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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賢들의 멋이 깃든 亭子이야기 32寒碧堂. 차가운 못에 청풍(淸風)과 고절(高節)이 비쳐 푸르네

전주시 완산구 교동1가에 위치한 한벽당. 한벽청연(寒碧晴煙)은 전주팔경의 하나로 수려한 풍광으로 이름나 수많은 선비들이 이곳을 찾았다. 조선 초 월당(月塘) 최담(崔霮)이 처음 건립한 이후 중수를 거듭한 후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누각으로 현재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되어 있다. 월당의 17세손인 금재(欽齋) 최병심(崔秉

편집부 2017. 5. 31.

 

 


 

전주시 완산구 교동1가에 위치한 한벽당. 한벽청연(寒碧晴煙)은 전주팔경의 하나로 수려한 풍광으로 이름나 수많은 선비들이 이곳을 찾았다. 조선 초 월당(月塘) 최담(崔霮)이 처음 건립한 이후 중수를 거듭한 후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누각으로 현재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되어 있다. 월당의 17세손인 금재(欽齋) 최병심(崔秉心)이 일본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한벽당을 지켜온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누각 안쪽 편액은 김예산(金禮山)의 친필로 9세에 썼다는 ‘義城金禮山九歲謹書’의 낙관이 있다. 강 쪽 편액은 강암(剛菴) 송성용(宋成鏞)의 친필이다. 또한 한벽정 동편의 요월대(邀月臺) 편액은 석전(石田) 황욱(黃旭)의 친필이다.

 


 


 


 

전주(全州)는 백제(百濟) 때 완산(完山), 비사벌(比斯伐), 비자화(比自火)라 했다. 신라 진흥왕(眞興王) 16년에 완산주(完山州)를 두었고, 경덕왕(景德王) 때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어 9주(九州)를 완비하였다. 효공왕(孝恭王) 때 견휜(甄萱)이 이곳에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후백제(後百濟)라 하였다. 고려 태조 19년(936)에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 성종(成宗) 12년(993)에 승화절도안무사(承化節度安撫使), 14년(995)에 순의군(順義軍)이라 했다. 그 후 조선 태조 원년(1392)에 임금의 고향이므로 완산유수부(完山留守府)로 승격시켰고, 태종(太宗) 3년(1403)에 전주부(全州府)로 고쳐 부윤(府尹)이 다스렸다.

 

고려의 문신 이규보(李圭報)는 “전주 고을은 인물이 번성하고 가옥이 즐비하여, 옛 나라의 풍모가 있다. 그러므로 그 백성은 어리석거나 완고하지 않고 모두 의관을 갖춘 선비와 같으며, 행동거지가 볼 만하다”고 평했다. 양촌(陽村) 권근(權近)은 “큰 고을이 남과 북을 갈라놓으니, 완산이 가장 특이하도다. 천년의 왕기가 모여 있으니 일대에 큰 토대를 열었구나”라고 했다.

 

사가정(四佳亭) 서거정(徐居正)은 전주향교중신기(全州鄕校重新記)에서 “우리나라는 유학을 숭상하고 도(道)를 중시하여 학교를 세우고 스승을 두었으니, 비록 궁벽진 시골일지라도 그렇지 않은 곳이 없다. 하물며 전주는 우리 왕조의 시조가 살았던 땅이며 남쪽 지역의 인재들이 모여드는 곳이니, 그들을 가르치고 기르는 일을 가장 우선적으로 행해야 할 곳이다. 고을의 자제들 또한 대대로 학문하는 집안의 출신들이 많아 선행을 즐기고 배우기를 좋아한다. 그러므로 한 고을이 교화되어 뛰어난 인재가 그 중에서 배출되니, 이것은 땅의 아름다운 기운이 모인 까닭이기도 하지만, 평소의 교육이 그 바탕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전주의 형상은 국가의 풍패(豐沛)로 산천이 영수(靈秀)하다”라고 했다. 풍패(豐沛)는 중국 한(漢)나라를 세운 고조(高祖: 劉邦)의 고향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의 선대인 이한(李翰)의 사당인 조경묘(肇慶廟)와 묘역인 조경단(肇慶壇), 태조의 영정을 봉안한 경기전(慶基殿) 등이 전주에 있다.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조부인 고공단보(古公亶父)가 적인(狄人)의 침략을 피해 도읍지인 빈(邠)을 버리고 기산(岐山)으로 옮겨가 왕업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고사와 비견되어 전주는 조선 왕업의 발상지였다.

