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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賢들의 멋이 깃든 亭子이야기 28뛰어난 경치를 논하는 사람들이 으뜸으로 칭송한 永保亭

영보정 영보정 편액 보령의 영보정(永保亭)은 오천항 인근 충청수영 북쪽 언덕에 위치하여 정면 6칸, 측면 4칸으로 건립되었다. 택리지(擇里志)에 “보령의 산천이 충청에서 가장 훌륭하다”라고 했듯이, 승경(勝景)이 뛰어난 곳에 위치한 영보정은 산과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수려한 풍광으로 예로부터 많은 선비들이 이곳을 찾아와 시문을 남겼다. “북쪽을 바라보니

편집부 2017. 2. 15.

영보정

 

영보정 편액

 

보령의 영보정(永保亭)은 오천항 인근 충청수영 북쪽 언덕에 위치하여 정면 6칸, 측면 4칸으로 건립되었다. 택리지(擇里志)에 “보령의 산천이 충청에서 가장 훌륭하다”라고 했듯이, 승경(勝景)이 뛰어난 곳에 위치한 영보정은 산과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수려한 풍광으로 예로부터 많은 선비들이 이곳을 찾아와 시문을 남겼다. “북쪽을 바라보니 구름 산이 어디에서 끝나는지 모를 정도로 아득한데[北望雲山欲何極] 남으로 와서는 산천의 모습이 이 세상에 으뜸이 되었다[南來襟帶此爲雄]”라는 읍취헌(挹翠軒) 박은(朴誾)의 시를 읊조리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보령(保寧)은 본래 백제의 신촌현(新村縣) 사촌(沙村)으로, 신라 때에 신읍(新邑)이라 고쳤다가 고려 초 보령현(保寧縣)으로 개칭했다. 조선 태종 13년(1413)에 현감(縣監)을 두었다. 효종 3년(1655)에 도호부(都護府)로 승격시키고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로서 부사(府使)를 겸직하였고, 고종 32년(1895)에 보령군(保寧郡)으로 고쳤고, 현재 오천(鰲川), 남포(藍浦), 대천(大川) 등을 합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청양(靑陽), 부여(扶餘), 홍성(洪城), 서천(舒川)과 접해 있다. 고을의 진산(鎭山)인 당산(唐山)이 고을 동북쪽에 있고, 서악(西岳)으로 일컬었던 오서산(烏棲山)과 백월산(白月山), 성주산(聖主山) 등 이름난 산이 있다. 백월산에서 발원한 대천(大川)이 고을 남쪽을 지나 해소포(蟹所浦)로 들어간다.

오천향교(鰲川鄕校) 서북쪽에 있는 충청도수군절도사영(忠淸道水軍節度使營)에 웅장한 정자가 있으니 바로 영보정(永保亭)이다. 연헌(蓮軒) 이의무(李宜茂)의 영보정기(永保亭記)에 이렇게 기록했다. "갑자년 봄에 함천군(咸川君) 이량(李良)이 충청도수군절도사(忠淸道水軍節度使)로 뽑혀 중임을 맡았으니, 그의 행적을 보건대 정사에 능통하고 인화(人和)를 잘하여 공용(公用) 함에 즐겁지 않음이 없었다. 영(營)의 북쪽 언덕에 옛날에 객관(客館)이 있었으니 량청(涼廳)이라 했다. 풍우로 무너져 수리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이에 공이 관원들과 상의하여 옛 건물을 철거하고 정자를 만들어 영보(永保)라고 편액을 달았다."

갑자년은 조선 연산군(燕山君) 10년(1504)으로, 영보정으로 이름한 것은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걱정한다는 뜻을 붙인 것이라고 기문에서 밝혔다. 그 후 7차례 보수를 거쳐 고종 15년(1878) 소실되었는데, 2015년 11월에 137년만에 복원되었다. 이해준 공주대학교 교수가 지은 상량문(上樑文)에 "영보정은 충청수영성의 얼굴이자 고소대, 한산사와 수려한 경관을 상징했다. 영보정 복원은 충청수영성의 영광을 계승하고, 보령시의 문화 품격을 드높이는 귀중한 계기가 될 것을 믿으며 영보(永保)의 큰 뜻이 무궁하기를 기원한다"라고 적혀있다.

