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4년 12월4일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일련의 젊은 사대부들은 우정국 낙성식을 계기로 그동안 준비해 왔던 모든 무장병력을 집결시켰다.
환제 박제가의 제자로 유대치와 오경석 등 중인들의 지도를 받으며 개화를 통한 부국강병(富國强兵)을 꿈꾸었던 젊은이들이 마침내 청국에 의해 좌지우지 되던 외세의존적인 수구파 외척 정권에 타도를 실행에 옮기기 위한 준비였다.
그리고 이들은 그날 수구파 거물들을 처단하고 14개조 정강을 발표하며 화려한 개혁 정치를 꿈꾸었다.
역사에서는 이를 갑신정변(甲申政變)이라 칭한다.
그러나 수구파 뒤에는 다수의 청나라 군대와 왕실이 있었던 반면에 그들 뒤에는 일본이라는 또 다른 외세 밖에 없었다.
백성들에게는 그들은 수구파와 다를 것 없는 외세를 등에 업은 세력에 불과했다.
그들이 내세운 정강은 화려했다.
대원군(大院君)의 송환, 문벌(門閥)의 폐지, 지조법(地租法) 개혁, 환상제도(還上制度) 폐지, 재정의 단일화 등 비교적 당시의 폐단을 객관적으로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외로웠다.
민심을 얻기 위한 작은 노력조차 기울이지 않았다.
갑신정변 2년 전에 일어났던 보수파의 정변인 임오군란에 한양의 백성들이 보여 주었던 공감은 이날은 없었다.
결정적으로 개혁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 백성의 지지가 없었던 것이다.
지지를 표명한 일본은 당시 조선에서 세력도 미약했을 뿐 아니라 역사가 보여주듯 청국 보다 훨씬 제국주의적 세력이었기에 제대로 젊은 개화파들은 자신들의 실체를 보여줄 수 없었다.
그들의 정변은 청나라 군대의 개입으로 3일 천하로 끝났다.
백성들의 돌팔매를 맞으며 일본으로 처량한 망명을 떠나야 했다.
갑신정변의 중심인물 중 홍영식 등은 남아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남은 자는 당연히 죽었고 떠나간 이들도 변절했거나 주검이 되어 모국을 밟았다.
조계사 입구 근처 지금은 불교 박물관과 함께 작은 근린공원으로 조성된 우정국의 복원된 건물에는 봄날 화단의 작은 꽃이 피어있 듯 점점이 어린 핏빛 역사가 스며 있다.
도심을 걷다 만나는 작은 쉼터 같은 이 건물에 서린 그 핏빛 역사는 우리 근대사에서 크고 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