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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의병장 열전 ⑥떨쳐 일어선 廣州의 참선비 南相穆 장군

선생은 1876년 4월 12일(고종 13년)에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하산운리에서 의령 남씨 남진희(南晉熙)의 장남으로 태어나 유교 가풍 속에서 한학을 수학하여 경학은 물론 주역과 병서류에도 조예가 깊었다. 선비집안에서 태어나 열심히 학문을 닦던 남상목 선생이 항일과 애국정신을 자각하고 떨쳐 일어선 것은 그의 나이 29세 때이던 1905년에 일제의 강요로 체

이홍익 기자 2013. 10. 2.

선생은 1876년 4월 12일(고종 13년)에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하산운리에서 의령 남씨 남진희(南晉熙)의  장남으로  태어나  유교 가풍  속에서  한학을  수학하여 경학은  물론  주역과  병서류에도  조예가  깊었다. 선비집안에서 태어나 열심히 학문을 닦던 남상목 선생이 항일과 애국정신을 자각하고 떨쳐 일어선 것은 그의 나이 29세 때이던 1905년에  일제의 강요로 체결된 한일의정서에 기반을 두어 그의 고향인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하산운리에서  러시아와의 전쟁에 대비 노임도 지불하지 않고 강제로 벌채를  강행하는 만행을 자행하면서 부터이다.

 

일제 만행에 분노 봉기하다

 

당시 선생은  일본인 감독관 나가이(中井)를 폭행하는 등 적극적으로 항거하였고, 이로 인해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어 온갖 체형을  당하고 풀려났다. 그 후 1905년 을사늑약  체결,  고종 강제 퇴위, 1907년 정미7조약 체결 등 식민지화가 급격하게 진행 되었고 정미 조약의 부수각서에 의해  1907년 한국군이 강제로 해산되자 같은 해 선생은 고향인 경기도 광주 일대에서 의병을 모아 항거하였고 선생의 휘하에는 구국의 일념으로 무장한 의병이 모였다. 봉기시 그는 이강년 부대의 휘하에 있었던 추정된다. 당시 선생의 직할 부대의 규모는 50여명으로 신식과 구식 소총 각 10여 자루로 무장하고 있었다 한다.

 

용인에서 충북까지 맹위 떨쳐

 

선생은 1908년  8월경에  김재선 등을 자신의 의병부대에 편입시켜 김재선을 좌익장, 강춘선을 후군장, 송주상과 김태동을 종사, 김경화와 이시영을 포군으로 임명하여 전열을 정비하고 음성에서 일본군과의 전투를 전개하였다. 선생의 휘하에서 활동한 김태동의 관련 기록으로 보아 남상목 부대의  활동 범위는 경기도 용인 일대에서 충북 지역까지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선생은 1908년 11월, 판교의 가족을 만나러 가던 중 밀고를 받고 출동한 일본 헌병에게 ‘느릿골’에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복역하던 중 고문의 후유증으로 생긴 장파열로 1908년 11월 4일에 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선생의 유해는 청계산 아래 ‘후천골’에 가매장 되었으며 해방 후 고향인 성남시 하산운동의 ‘뒷내골’ 선산에 안장되었다가 대전의 애국지사 묘역에 부인 이순이(李順伊)여사와 합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