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구청 정문 엎 관목이 심어져 있는 작은 화단 앞에 마치 숨겨 놓은 양 눈에 잘 띄지 않는 작은 표지석이 고개를 갸웃이 내밀고 있다.
조선조 500년의 기틀을 세운 재상이면 서도 왕권 강화에 걸림돌이라는 이유로 역적의 신분으로 죽어간 시대의 풍운아 삼봉 정도전이 살았던 집터임을 알려 주는 표지이다.
삼봉의 삶은 태종 이방원의 칼날에 스러진 그의 죽음만큼이나 극적이었다.
부친이 형부상서를 지낸 명문가에 태어난 그는 젊은 시절부터 목은 이색의 촉망 받는 제자로 정몽주(鄭夢周)· 박상충(朴尙衷)·박의중(朴宜中)·이숭인(李崇仁) 등 성리학을 표명하면서 새롭게 등장한 당대의 인사들과 폭넓은 교류를 가지는 명사였다.
관계 진출도 순조로웠으나, 청년 시절을 넘어서면서 그의 삶은 10년 가까이 유배와 추방 그리고 빈곤으로 얼룩졌다.
우왕 1년 권신 이인임(李仁任) 등의 친원배명정책에 반대해 전라도 나주에서 4년간의 유배 생활, 향리 칩거, 다시 추방 등으로 초야에 묻힐 뻔했던 그는 스스로 동북면도지휘사로 있던 이성계(李成桂)를 함주 막사로 찾아가 그와 인연을 맺으면서 새로운 인생을 만들어 간다.
이후 그는 위회도 회군으로 집권한 이성계를 도와 고려의 구세력을 일소해 가면서 새로운 왕조의 기틀을 잡는다.
조선조의 수도이자 지금도 수도인 한양의 모습도 그에 의해 설계됐고 5백년 넘게 이어질 법체제도 그가 터를 닦았다. 유교국가 조선의 불교에 대한 공식 입장도 그가 초안했다.
심지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사대부가 통치하는 국가의 이상도 그를 역적으로 치부하는 이들의 손으로 사실상 실현됐다.
삼봉은 그가 설계한 도시의 명당 터에 꽤 커다란 집을 지은 듯하다.
조유식은 <정도전을 위한 변명>에서 순조 말년에 쓰여진 <한경지략>을 인용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지금 중학이 자리 잡은 자리는 정도전 가의 서당자리요, 지금 제용감이 자리 잡은 터는 정도전 가의 안채 자리요 사복시는 정도전 가의 마궐 자리인데 모두 모두 풍수설에 맞추어 지은 것이다.”
이는 그의 집터였음을 알리는 표지석에도 기록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