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실학에서는 분야별로 종합적인 저술이 많으나, 유교적 경세학의 체계를 세우려고 한 대표 저서로서는 유형원의 『반계수록』과 정약용의 『경세유표』를 들 수 있다.
다산은 『경세유표』를 저술하는 과정에서 『목민심서』의 저술을 매우 짧은 시일 내에 끝냈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경세유표』의 고적지법(考績之法)에서 수령이 수행해야 할 업무인 삼기(三紀:律己·奉公·愛民)와 육전(六典:吏·戶·禮·兵·刑·工)에서 저술 체계를 쉽게 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세유표』는 10여 년간 혼신의 노력을 다했음에도 끝내 저술을 마무리하지 못하여 초고 상태로 남겨질 수밖에 없었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미처 유교적 경세학의 체계에 따라 목차를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안병직 교수의 『경세유표에 관한 연구』는 거기에서 피력된 유교적 경세학의 체계를 파악하는 일로부터 출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교적 경세학의 체계가 파악되면, 『경세유표』라는 저술의 체계도 잡힐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경세유표』는 『방례초본(邦禮艸本)』이라고도 부른다. 즉 『경세유표』는 주(周)나라의 제도를 정리해 놓은 『주례(周禮)』에 따라 저술했다는 것이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은(殷)나라 이전의 국가제도를 정리해 놓은 『서경(書經)』 즉 『상서(尙書)』도 기본 참고문헌으로 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경세유표』는 『주례』에 따라서 일단 육전 즉, 육관(六官)으로 그 저술 체계를 잡아 보았지만, 경세학 체계에는 관제만이 아니라 토지제도를 비롯한 국가의 기본제도가 포괄되는 것이므로, 관직체계만으로써는 경세학 체계를 드러내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저자는 『주례』 육관의 수장(首章)으로 제시되어 있는 ‘체국경야, 설관분직(體國經野, 設官分職)’이 혹시 경세학의 체계가 아닐까 생각하고 그 체계로 『경세유표』의 장(章)들을 재분류해 보았는데, 그러한 재분류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다산 스스로도 말년에는 유교적 경세학의 체계가 ‘체국경야, 설관분직’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가 경세학 체계를 그렇게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농업이 지배적인 산업인 중세 이전의 사회에 있어서는 토지제도의 기초인 ‘경전(經田)’이 곧 왕정의 기초라는 것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경전’이 곧 ‘인정(仁政)’이라는 맹자의 가설을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1820년 무렵에 저술한 『양전의(量田議)』에서 처음으로 ‘체국경야, 설관분직’을 언급하면서 전지를 정전(井田)이나 방전(方田)으로 구획해야 양전이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그리고 1834년의 『상서』에 관한 새로운 연구인 『상서고훈(尙書古訓)』에서는 홍범구주(洪範九疇)를 정전형(井田形)으로 도해(圖解)하면서, 우(禹)임금이 홍수를 막고 전지를 정전으로 구획함으로써 국가경영의 헌장인 홍범을 실천하는 일이 상제(上帝)가 천지를 창조·운화(運化)하는 일(造化)에 동참하는 것이라 설명했다. 다시 말하면, 정전제가 단순히 토지제도 중의 하나가 아니라 왕정의 기본제도라 이해했던 것이다.
정약용은 왜 경전을 자기시대의 최대의 과제로 삼으려고 했을까. 그것은 조선의 경전제도인 결부제(結負制)를 가지고서는 정확한 경전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해는 반계와 풍석(楓石)을 비롯한 실학자들뿐만 아니라 그 무렵 식자들의 일반적인 견해였다. 결부제로써 정확한 양전이 불가능한 이유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였다. 첫째는 결부가 풍흉과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서 수시로 변동하는 수확량(즉 田稅)의 단위이기 때문에, 그것으로는 전지의 실태를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렵다는 것이요, 둘째는 결부제에서는 측량 방법으로 5가지의 전형(田形)을 제시하기는 하지만, 실제로 5가지 전형으로 토지를 구획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들은 쓸모없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결부제의 결함이 가져오는 결과는 참담했다.
호적과 양안이 왕정을 위한 기본 자료인데, 결부제 아래에서는 전지의 실태가 정확하게 파악되지 못하기 때문에, 양전을 기반으로 작성되는 이들 장부가 모두 허부(虛簿)에 가까웠다. 그 결과 백성들은 정부의 자의적인 수탈로 빈곤 속에서 허덕일 수밖에 없었고, 국가는 빈약한 재정수입 때문에 관리의 절반에게 그 빈약한 녹봉마저도 지급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상비군도 확보할 수 없었다. 국가가 국가로서 갖추어야 할 재정과 군사라는 기초적 조건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던 것이다.
정전제에 따른 경전이 앞서 보는 바와 같은 그 이론적 정합성, 학설사적 계승성 및 현실적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정전법 자체는 근대학문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경세학이 주로 의리를 추구하는 경학(經學)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정전법도 의리 추구를 그 구성요소로 한다. 『시경』의 “우리 공전에 비 와서 드디어 우리 사전에 미치는(雨我公田, 遂及我私)” 시혜적 관계라든가 “공전에 씨를 뿌리기 전에 감히 사전에 씨를 뿌려서는 안 되는(公田不播, 不敢播其私)” 선공후사적 관계가 바로 그런 따위들이다. 그런데 이러한 시혜적 또는 선공후사적 관계에는 평등한 인간관계를 전제로 하는 근대사회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신분 관계가 숨어 있다. 그러므로 근대학문의 방법론에 입각해 정전제를 분석하는 우리들은 이러한 의리 관계를 맹목적으로 추구하거나 추수(追隨)해서는 안 되며, 비록 그것을 연구의 대상으로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 윤리학적 또는 정치경제학적 함의를 냉철하게 분석함으로써 그 의리라는 찌꺼기를 걸러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 책에서는 오늘날 한국 실학의 연구가 빠져 있는 의리 추구적 경향을 극복하려고 노력했다. 또한 조선후기에 관한 자료와 연구를 통해 『경세유표』에서 주장하는 가설들의 현실적 타당성을 확인한다. 경전제도와 부세제도가 문란함으로써 백성들은 도탄 속에서 헤매고 부정부패가 창궐하여 나라가 멸망할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 조선후기에 대한 『경세유표』의 진단이다. 다산의 이러한 날카로운 진단은 우리에게 조선왕조국가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줄 뿐만 아니라, 오늘날 국가 위기의 타개책까지 제시해 준다.
동서문화사 02-546-03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