 자가 ‘드물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처럼 ‘교언영색’이 타인을 위주로 언행을 도모하고 오직 남의 환심만을 사기 위한 허위적 인간의 모습이라면, ‘강의목눌’은 자신을 위주로 자신의 참된 마음과 진실된 감정에 따라 모든 일을 착실하게 행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라 할 수 있다.

 

‘인’에 가까운 사람과 ‘인’에 멀리 있는 덕목이 확연히 구분되는 부분이다. 러시아의 세계적인 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인’이란 ‘인간의 실존 위에서 항상 부드럽게 매달려 있는 거대한 바위덩어리’라 정의한 바 있다. 그만큼 ‘인’은 ‘성스럽고[The Holy]’ ‘궁극적인 것[The Ultimate]’이며 동시에 인간이 추구하는 가장 ‘종국적인[The Final]’인 모습에 해당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공자는 ‘인’을 원하기만 한다면, ‘인은 늘 우리 주변에서 언제나 당장 달려올 것이라고 말씀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