광해군(光海君)이 세자로 있을 때 홍주(洪州: 洪城)에 와서 보령의 수영(水營)으로 옮겨 머물려고자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에게 가서 살펴보게 하였는데, 백사가 다녀와서 ‘머물 수 없는 곳이다’라고 대답했다. 세자가 백사를 의심하니, 백사가 "영보정은 그 경치가 호중(湖中)에서 첫 손가락에 꼽히는 곳입니다. 소주(少主)께서 이곳에 머무르시면 뒷날 방탕하는 마음을 갖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대답한 것입니다"라고 했는데, 백사의 원대한 식견을 엿볼 수 있다.

지봉유설(芝峯類說)과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에 "충청도 수영(水營)의 영보정은 제일가는 명승지이다. 예로부터 제영시(題詠詩)가 매우 많은데, 읍취헌(挹翠軒) 박은(朴誾)의 ‘땅의 형세는 탁탁 치며 곧 나려는 날개와 같고[地如拍拍將飛翼] 누정의 모양은 한들한들 매여 있지 않은 돛대와 같다[樓似搖搖不繫蓬]’라는 시를 으뜸으로 회자된다"라고 했다. 수많은 명사들이 이곳을 찾아와 취옥헌의 시를 차운하여 풍광을 읊었다.

옥오재(玉吾齋) 송상기(宋相琦)는 "널따란 맑은 호수 바다에 닿았고[明湖千頃接滄溟] 그 위에 붉은 난간 백 척 높이 정자 있네[上有朱欄百尺亭] 관리 되어 봄 경치 따라 여기 와서[玉節新隨春色到] 피리 소리 반쯤 섞인 뱃노래를 듣네[鳴笳半雜棹歌聽] 밀려오는 커다란 파도 하얗게 부서지고[驚潮浩淼波濤白] 아득한 포구에 섬들은 푸르게 보이네[極浦微茫島嶼靑] 취옹((挹翠軒)이 훌륭한 시 남겨[最是翠翁留傑句] 천천히 음미하니 문창성을 마주한 듯하네[坐來疑對一文星]"라고 노래했다.

잠곡(潛谷) 김육(金堉)은 "아침 되자 흰 물새들 반갑다고 지저귀고[朝來白鳥喜相呼] 촉촉하니 봄비 내려 호수에 물 가득 찼네[春雨濛濛水滿湖] 맑은 새벽 높은 누각 기댄 채로 바라보니[淸曉獨凭高閣望] 십주(十洲 : 큰 바다 가운데 있는 선경) 펼쳐 놓은 것으로 의심되네[却疑橫展十洲圖]"라고 노래했다.

제호(霽湖) 양경우(梁慶遇)는 저녁에 영보정을 찾아 "벼랑 끝 집을 엮어 형세가 험하고[崖顚結構勢岧嶤] 화려한 기둥과 들보는 하늘과 가깝네[畫棟雕樑近絳霄] 인사는 고금에 멋진 자취를 남기고[人事古今留勝蹟] 천기는 아침저녁으로 조수가 흐르네[天機朝暮自寒潮] 비 갠 모래톱에 어선이 돛 내리고[長洲雨過漁帆落] 안개 낀 언덕엔 멀리 게 잡이 불빛[別岸煙籠蟹火遙] 열두 난간에 가을 달이 아름다워[十二闌干秋月好] 옥렴 높이 걷으니 한밤의 퉁소소리[玉簾高卷夜橫簫]"라고 노래했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영보정연유기(永保亭宴游記)에서 "세상에서 호수, 바위, 정자, 누각의 뛰어난 경치를 논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영보정을 으뜸으로 꼽는다. <中略> 여러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마치 용(龍)이 머리를 들고 여의주(如意珠)를 희롱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이 이른바 물이 갑자기 산 속으로 들어가 호수가 된 것이다. 영보정은 이 산에 의지하고, 이 호수에 임해 있기 때문에 이 지방의 으뜸이 된다"라며 승경(勝景)을 자랑했다. 다산은 "근심스러운 모습으로 저 하늘 한쪽에 계시는 임금[美人]을 우러러 바라는 마음이 있으니. 이 마음 또한 여기에 같이 기록하여 영보정기(永保亭記)로 한다"라고 술회했다.

박광영 / 성균관 의례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