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항일 의병장의 대미를 장식한 형제 장수 김원국과 김원범은 광주에서 태어나 1906년 무등산에서 300명의 의병을 규합하여 의병을 봉기한다.
형인 김원국 장군이 의병 대장이었고 동생 김원범은 선봉장이 되어 맹위를 떨치고 이듬해인 1907년 9월에는 호남의병장의 거목인 기삼연 의병부대에 합류하고 같은 해 12월에 김준과 합진하여 일본군 40여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둔다.
이듬해인 1908년 7월 김원범은 전해산 의병장과 함께 대동창의단을 조직하고 중군장으로서 영광 불갑산, 장성 동화, 담양 한재, 함평 원야 등 여러 지역에서 활약한다.
9월에는 김원국이 김원범을 따라 선봉장이 되어 100여명을 거느리고 전남 나주, 함평, 광주 일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최후의 호남의병장
그러나 이들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호남의병을 초토화시키려는 일본군의 대대적인 탄압작전은 의병부대를 사방에서 압박하게 된다.
1909년 1월 일본군의 기습으로 광주 전투에서 조경환 의병장이 전사하고 김원범은 체포된 후 자결 순국한다.
아우의 죽음에도 김원국은 물러서지 않았다.
김원국은 아우가 체포된 이후 의병을 수습하여 의병대장이 되었고, 나주향교 유림들에게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킨 뜻을 알린다.
그는 일본인이 장악한 광주 세무서에 대해서는 호남의소의 이름으로 세금을 거두지 말라고 명령하고 일본인에게 아부하는 친일파, 일진회원, 밀정 등을 처단한다고 경고하는 등 심리전을 펼친다.
동시에 의병부대를 이끌며 광주, 나주, 동복, 창평 등 전라남도 지역에서 적극적인 대일항전을 전개해 상당한 전과를 거둔다.
하지만 불갑산 전투에서 부상치료 중 적의 기습에 체포되고 만다. 김원국은 재판 과정에서 동생의 살해에 대한 보복과 국가를 위하여 의병대장이었음을 당당히 밝히고 1910년 5월 대구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