 

전주향교(全州鄕校) 동쪽 전주천(全州川) 암벽에 위치한 한벽당(寒碧堂)은 남원의 광한루(廣寒樓)와 무주의 한풍루(寒風樓)와 함께 호남의 삼한(三寒)으로 알려져 있다. 전주읍지(全州邑誌)에 “한벽당은 태종 4년(1404)에 월당(月塘) 최담(崔霮)이 이곳에 낙향하여 세웠다”하고 한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일본이 을사늑약(乙巳勒約)을 강제로 체결하자, 민족의 독립을 위해 의병(義兵)을 봉기한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은 한벽당중수기(寒碧堂重修記)에서 한벽당의 연혁을 기록했다. “영락(永樂: 明 成宗의 연호) 경태(景泰: 明 景宗의 연호) 연간에 월당 최공(崔公) 담(霮)이 직제학(直提學)으로 있다가 벼슬을 버리고 시골로 돌아오니, 공의 아들 연촌(烟村) 최덕지(崔德之)도 얼마 후 공을 뒤따라 물러났다. 그리하여 부자는 서로 지기(知己)가 되어 강호에서 늙으니 당시의 사람들이 청절(淸節)에 감복하여 옛날 소광(疏廣)과 소수(疏受)에 비유하였다. 지금 전주부 인근 향교에서 동쪽으로 가면 석탄(石灘) 가에 숲이 우거져 상쾌한 곳에 있는데, 여기에 한벽당(寒碧堂)이 있다.”

 

한서(漢書)에 의하면, “소광은 선제(宣帝) 때 사람으로 벼슬이 태자태부(太子太傅)였고, 조카인 소수는 벼슬이 소부(少傅)였다. 소광이 소수에게 ‘벼슬이 높고 이름을 떨치면 후회할 일이 많을까 염려스럽다’라고 말하고 함께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라고 했다. 또한 중수기문에 “이곳은 월당이 평소에 거처하던 곳이니, 당의 서북쪽에 참의정(參議井)이라는 우물이 있다. 우물가에는 ‘솔개는 날아 하늘에 이르고[鳶飛戾天] 물고기는 연못에서 뛰노네[魚躍于淵]’라는 글자를 크게 새겼는데, 공의 필적이라 한다”라고 적혀 있다. “공의 15세손 최전구(崔銓九)가 한벽당을 중수한 뒤에 나를 비루하다 여기지 않고 기문 쓰는 문제를 상의해 왔다. <中略> 벼슬에 나아가면서 나아감을 사양하지 않는 자는 반드시 행할 만한 도가 있는 자요, 물러나면서 물러남을 편안히 여기는 자는 반드시 내수(內守)의 견고함이 있는 자이다. 우리나라 세종(世宗)과 문종(文宗) 연간은 문명한 시대로 임금이 위에 있어 만물이 모두 우러러 준량(俊良)의 등용이 이때보다 성한 때가 없었는데 공이 잠시도 기다리지 않고 호연히 물러난 그 뜻이 어디에 있는지 참으로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 절조가 높고도 밝아서 봉황(鳳凰)이 천 길을 나는 듯 한 기상이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백세 후에 오히려 사람을 흥기시킬 만한 것이 있다. 만일 그가 자잘하게 작은 청렴이나 삼가는 데 힘써서 어정거리며 세속의 이목에 잘 보이려고 분주했을 뿐이라면 어떻게 당대에 이름이 나서 이처럼 후세까지도 무궁할 수가 있겠는가”라고 월당의 청풍(淸風)과 고절(高節)을 칭송했다.

 

기문 말미에 “주자(朱子)의 시에 ‘깎아 세운 푸른 모서리[削成蒼石稜] 차가운 못에 비쳐 푸르네[倒影寒潭碧]’라는 글귀에서 한벽당이라고 이름 지은 것이 아닐런지”라며 누각의 명칭을 설명하고 있다.

 

백강(白江) 이경여(李敬輿)가 전라도관찰사로 부임 중에 이곳에 올라 차운(次韻)했다. “호남 땅 하나의 도회지인데[湖海一都會] 웅대한 진번은 오직 이 고을이네[雄藩獨此州] 누각은 웅장하고 화려함을 꺼리고[亭臺嫌壯麗] 수석이 맑고 그윽한 곳에 자리했네[水石占淸幽]”

 

미산(眉山) 한장석(韓章錫)은 “역정의 버드나무에 이별 생각이 길고[驛亭楊柳離思長] 석양에 수레 모는 한벽당이네[落日驅車寒碧堂] 말 위에서 봄을 보낸 나그네 신세 오래인데[馬上送春爲客久] 강남의 일을 주재하는 자가 유람할 곳 찾기 바쁘네[江南幹事索遊忙] 초록 물굽이가 개울 끼고 두 봉우리 솟았는데[綠灣夾澗峯雙角] 붉은 꽃 맺힌 높은 누대는 물 한 곳에 있네[ 紅結飛樓水一方] 바로 북쪽의 고향을 볼 수 없어 근심인데[直北鄕關愁不見] 흰 구름 뜬 한강 북쪽으로 머리 돌리네[白雲回首漢之陽]”라고 노래했다.

 

호남읍지(湖南邑誌)에 석루(石樓) 이경전(李慶全), 백강(白江) 이경여(李敬與), 서귀(西歸) 이기발(李起渤), 퇴어당(退魚堂) 김진상(金鎭商) 등 19 여명의 저명한 인사들의 이곳의 풍광을 노래했다고 한다.

 

박광영 / 성균관 의례부장