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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지역 문화재를 소개합니다]충절의 삼인대와 절의탑

전북 순창 강천사 앞 계곡에 있는 삼인대(三印臺)와 절의탑(節義塔)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주차장에서 강천사를 향해 걸음을 재촉하다보면 연리목의 팻말이 있다. 연리목은 남녀간의 영원한 사랑, 자녀의 효성, 친구간의 돈독한 우정 등을 상징한다고 한다. 연리목의 의미를 상상하면서 걷다보면 죄를 지은 악한이라도 높이 40m에서 쏟아지는 5톤의 폭

이덕래 기자 2014. 5. 15.

 

 

전북 순창 강천사 앞 계곡에 있는 삼인대(三印臺)와 절의탑(節義塔)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주차장에서 강천사를 향해 걸음을 재촉하다보면 연리목의 팻말이 있다. 연리목은 남녀간의 영원한 사랑, 자녀의 효성, 친구간의 돈독한 우정 등을 상징한다고 한다. 연리목의 의미를 상상하면서 걷다보면 죄를 지은 악한이라도 높이 40m에서 쏟아지는 5톤의 폭포수를 맞으면 죄가 사면된다는 전설을 간직한 병풍바위가 나타난다. 폭포수아래 소(沼)에는 강천사의 명물 송어들이 헤엄치는 모습이 보인다. 죄지은 사람의 죄를 송어들이 모두 먹어 치우리라!

 

강천사 일주문인 강천문을 지나면 오늘의 주인공인 삼인대와 절의탑이 있는 강천사 경내다. 강천사 앞 계곡에 놓인 아치형다리를 건너면 정면 1칸, 측면 1칸의 비각 안에는 조그마한 비가 있다. 이 비가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7호인 ‘삼인비’다. 그리고 이곳을 ‘삼인대’라고 부른다.

 

삼인비 설치 내력은 대략적으로 다음과 같다. 조선조 제10대왕 연산군은 갑자사화 후 성균관을 폐지하여 자신의 유흥장소로 만들었고, 게다가 전국에 채홍사를 보내어 미녀들을 선발하고, 사냥터를 개설하기 위해 도성을 기준으로 30리 내에 민가를 철거하고, 훈민정음의 사용을 금지하는 등 폭정이 노골화 되었다. 이에 박원종, 성희안 등이 주동이 되어 1506년에 연산군을 몰아내고 성종의 둘째 아들 진성대군을 추대하여 왕위에 오르게 한다. 이것이 이른바 중종반정이다. 진성대군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연산군의 처남이며 좌의정을 지낸 신수근 딸과 결혼을 한 상태였다.

 

반정인사들은 신수근이 반정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사살하고, 이어 신수근 딸을 왕비로 두었다가는 후환이 두려워 중종에게 폐비를 강요했다. 중종은 처음에는 극력하게 반대했으나 결국 정국공신들의 강압으로 왕비로 책봉되어 9월 2일에 입궁해 9월 9일인 7일 만에 신씨를 폐위시키고, 윤여필 딸인 숙의 윤씨를 새 왕비로 맞아들였다. 그러나 새 왕비 장경왕후는 중종 10년에 원자(元子:인종)를 낳았으나 산후병으로 6일 만에 2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장경왕후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당시 순창군수 충암 김정, 담양부사 눌재 박상, 무안현감 석헌 류옥 등 세 사람은 죽음을 각오하고 폐비 신씨의 복위와 박원종 일당의 횡포를 통렬히 비판하는 상소문을 조정에 보냈다. 이때 상소를 올리기 전 세 사람이 각자의 직인(職印)을 소나무 가지에 걸어 놓고 결의한 장소가 ‘삼인대(三印臺)’이고, 그 내용을 적은 비가 ‘삼인비(三印碑)’이다. 이들의 뜻은 당시에는 이루어지지 못했고, 230년 뒤인 1739년(영조 15년)에 폐비된 신씨는 단경왕후로 추증되었다.

 

강천사 앞 도로 변에는 ‘절의탑’이 있다. 조선조 초기에 두문동에서 순절한 72현 중에서 다섯 사람이 순창 사람이라 하고 또한 임진왜란, 병자호란, 중종반정 등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 중에는 순창지역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순창출신으로 절의를 지킨 사람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순창군 유림들이 순창 전 지역 돌을 하나, 둘씩 가지고와 쌓은 탑이 ‘절의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