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제일은행 지금은 이름을 발음하기 조차 힘든 외국계 은행 앞에 있는 작은 표지석은 이 길을 수년간 왕래하는 이들도 좀처럼 찾기 힘들다.
이 표지석은 은행이 있는 자리가 조선시대에 국사범을 다루던 의금부 자리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조선시대 의금부는 공포스러운 곳이었다.
죄가 없는 사람도 의금부에서 고문을 당하면 차리라 거짓으로 죄를 인정하고 사형이나 유배를 선택하는 곳이었다.
정조 시대 백탑파를 주요한 소재로 수준 높은 팩션 소설들을 발표한 김탁환 작가는 자신의 소설 주인공인 의금부 도사 이명방이 모함을 받자 동료들에게 어떻게 고문을 당하는 지를 생생하게 그의 작품에서 묘사하고 있다.
의금부는 동료에게조차 피도 눈물도 없는 기관이었던 것이다.
반면 의금부는 억울한 백성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던 기관이기도 했다.
태종 2년부터 신문고가 설치되어 소속 당직청(當直廳) 낭관(郎官) 1명이 번(番)을 서면서 백성들의 억울한 사정이나 불복삼심(不服三審)의 상소 등을 받아들였고, 성종 12년부터는 단송별감(斷訟別監)이 따로 설치해 현임(現任)과 원임(原任) 조관(朝官)의 범죄도 전담하였다.
조선조 초기 의금부는 성공한 역모에 얽혀 있다.
계유정란(癸酉汀蘭) 당시 의금부 진무이던 이흥상은 김종서의 마지막 명줄을 끊고 공신에 봉해지고 봉군(封君)까지 됐다.
단종에게 사약을 내리러 가던 당시 의금부도사 왕방연은 단종에 대한 애잔함과 충심을 노래하는 시조를 남겨 오늘 날까지 전해진다. 반대이던 찬성이던 계유정난과 의금부는 넝쿨의 줄기처럼 얽혀 있다.
조선시대 다른 관청과 같이 의금부는 금오(金吾), 왕부(王府), 조옥(詔獄) 등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리며 주로 왕족(王族)의 범죄, 국사범(國事犯) 등의 대옥(大獄), 자손의 부조(父祖)에 대한 죄나 노비의 주인에 대한 죄 등의 강상죄(綱常罪), 사헌부에서 적발한 사건 기타 다른 기관에서 판결하기 곤란하여 오래 지연된 사건 등을 처결했고 사형죄에 대하여는 금부삼복지법(禁府三覆之法), 또는 삼복계(三覆啓)라 하여 3심(三審) 기관의 기능까지 맡았다.
동반(東班)의 종1품 아문으로 하여 판사(判事:종1품), 지사(知事:정2품), 동지사(同知事:종2품) 등 4명의 당상관(堂上官)을 겸관(兼官)으로 타관직자가 겸임케 하고 경력(經歷:종4품)과 도사(都事:종5품) 등 실무자 10명과 나장(羅將) 232명이 근무했다. 조선후기에는 경력이 페지되고 6품과 8품 도사로 대체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