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四字論語> ‘以直報怨’ 정직으로 원망을 갚는다

진성수 / 전북대 철학과 교수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덕으로 원망을 갚는 것이 어떻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그럼 무엇으로 덕을 갚을 것인가? 정직으로 원망을 갚고, 덕으로 덕을 갚아야 한다.”(或이曰 以德報怨이 何如하니잇고 子曰 何以報德고 以直報怨이요 以德報德이니라.「憲問」36) 우리는 ‘사랑’이란 말의 홍수시대에 살고 있다. 드라마를 봐도, 영

진성수 2020. 3. 31.


 

진성수 / 전북대 철학과 교수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덕으로 원망을 갚는 것이 어떻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그럼 무엇으로 덕을 갚을 것인가? 정직으로 원망을 갚고, 덕으로 덕을 갚아야 한다.”(或이曰 以德報怨이 何如하니잇고 子曰 何以報德고 以直報怨이요 以德報德이니라.「憲問」36)

 

우리는 ‘사랑’이란 말의 홍수시대에 살고 있다. 드라마를 봐도, 영화를 봐도, 그리고 매스컴의 인터뷰를 봐도 끝인사에는 어김없이 사랑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이렇게 사랑이 넘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과연 서로의 사랑을 느끼며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일까?

 

종교에서는 우리에게 ‘조건 없는 무한한’ 사랑을 강조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요,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말한다. 기독교의 아카페(agape), 불교의 자비(慈悲)가 바로 그것이다. 심지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도 있다. 그러나 현대 종교인들이 자신의 삶에서 이러한 종교적인 사랑을 실천하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끊임없이 상처를 주고받고 살고 있으며, 이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을 통해 내면의 성장을 도모하기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신의 감정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쉽지 않은 상황에서 과연 남들의 속사정을 깊이 이해하고, 그들을 온전히 품어준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차라리 애초부터 모든 인간을 사랑하라는 큰 부담을 줄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상식과 도리에 따라 사랑하라’고 말하는 것이 좀 더 현실적일지도 모른다.

 

공자가 말하는 사랑은 기독교와 불교에서 말하는 무차별적인 무조건적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공통된 감성에 기초하여 부모와 형제, 군신과 장유, 부부와 붕우의 관계에 따라 순차적이며 객관적인 사랑이다. 즉 어린아이가 먼저 자기 부모를 사랑하고, 그 마음으로 형제와 친족을 사랑하며, 나아가 친구와 선후배 그리고 이웃을 사랑해 가는 동심원적 구조를 말한다. 바로 이러한 원리에서 오륜(五倫)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가 말하는 사랑의 원리에서 보면 부모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형제를 사랑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집에서 형을 공경하지 않으면서 밖에서 선배를 공경한다는 것도 용납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공통된 감성에서 볼 때, 형제보다는 부모가 가까우며 선배보다는 형이 가깝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맹자』에서는 “나의 노인을 잘 봉양하여 다른 사람의 노인에게까지 미치며, 나의 어린이를 잘 보살펴 다른 사람의 어린이에게까지 미치는(「양혜왕장구상」)” 것이 왕도정치(王道政治)의 방법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공자는 인간관계에서 공평무사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따라서 덕으로써 원망을 갚는다면, 나중에 덕을 덕으로 갚는 것과는 차이가 없게 된다. 이렇게 되면, 내가 원망해야 할 사람에게는 후하게 베푼 것이지만, 내가 덕으로 갚아야 할 사람에게는 박하게 된다는 것이 공자의 생각이다. 따라서 공자는 원망해야 할 사람에게는 정직[直]으로 갚고, 덕으로 보답할 사람에게는 덕으로 갚으라고 말한 것이다. 단,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정직으로 원망을 갚을 때 개인적인 원한에 치우쳐 그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인간의 보편적인 도리를 어겨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그래야만 비록 원망을 갚더라도 인간관계의 공평함을 해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공자의 ‘이직보원’의 원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